가영(정가영)은 무턱대고 애인이 있는 전 남자친구 정훈(김최용준)의 집에 찾아가 섹스를 하자고 떼쓴다. 가영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전까진 물러서지 않을 태세고, 정훈은 나름 철벽을 치지만 가영의 공격을 방어하기엔 역부족이다. <비치온더비치>는 가영과 정훈이 끊임없이 주고받는 대사(주로 가영이 얘기하고 정훈이 들어주는 식이지만)가 사실상 전부인 영화라 할 수 있다. 고정된 앵글, 흑백의 롱테이크는 오롯이 이들의 얘기에 귀기울이게 만든다. 그런데 가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얘기가 심상치 않다. 욕망의 솔직한 발현부터 색드립의 향연까지, 가영에겐 모든 게 거침없다. 단편 <혀의 미래>(2014), <내가 어때섷ㅎㅎ>(2015) 등을 통해 남녀 사이 성적 긴장감을 흥미롭게 담아온 정가영 감독은 장편 데뷔작 <비치온더비치>를 통해 성과 연애와 사랑에 대해 발칙하게 발언한다.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Woman On the Beach)을 패러디한 제목인가.
=처음부터 생각한 건 아니고 그런 느낌이어도 좋겠다 싶었다. <비치온더비치>(Bitch On the Beach)에서 ‘bitch’와 ‘beach’가 발음이 같은 것도 재밌고 ‘해변의 X년’이란 뜻도 재밌고.
-첫 장편으로 이 이야기를 택한 이유가 있나.
=시나리오를 쓰다보면 중간에 지치거나 자신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내 이야기라면, 내가 잘 알고 있는 얘기나 나에게 친숙한 주제라면 지치지 않고 장편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영이 전 남자친구 정훈의 집에 찾아가서 섹스를 하자고 조른다.’ 이 한줄로 이야기를 요약할 수 있다.
=<비치온더비치>를 찍기 전에 다큐멘터리를 한편 찍었다. <연애 후 다큐>라는 작품인데, 전 남자친구 3명을 찾아가서 ‘우리의 연애는 어땠냐’고 막무가내로 묻고 그 대답을 듣는 거였다. 영화제에 출품도 했지만 다 떨어졌다. 하지만 내게는 재밌는 작업이었다. 별것 아닌 대화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이 이야기를 지치지 않고 쓴다면 재밌을 것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캐릭터 가영을 본인이 직접 연기한다. 그래서 영화 속 가영과 감독 정가영을 연결지어서 보게 된다.
=부분적으로는 내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다큐멘터리는 아니니까, 사람들이 가영과 나를 동일시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내 얘기도 있고, 내가 들은 얘기도 있고, 그 모든 것을 재밌게 묶은 게 이 작품이다. 가영은 실제의 나보다 더 극적인 삶, 재밌는 삶을 산다. 그래서 영화에선 막 나가기도 하는데, 가영이 실제의 나보다 더 똑똑해 보였으면 싶고, 좀더 재밌었으면 싶고, 좀더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한 가영은 재밌는 아이, 재밌게 떼쓰는 아이,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영을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부질없는 바람 같다. 누구한텐 재밌고 누구한텐 불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고 그게 무엇이든 어떤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홍상수 영화 속 지질한 남자 캐릭터를 가영의 모습에 대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캐릭터의 성별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걸 전복적이라 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소스들에 홍상수 감독님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클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만들 땐 윤종빈 감독의 <비스티 보이즈>(2008)를 많이 생각했다. <비스티 보이즈>는 피가 나오지 않는데도 피냄새가 진하게 나는 영화, 짙은 인간의 냄새가 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영화가 너무 아름답고 멋있더라. <비치온더비치> 역시 그런 영화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찾아보니 윤종빈 감독님도 홍상수 감독님의 팬이더라.
-거의 매 장면이 롱테이크이고 대사의 양 또한 엄청나다.
=애드리브는 거의 없었다. 시나리오에 쓴 대로 연기했다. 영화 제작 과정을 통틀어서 대사 외우는 게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롱테이크는 오히려 기술적으로 내게 수월한 작업이었다. 카메라도 한대밖에 없고, 컷을 나누면 시간도 더 소모되지 않나. <비치온더비치>는 어차피 두 사람이 하릴없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이 전부인 영화이기 때문에 굳이 컷을 나눌 필요를 못 느꼈다.
-본인의 작품에서 직접 연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연기를 했다. 별 이유는 없다. 또 내가 직접 연기하면 배우를 기용해서 디렉팅하는 수고로운 과정도 줄일 수 있으니까. 정리하자면 일종의 재미와 편리함 때문에? (웃음)
-단편 때부터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데 거리낌없는 여성을 자주 그렸다. 감독으로서의 관심사가 분명해 보인다.
=주제를 생각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건 아니다. 만들고 보니 이런 얘길 계속 하고 있더라. 단편 작업은 특히나 재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만들었던 것 같다. 주제보다는 재미가 우선이다. 그리고 늘 멜로를 좋아했다. 사랑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예전 TV프로그램 중에 <짝>을 진짜 좋아했다. 집착하면서 봤다. 봤던 것 또 보고 또 보고. <마녀사냥> 같은 프로그램도 좋아했고, 사랑이나 연애를 다룬 것들에 어렸을 때부터 흥미를 많이 느꼈다.
-영화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영화를 워낙 좋아했는데, 10대 때는 <출발! 비디오여행>의 PD가 되고 싶었다. 막연하게 그런 일들이 재밌을 줄 알고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는데 그 분야를 내가 너무 쉽게 봤던 것 같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방송영상과에 들어갔고, 1년 반쯤 다니다가 한예종도 중퇴했다. 그 뒤 잠시 소설가 지망생으로 살았다. 소설가가 되려고 학교를 그만뒀다고도 할 수 있는데 소설에는 재능이 없는 것 같더라. 그 후론 쭉 혼자서 영화를 찍고 있다. 영화는 나의 제일 좋은 친구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 너무 오글거리지만(웃음) 진짜 영화만큼 좋은 친구가 없는 것 같다.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됐다.
-단편 작업을 꽤 많이 했다. 이야기가 생각나면 바로바로 영화 작업에 착수하나.
=지금까지 단편만 10편 넘게 찍었다. 단편은 모두 1회차, 반나절 만에 찍었다. <비치온더비치>는 4회차로 찍었다. 사실 4회차도 단편의 호흡이긴 한데, 내게는 그 4일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언제 세상이 망할지 모른다는 조급증이 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영화를 찍고 있는데 세상이 망하면 억울해서 어떻게 눈을 감지, 하는 생각. 그런데 세상이 안 망하더라. 어떻게 이렇게 무사히 영화를 찍을 수 있지 싶을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웃음) <비치온더비치> 때는 그런 조급증이 심했는데 두 번째 영화부터는 조급해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당신에게 영화는 ‘재미’인가보다. 오늘 ‘재미’라는 단어를 정말 많이 사용했다.
=내 지난 단편들의 영화제 실적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단편들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내 영화가 재밌다고 말해줄때, 그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그게 전부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한테 또 다른 재밌는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 그런 마음으로 다음 작업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