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은 봤지만 ‘빙봉’은 못 봤다. 무슨 말인고 하니,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식의 얘기가 아니라, 너무나 컨디션이 나빴던 나머지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졸았다는 얘기다. 빙봉이 나오는 후반부 장면은 통째로 지워졌다. 아니, 어떻게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서 그런 일이? 라고 당연히 반문할 만한데, 정말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당일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는 변명만 해야겠다. 물론 다시 본 <인사이드 아웃>은 진정 최고였다. 부끄럽게도, 내게 그런 영화로 <인터스텔라>도 있다. <인터스텔라>는 봤지만 맷 데이먼은 못 봤다. 그가 있던 행성에 도착하던 때 나의 눈은 스르르 감기고야 말았다. 역시 나중에 다시 보고 감탄하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시사회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만 재차 했더랬다.
민규동 감독과 진행하는 채널CGV 영화 프로그램 촬영차 드디어 <겨울왕국>을 봤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 젖히는 조카들의 ‘레릿꼬’ 스트레스로 인해 감히 볼 엄두를 못 낸 영화였다. 그렇게 다음 기회로 미루기만 하던 영화를 이제야 본 것. 아, 너무 재밌었다. 컴퓨터그래픽으로 가장 표현하기 힘든 것이 ‘물’과 ‘털’이라는데(<킹콩>의 피터 잭슨 감독, <대호>의 박훈정 감독 모두 “다시는 털 달린 짐승을 영화에 등장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첫 장면부터 얼음을 캐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게다가 얼음은 물의 속성에 더해 투명함과, 거울처럼 반사시키는 것 모두를 충족시켜야 한다. 2006년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한 지 10년, 첫 장면부터 테크닉에 관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이미 여러 번 언급됐지만 <라푼젤>에 이어 디즈니 특유의 ‘공주’ 캐릭터의 변화였다. 왕자가 나타나길 기다려야 하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로 대표되는 <백설공주>나 언제나 제시간에 귀가해야만 하는 <신데렐라>, 그리고 남자친구의 스펙도 따지지 않는 <미녀와 야수> 등 디즈니의 공주 혹은 여주인공 캐릭터는 그야말로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디즈니의 반대편에서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인 <슈렉>의 피오나 공주가 반가웠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겨울왕국>의 안나는 순록 스벤의 마차를 타고 달리며 늑대들에게 쫓길 때도 거의 혼자서 액션을 펼친다. 그 흔한 ‘들러리’가 아니다. 성에 도착해 거대 설인과 싸울 때도 그렇고, 기다리지 않고 먼저 ‘선빵’을 날리는 공주였다. 디즈니의 옛 작품들 중 <뮬란>이나 <포카혼타스>와 비교해도 더 활동적이었다. 그리고 ‘왕자와의 키스’라는 점에서 <라푼젤>에서도 ‘할 뻔’하다가 나중에 했던 것처럼, <겨울왕국>에서도 한스 왕자와 키스를 하지 않는다. 과거 디즈니의 공주들과 비교하면 정말 신선하다. 자, 이제 와서 뒤늦게 흥분하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생각해보니 제때 극장에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이든 테크닉이든 지난 몇년간 가장 혁신을 이뤄내는 분야가 바로 애니메이션 아닐까 싶다. 이번호 특집은 겨울 애니메이션 라인업이다. <씽>과 <루돌프와 많이있어> 등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다. 이래저래 골치 아픈 연말연시지만 북적대는 극장가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