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씨네 인터뷰] "현실이 더 극적이더라도 영화는 제 갈 길을 간다" - <마스터> 조의석 감독
2016-12-29
글 : 이주현
사진 : 백종헌

‘건국 이래 최고 게이트’를 준비했건만 현실이 선수쳤다. 하지만 현실의 기시감이 드는 대사와 상황들, 결국엔 정의가 승리하는 권선징악의 드라마에서 관객은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다. 조의석 감독의 <마스터>는 다단계 사업으로 수조원대 사기를 친 사기꾼 조희팔의 이야기에 영감을 얻어 시작된 프로젝트다. 희대의 사기꾼 진 회장(이병헌)과 그를 쫓는 지능범죄수사팀 형사 김재명(강동원), 둘 사이를 오가며 자기 살길을 모색하는 박장군(김우빈)이 서로를 속고 속이고, 쫓고 쫓는 이야기. 데뷔작 <일단 뛰어>(2002)와 <조용한 세상>(2006) 이후 <감시자들>(2013)을 선보였던 조의석 감독은 <마스터>에 이르러 자신의 영화적 색깔을 분명히 찾은듯 보인다. 본인은 “15세 관람가 권선징악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했지만, ‘현실에 촉수를 댄 오락영화’는 앞으로 조의석표 영화의 인장이 될 것이다. <마스터> 개봉 하루 전 조의석 감독을 만났다.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어떻게 구상한 이야기인가.

=조희팔 사건이 모티브가 됐다. 그의 사망 기사를 보는데, 사망설을 믿지 않는 나로선 뭔가 재밌더라. 이 사람은 죽었을까 살았을까, 살아 있다면 왜 죽은 척을 했고, 누가 장례식을 도왔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사기꾼과 그를 쫓는 형사 이야기로 출발했다. 처음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나 <캐치 미 이프 유 캔>(2002) 같은 느낌의 영화를 상상했다. 그런데 조희팔의 이야기를 캐면 캘수록 이 사람이 정말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기꾼 캐릭터를 그렇게 멋있게 그릴 순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진 회장은 사실 조희팔로 시작했지만 대한민국의 거악들, 얘기만 하면 알 만한 거악들의 총합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팔색조 매력을 뽐내는 인물이 진 회장이다. 사기꾼을 잡는 경찰 김재명의 경우는 솔리드하고 심심하게 보일 수 있지만 사회의 썩은 뿌리를 모조리 뽑아내겠다는 선언을 하고 그 선언을 스스로 지켜내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대한민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진 영화사 집 대표, 공동 각본가인 김현덕 작가, 백지선 PD 모두 김재명 캐릭터 얘기를 하면 ‘매력 없는 게 꼭 너 같다’는 말을 하셨는데(웃음), 나는 김재명 캐릭터에 확신이 있었다. <베테랑>(2015)에서 황정민 선배가 연기한 형사 캐릭터나 <공공의 적> 시리즈에서 설경구 선배가 연기한 강철중같은 형사 캐릭터도 좋지만 그것과는 다른 모습의 형사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걸 강동원씨가 소화해줘서 정말 큰 힘을 얻었다. 박장군을 연기한 김우빈씨도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것보다 훨씬 생동감 있게 캐릭터를 만들어줬다. 우빈씨는 두 선배 사이에서 ‘나만 잘하면 된다’고 다짐했다는데 나 역시 이토록 훌륭한 배우들 사이에서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웃음)

-세 캐릭터의 힘의 균형이 중요한 영화였다. 그런데 얘기한 것처럼 정의의 편에 선 주인공 김재명은 평면적인 느낌이었고, 진정한 주인공은 진 회장이 아닌가 싶은 순간들이 많았다.

=전사가 있다거나 복수를 하는 캐릭터가 아니라서 사람들이 심심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하지만 평면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김재명은 당연히 그런 캐릭터여야 했다. 재명이 진 회장을 놓치고, 그 과정에서 장군이 다치고, 팀원도 다친다. 하지만 이후의 이야기가 진 회장에 대한 재명의 복수극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재명은 경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다. 심플하게, 상식적인 접근을 한다. 게다가 진 회장은 팔색조로 변신하고 장군이는 활어처럼 펄떡이며 춤추니까 재명이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보이는 것 같은데, 그 중심을 강동원씨가 완벽하게 잡아줬다. 만약 시간이 된다면 재명에게 감정이입해서 영화를 한번 더 봐달라. (웃음) 후반작업을 하면서 반복해서 영화를 보는데 매번 감정이 가는 순간들이 달라지더라. 어떨 땐 진 회장에게, 어떨 땐 장군에게, 어떨 땐 재명에게 감정이입해서 쭉 가게 된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관객한테 세번씩 영화를 봐달라고 할 수도 없고. (웃음) 어쨌든 가장 중점을 둔 건 세 캐릭터의 밸런스였다. 기획회의를 할 때부터 신별, 시퀀스별로 삼각형을 그려놓고 무게중심을 계산했다. 이 신에서 삼각형의 꼭대기에 있는 인물이 누구고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이들의 욕망은 어떻게 움직이고 그것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그림을 그려가며 힘의 균형을 잡아갔다. 초반에 진 회장, 장군, 김엄마(진경)가 손잡고 삼각형으로 둘러앉는 장면도 있지 않나. 피라미드 회사(진 회장의 원네트워크)도 삼각형 이미지를 연상케 하고. 영화 전반에 걸쳐 미묘하게 삼각 구도를 담고 싶었다.

