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지현의 영화비평] 무의식의 속박을 극복하는 성장 드라마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2016-12-29
글 : 이지현 (영화평론가)

한 친구의 아버지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 영화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자신의 재혼 상대를 소개하는 장면으로 차근차근 흘러간다. 주인공 토마 세르(로맹 뒤리스)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피아노 연주와 관련된 우울증이 원인이 되어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토마에겐 어머니가 없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하이든의 소나타를 연주하던 어린 시절의 소년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피아노 연주를 관둔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현재 그는 부동산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제임스 토백 감독의 <핑거스>(1978)를 리메이크한 자크 오디아르의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2005)은 바로 이 시작점에서 원작과의 거리 두기를 시도한다. 레스토랑이나 수영장 등 세부 장면 하나하나를 원작과 동일하게 배치하지만 설정에 차이를 두면서 영화는 스스로의 목표치를 다잡는다. 어머니의 부재와 토마에 대한 현실적 설명이 더해지면서, 원작과 이번 영화의 공통점은 ‘아버지’에 대한 설정 정도뿐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은 영화가 지닌 새로운 주제를 두드러지게 만든다. 토마에게 아버지란 삶의 테두리이며, 동시에 그가 벗어나야 할 그림자다. 이 영화의 지향점은 아버지가 물려준 무의식의 속박을 극복하는 성장 드라마로 나타난다.

자크 오디아르만의 사실주의적 색채

생각해보면 성장영화라는 관점에서 28살이란 나이는 애매모호한, 너무 늦은 시기인 것 같다. 이 부분에서 심리적인 비극이 출발한다. 토마가 원하는 일은 음악을 연주하는 아티스트다. 하지만 그 목표에 다가가려면 여러 장애물들을 넘어야 한다. 우선 아버지가 물려준 직업적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실제로 토마가 맡은 부동산 업무는 빠른 시간 내에 임차인들을 몰아내 건물 매매가 수월해지도록 돕는 일이다. 그러니 위험한 상황들이 항시 그를 뒤따른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충동은 음악을 연주하는 감상적이고 테크닉한 기술과 전혀 다른 성질을 띤다. 그 괴리가 양산하는 불안감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애초에 주인공이 두 가지 운명을 갖고 타고났다면, 현재의 그를 끌고 가는 세계는 마음속 깊이 바라는 희망적 세계와 동떨어져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어머니의 옛 동료를 만나게 되자 차를 박차고 나가 그를 붙잡으려 하는 토마의 돌발적 행동은 이런 상황을 드러낸다. 마치 정신적 심장의 위치를 인지한 듯 그는 새로운 인생의 고리를 붙잡으려 매달린다. 지연된 욕망에 대한 깨달음이 불현듯 토마의 현실에 침입하는 것이다. 30대 언저리의 모호한 지점에서 만난 ‘전환’에 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모든 위태로운 상황들을 뚫고 바깥으로 나온다. 과연 변하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을 둘러싼 닫힌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 가능할지 오디아르는 꽤나 직접적으로 묻는다.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영화의 대답은, 그의 다른 작품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아주 비관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무려 10년 전에 완성되었던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을 통해 오디아르의 색채를 더 쉽게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예를 들어 <디판>(2015)을 볼 때 극장에서 느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의식이, 이번 영화에서 드러나는 서정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은 오디아르의 다른 작품들처럼 사실적이지만 완전히 사실주의적 스케치라 보기에는 장르적 색채가 꽤나 강하다. 미국 평단의 필자들이 지적하듯 프랑스 영화의 전통에서 바라본 장 피에르 멜빌적인 느낌도 풍긴다. 분명 프랑스영화와 누아르풍 영화의 합일점은 멜빌에 대한 심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오디아르가 프랑스의 여러 지면에서 밝히듯, 멜빌에게서 그는 아무런 영향을 받은 바가 없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멜빌과 오디아르의 공통점은 무의식중에 일어나는 일종의 브리콜라주(bricolage)와 같은 재그룹화 작업이라 보아도 될 것이다. 외부인의 관점에서 찾을 수 있는 혈통에 대한 관측쯤이라 말할 수 있다. 공동 각본가 토니노 베나퀴스타 역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영화는 “누아르가 아니다”라고. 비록 폭력과 총, 마피아가 등장하더라도, 오디아르와 베니퀴스타는 ‘세리 누아르’(Se′ rie noire)가 지닌 범죄 이야기에 관심을 두었을 뿐, 이를 시각화하는 이미지 작업에서 벗어나려 애썼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재 작가로서 오디아르가 취한 사실주의 장르영화의 모델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에 대해서도 이 작품은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누아르의 색채는 프랑스영화라는 커다란 프레임 아래, (이번 영화의 경우) 마피아를 주인공으로 삼은 미국식 독립영화에서 출발한 장르적 유희의 성향이 끌어낸 결과라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여타 최신작에서 보듯 오디아르는 장르영화의 내러티브를 사실적 카메라와 결합시키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오디아르의 핸드헬드 카메라는 매 장면에서 주인공의 시점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피사체가 종종 바뀌는 일은 있지만, 이때에도 핸드헬드의 기준점은 변하지 않는다. 만일 주인공의 친구를 화면 가운데에 잡아둔다면, 카메라와 인물간의 거리는 주인공이 상대 인물과 취하는 물리적 거리로 한정된다. 실제의 거리 혹은 그보다 더 가까운 심리적 거리에서 카메라의 시선이 유지된다. 이처럼 비슷한 거리에서 인물과 카메라가 유기적으로 소통할 때, 스크린에 비친 최후의 화면은 실제 주인공이 취하는 시선이 지닌 스토리텔링의 한계점을 보완해준다. 그렇기에 자크 오디아르 영화에서 화면의 무브먼트는 정확하게 주인공의 시점이 아니라 주인공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의 관찰을 거부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 원칙 덕분에 장르영화 또는 클리셰를 취할 때조차 오디아르의 리얼리즘은 일정 부분 성취된다. 주제에 있어서 여타 유럽의 리얼리즘 감독들처럼 사회적이거나 사회주의적, 혹은 신학적 테마를 취하지만 않을 뿐 그는 자신의 사실주의적 색채를 완성하고 있다. 자크 오디아르가 미국의 장르영화에서 상업적 오락성을 거부하지 않는 것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현대영화 감독 중 하나라는 점이다. 그의 초기 성공작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능성

‘범죄’와 ‘순수한 꿈’이란 상반적 테마가 ‘암살자’와 ‘음악가’란 강한 대비를 통해 충격적으로 합치되는 영화, 이 이야기에서 토마의 아버지는 노란색 외투를 입고 다정한 어투로 대사를 내뱉으며 끊임없이 아들을 꿈에서부터 떼어놓으려 애쓴다. 그에게서 벗어나 완전히 새 삶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할까? 어쩌면 햄릿이 무의식적으로 원했던 ‘숙부 클로디어스 암살’을 주인공 토마 세르는 실현시키려는 것 같다. 햄릿이 끝내 숙부를 죽이지 못한 이유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한 프로이트의 설명이 바로 이 지점에서 떠오른다. 아버지의 혀를 통해 내뱉는 말은 항상 폭력으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이국의 땅에서 도착한 어느 여인이 내뱉는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통해 토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능성을 꿈꾼다.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세계로 편입할 통로가 그렇게 열린다. 엔딩 시퀀스에서 피에 젖은 토마의 손가락은 그 표상이라 부를 만하다. 28살 청년이 발견한 영화적 히스테리는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던 상상계의 실체, 혹은 새로운 상징계로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마무리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진정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가능할 것 같지 않던 해피엔딩을 자크 오디아르는 실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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