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의 사상에 반대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탄압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볼테르
홍기선 감독의 두 번째 35mm 장편 극영화 <선택>(2003) 도입부에 등장하는 말이다. 극장에서 저 장면을 접했을 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기어이 하려고 하는 창작자의 ‘용기’와 반대를 무릅쓰며 업계에서 분투했을 ‘고집’ 모두가 읽혔다. 시사회에 참석한 어떤 이들은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대중문화의 시대’라 불린 격동의 90년대 한국영화계를 관통한 뒤 그가 내놓은 결과물에 대한 강렬한 자의식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선택>이라는 제목은 영화 속 주인공의 선택이기도 하거니와 감독 자신의 변함없는 선택이기도 했던 것이다. 개봉 당시 <씨네21>에서 대담(423호 기획, ‘<선택>의 홍기선 감독을 ‘주류 영화인’ 이은이 만나다’)을 함께했던, 과거 장산곶매 시절 동지이기도 했던 이은 명필름 대표는 그런 그를 두고 ‘한국의 켄 로치’라 표현하기도 했다. 과작(寡作)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언제나 선명한 사회의식 아래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꽤 적절한 비유다. 그런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떴다. 존경하던 영화인이 세상이 뜰 때마다 ‘한 시대가 지났다’는 표현을 쓰곤 하는데, 그의 죽음 또한 그렇다. 그가 영화로 싸우고자 했던 과거의 망령이 여전히 떠돌고 있음을 확인한 지금,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홍기선 감독은 1980년대 서울대 영화제작서클 ‘얄라셩’, 사회운동을 실천하고자 했던 독립영화집단 ‘장산곶매’의 창립과 조직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민족적, 사회적 소재의 독립영화를 다수 연출했고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같은 영화서적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한국독립영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작품 <오! 꿈의 나라>(1989)와 <파업전야>(1990)를 제작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처음으로 다룬 영화였던 <오! 꿈의 나라>로는 영화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이후 그는 독립프로덕션 ‘영 필름’을 설립해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를 직접 제작, 각본, 연출했다. 그의 35mm 장편 데뷔작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는 황규덕 감독의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1990)와 더불어 1990년대의 시작을 알린 중요한 독립영 화라 할 수 있다. 현대판 노예선이라 불리는 멍텅구리배에서 벌어지는 선원들의 이야기는, 심성보 감독의 <해무>(2014)가 개봉했던 당시 많은 이들이 함께 떠올린 영화이기도 했다.
이후 1990년대 격동의 한국영화계를 건너뛰었던 그가 2000년대 들어내놓은 첫 번째 작품은 바로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에 관한 영화였다. 이른바 ‘사회파 영화’라는 관점에서 같은 얄라셩 출신이었던 박광수 감독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 <이재수의 난>(1999)을 만든 뒤 침묵에 들어갔고, 장선우 감독도 <나쁜 영화>(1997)와 <거짓말>(1999) 이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으로 전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장산곶매에 몸담으며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를 함께했던 옛 동지들도 <접속>(감독 장윤현, 1997),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감독 장동홍, 1998),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감독 이은, 1998) 등을 만들며 새로운 시대와 세대에 ‘접속’하고 있던 즈음이었다. 그만 홀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당시 <선택>을 함께했던 정성훈 프로듀서는 “홍기선 감독님이야말로 김선명과 닮아 있다”고도 했다.
이후 그는 1997년 이태원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살인사건을 다룬 <이태원 살인사건>(2009)을 만들었다. 한 남자가 무참히 살해됐고 2명의 한국계 미국인이 유력한 용의자로 꼽혔지만, 누구도 처벌받지 않은 실제 사건이 소재였다. 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릴러에서 더 나아가 한국과 미국 간의 비형평성의 협정으로 인해 무고한 시민이 얼마나 안타깝게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를 추적했다. 당시 <씨네21>과의 인터뷰(2009년 9월 719호, ‘조심조심, 한-미 관계의 미스터리’ )에서 그는 “(참여정부로) 정권이 바뀌더라도 근본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닐까. 사회를 비관적으로 본다기보다 사회가 발전하든 안 하든 소외받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어디나 있게 마련”이라며 자신의 문제의식이 여전함을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옴니버스 인권영화 프로젝트 <세 번째 시선>(2006) 중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비정규직이라 휴가도 낼 수 없는 한 노동자(정진영)의 이야기를 담은 <나 어떡해>를 만들었던 그는, 7년만의 장편인 <일급기밀>에 착수했다. 1급 군사기밀에 얽힌 군 내부 비리사건을 파헤쳐가는 이야기로, 전작과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홍기선 감독 특유의 사회의식을 담아낼 작품이라는 점에서 업계의 관심이 컸다. 최근 무사히 촬영을 끝마치고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었으나 지난 12월15일, 안타깝게도 그는 서울 우면동 자택에서 세상을 떴다. 특별한 지병은 없었고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사인 미인픽쳐스에서는 예정대로 상반기 개봉을 목표로 고인의 작품이 무사히 개봉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어서 그의 신작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다.
굳이 추신을 덧붙이자면, 이제는 없어진 영화 월간지 <로드쇼> 1992년 5월호,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홍기선 감독은 자신의 베스트 영화로 빌 어거스트 감독의 <정복자 펠레>(1987)를 꼽았다.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경건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며 “내가 추구하는 작품세계 ‘사회정의’에 대한 옹호를 담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선정의 변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세계관은 전혀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그는 여기 한국영화계에서 더 많은 영화를 만들어야 했다. 다시 한번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