-역대급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았고 결과적으로 배우들 보는 재미가 컸다.

=제일 먼저 합류한 건 동원씨였는데, 시나리오 보자마자 김재명은 이런 캐릭터네, 이런 형사 필요하지, 내가 연기하면 재밌을 것 같아, 하면서 김재명스럽게 쿨한 태도로 수락했다. (웃음) 그 덕에 프로덕션이 꾸려지고 배가 출발할 수 있었으니 나로선 정말 고마웠다. 이병헌 선배는 진 회장 캐릭터를 탐내긴 했는데, 워낙 고민을 많이 하고 신중하게 결정하는 스타일이라 사전에 캐릭터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눴던 기억이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만든 진 회장이 2차원이었다면 병헌 선배가 3차원, 4차원으로 만들어주었다. 신선한 자극이었다. 우빈씨는, 내가 현장에서 스트레스받고 우울해할 때면 촬영 끝날 때쯤 와서 날 한번 안아주고 가곤 했다. 영화 속 진 회장의 대사에도 있지 않나. “그 따뜻함이 아직 여기 남아 있네요.” 그 따뜻함을 느꼈다. (웃음)

-이병헌의 필리핀식 영어 구사는 어떻게 탄생한 건가.

=처음엔 인텔리들이 구사하는 고급영어로 대사를 작성했다. 필리핀의 상원의원한테 사기를 치는 거니까. 그런데 병헌 선배가 자신의 지인 얘기를 들려줬다. 미국 명문대를 나오고 필리핀 현지에서 사업하던 분인데 그곳에서 몇년 사업하더니 억양이 현지식으로 바뀌었다고. 그거 좋을 것 같다고 했더니 얼른 필리핀식 영어를 녹음해서 달라더라. 아직 헌팅팀은 필리핀으로 출발도 안 했는데. (웃음) 그래서 필리핀의 각기 다른 세 사람의 억양을 녹음해 와서 병헌 선배에게 드렸다. 여기 세 가지 버전 중 마음에 드는 억양으로 고르시라고.

-필리핀 마닐라에 사전 헌팅 갔다가 빈민가 톤도의 모습에 반해 ‘그래, 촬영지는 여기다’라고 했다고.

=톤도의 첫 느낌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하고 특별했다. 조금 속상했던 건 처음 헌팅 갔을 때의 느낌과 촬영 때의 골목 느낌이 달랐다는 거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실수가 있어서 마닐라 순찰대들이 하지 않아도 될 거리 청소를 깨끗이 해놓았더라. 우린 빈민가의 느낌을 담고 싶었는데. (웃음) 그래도 워낙 색감이 다양해서 좋았다. 아이들의 표정도 더없이 해맑고. 위험한 지역이었지만 해 떠 있는 동안엔 괜찮았다. 영화 보면 거리 촬영은 다 낮 촬영이다.

-액션에 집중하는 신이 많지 않아 의외였다. 영화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서야 터널에서의 첫 액션 신이 등장한다. 진 회장이 필리핀으로 뜨기 전까지의 전반부에선 특히 대사량이 많았다.

=터널 액션 이후 마닐라에 넘어가기 전, 액션 신이 하나 더 있었다. 재명과 장군과 진 회장이 얽혀 있고, 신젬마(엄지원) 형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액션 신이었다. 엄지원씨가 허리까지 다쳐가며 연기를 했는데 결국 편집 과정에서 빠졌다. 애초 시나리오가 두꺼웠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한 내 욕심이 컸다. 그렇다고 감독판을 만들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뭐라고 감독판을…. (웃음) 아무튼 <감시자들>은 처음부터 빵 터뜨리고 시작해서 걷고 쫓는 도보의 리듬이 있는데, <마스터>에서 재명과 진 회장은 달리면서 서로를 쫓지 않는다. 연설을 하거나, 모니터를 보면서 수사를 하거나, 머리를 쓰는 인물들이다. 영화 모니터해주던 어떤 분은 영화를 보더니 이 영화 장르가 뭐냐고 그러더라. 오락 액션이라고 답했다. 말 많은 오락 액션. (웃음) 시나리오작가 에런 소킨을 정말 좋아한다. 대사가 많은 그의 작품들처럼 나도 배우들에게 말을 빨리 시켜서 러닝타임을 두 시간 안에 끊겠다고 제작사 대표님한테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전반부의 리듬이 괜찮았다. 메트로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장군과 재명, 진 회장과 재명 등 인물과 인물, 신과 신이 엮이면서 충분히 리듬감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귀에 쏙 감기는 대사들이 액션의 여백을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조용한 세상> <감시자들>의 스크립터였던 김현덕 작가와 시나리오를 함께 썼다.

=<조용한 세상> 때 영화 일을 처음 했던 친구이고, 7년 뒤에 어렵게 <감시자들>에 모셨다. <감시자들> 끝나고 물어봤다. 네 꿈은 뭐냐고. (웃음) 스크립터로 굉장히 유능한 친구였고 자신의 글에 대한 욕심도 있는 친구여서 <마스터>를 함께 쓰자고 했다. 자료조사를 하던 처음 6개월은 끊임없이 다양한 얘기들만 주고받았다. 내가 기록을 잘 못하는 타입인데, 김현덕 작가가 내가 던졌던 말들을 메모해뒀다가 ‘감독님 그때 이렇게 얘기하셨잖아요’ 그러면서 난데없이 괜찮은 대사들을 툭툭 살려내고 그랬다. 감성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보완해주는 측면이 있었고 여러 방면에서 시너지 효과가 났던 것 같다.

-영화 속 대사 중 ‘건국 이래 최고의 게이트’라는 말이 등장한다. 실제로 후반작업이 한창일 때 최순실 게이트에 불이 붙었다. 영화보다 극적인 현실을 지켜봐야 했는데 심정이 어땠나.

=보는 이들은 재밌었을지 몰라도 우리는 미치는 줄 알았다. ‘건국 이래 두 번째 게이트’로 바꿀 수도 없고. (웃음) 개봉을 연기해야 하나, 그런 고민도 했다. 어쨌든 영화는 드라마와 달리 현실을 바로 반영하기 힘들다. 기획 단계가 있고, 촬영 과정도 길어 절묘하게 현실 상황을 맞추기 어렵다. 예전에 방송인 신동엽 선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 발짝 앞서가면 안 되고 반 발짝만 앞서가야 한다고. 그 말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데, <마스터> 시나리오를 쓸 당시 나는 공분이 턱밑까지 차 있던 상태였다. 세상이 왜 이렇지, 하는 느낌이었다. 평범한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나처럼 울분에 차 있는 것 같았고, 사람들의 울분이 만수가 됐을 때 영화가 개봉하면 시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으로 기획하고, 쓰고, 캐스팅하고, 찍었는데 정말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대형 게이트가 현실에서 터져서 망연자실했다. 어쩌지. 현실이 더 재밌네. (웃음) 그래도 영화는 제 갈 길을 가야 하는 거니까, 권선징악의 훈훈한 결말을 원한다면 극장에 와서 <마스터>를 봐주시면 좋지 않을까.

-<감시자들>에서도 민간인 사찰 문제를 다뤘다. 현실에 더듬이를 바짝 세운 장르영화를 연달아 두편 만들었다.

=그렇게 영화를 평해주니 감사하다. 하지만 난 15세 관람가의 권선징악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고 싶다. (웃음) 어렸을 때부터 시사 현안엔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가 신문을 읽으면 100원씩 준다고 해서 신문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예전 신문 기사엔 한자도 많이 섞어 쓰지 않았나. 그 덕에 한자도 많이 알았다. 서예학원도 다녔고. (웃음) <마스터> 역시 신문에서 조희팔에 관한 단신을 보다가 떠올린 이야기였는데, 현실에서 영화적 아이디어를 건져 올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요즘은 종이 신문을 보지는 못하고 대신 팟캐스트를 자주 듣는다. 역사, 문화, 시사 등 다양한 팟캐스트가 있고, 시사 안에서도 진보와 보수 등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팟캐스트가 있는데 좌우 가리지 않고 두루 듣는 편이다. 사고의 밸런스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음엔 어떤 이야기, 어떤 장르를 하고 싶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너무 많지만 지금 얘기하면 안 될 것 같고, 방금도 말했지만 15세 관람가의 권선징악 영화를 찍고 싶다. 아직 나홍진 감독의 <곡성>(2016)을 못 봤다. 그런데 예고편만 봐도 그 에너지가 느껴지더라. 하지만 난 그런 영화는 못 찍을 것 같다. 호러와 멜로와 에로는 찍을 자신이 없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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