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경욱의 영화비평] <여교사>, 자극적인 설정에 봉인된 주제의식
2017-01-10
글 : 김경욱 (영화평론가)

※이 글에는 <여교사>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쉬리>(1998) 이후, ‘한국형 블록버스터’ 시대의 도래와 함께 주류 한국영화는 남성 중심의 장르로 이동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모두 14편인 천만 관객 영화를 돌아보면, 여성이 주연인 영화는 <암살> 한편뿐이다. 이것은 멜로드라마의 하위 장르인 로맨스가 주류영화에서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서브플롯에서도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쉬리>의 경우, 주인공 유중원의 약혼녀이자 적대자로서 간첩 이방희가 등장하지만, <의형제>(2010)의 경우에는 이방희의 자리를 남성 간첩 송지원이 차지하고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도 ‘로맨스’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다. 예를 들어 <미션 임파서블>이나 ‘본’ 시리즈의 경우, 초기에는 로맨스가 서브플롯으로 들어가 있었으나 최근 시리즈에서는 볼 수가 없다. 로맨스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주류영화에서 남성 투톱(또는 스리톱)을 내세우는 경향이 대세가 되고 로맨스마저 사라지면서 결국 여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게 된 셈이다. 대신 여배우는 구색 맞추기식으로 조연의 역할을 맡게 된다. 최근에 개봉한 <마스터>에서 엄지원은 터프한 형사로 등장해 이전의 이미지에서 변신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강동원, 김우빈, 이병헌 사이에서 존재감은 미미했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2016년의 흥행작이자 주류영화라고 할 수 있는 <아가씨>는 예외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흥행 원동력에 스타 감독 박찬욱의 작품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김민희가 극도로 노출을 꺼리는 여성 스타의 금기를 깼다는 점과 레즈비언의 섹스를 볼거리로 전시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6년의 한국영화를 돌아보면, 블록버스터와 저예산영화 사이의 중간급 규모의 영화 <비밀은 없다> <미씽: 사라진 여자> 등에서 여성 스타의 등장이 눈에 띈다. 전자에서, 손예진은 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는 엄마로 등장 한다. 후자에서, 엄지원과 공효진은 아이를 차지하려고 사투를 벌인다. 그들은 엄마 역할을 통해 멜로드라마와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구축된 스타 이미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로맨틱 코미디 스타의 이미지 전복

올해 첫 개봉영화의 하나인 김태용의 <여교사>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여교사 효주로 등장하는 김하늘은 14년 전, 인기 텔레비전 드라마 <로망스>에서 제자와 사랑에 빠지는 여교사 채원 역을 했다. 제자 재하(이원근)와 엮이게 되는 효주는 채원의 가장 어두운 버전으로서, 로맨틱 코미디의 대표적인 스타 김하늘이 자신의 이미지를 전복하는 시도를 한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계약직 교사로 일하는 효주는 정교사가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이사장의 딸 혜영(유인영)이 느닷없이 등장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린다. 효주의 가족이나 성장 배경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없으나, 이러한 설정에서 흙수저 효주와 금수저 혜영 사이의 계급 갈등이 형성된다. 김태용은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핫한 쟁점을 설정한 다음 심리적인 차원으로 풀어나간다.

가진 게 별로 없는 효주가 다 가진 것 같은 혜영에게 느끼는 즉각적인 감정은 시기심이다. 시기심은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매우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효주의 시기심은 신경증환자처럼 심각하다(<비밀은 없다>의 손예진, <미씽: 사라진 여자>의 엄지원과 공효진도 ‘모성애’를 표면에 내세우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신경증환자처럼 보인다. 또 <씨네21> 2016년 한국영화 베스트5에 선정된 <우리들>에서, 선과 지아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는 원인에는 ‘시기심’이 있다). 혜영의 존재로 괴로워하던 효주가 혜영과 재하가 섹스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자, 재하를 차지할 계획을 세운다. 한편으로는 혜영을 협박하며 괴롭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가진 것의 하나인 재하를 빼앗음으로써 박탈감을 만회하려고 한다.

효주는 먼저 열악한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 연습실에서 혼자 발레를 하는 재하에게 학원을 보내주는 명목으로 접근한다. 그런 다음 재하가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자 자기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밥을 해주고 옷도 사준다. 이전에 효주는 소설가를 지망하는 남자를 10년 동안 돌보다 결국 헤어졌다. 논점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그녀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돌봐야 하는 남자를 반복해서 만나면서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유형의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영화와 대중영화 사이에서 길을 잃다

효주의 악전고투에도 불구하고, 흙수저는 결코 금수저를 이길 수 없다. 효주가 그 학교에서 계속 일하려면 혜영의 자비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재하마저도 알고 보니 혜영이 시키는 대로 효주를 사랑하는 것처럼 꾸민 것이었다. 효주는 완벽하게 굴욕적인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혜영이 무릎 꿇은 효주에게 최대한의 모멸감을 안겨줄 때, 효주는 혜영을 살해하고 만다. 이 장면은 공포영화처럼 섬뜩하게 연출되어 인상적이지만 한편으로는 결말에 이르러 대중적인 장르영화의 컨벤션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금수저에 대한 복수로서, 대다수 흙수저 관객에게 일말의 쾌감을 안겨주는 결말인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위에서 언급한 중간급 예산 영화에서도 발견되는 문제이다. 예산의 규모를 고려하면 흥행 요소들을 최대한 살려야 하는데, 그렇다고 작품의 질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일종의 작가영화와 대중영화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딜레마 속에서, 결과는 모두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쳤다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혜영의 약혼자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텔레비전 드라마 같은 설정이다. 딜레마 속에서 특히 고등학생 재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인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학교 연습실에서 잠들어 있던 재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효주에게 느닷없이 비몽사몽간에 키스를 한다. 이 장면 때문에 효주와 관객은 그가 효주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효주와 섹스를 하기는 해도 오로지 혜영만을 열렬하게 사랑한다. 효주와 혜영 사이의 갈등의 원인을 계급의 차이에 두었으나, 재하가 효주를 이용하고 혜영을 추종하는 이유가 그녀가 부르주아이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금수저 혜영은 흙수저 효주와 재하 모두를 마음껏 농락했으나, 재하는 결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혜영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음을 감지하면서도 효주와 섹스를 한다. 이유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섹스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혜영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운데 그녀의 고급 아파트에서, 제자 재하가 선생 효주에게 강간에 가까운 행위를 벌이는 장면은 포르노의 설정과 유사하다. 이때 효주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쾌락을 느끼는 것 같지도 않다. 효주/김하늘의 무표정한 얼굴을 제시하면서, 관객에게 판단을 미루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김태용이 어느쪽도 결정하지 못한 건 아닌지, 김하늘이 자신의 스타 이미지를 고집한 결과는 아닌지 의문이 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효주는 멘털 붕괴 상태임에도 학교의 자기 자리로 간다. 여기서 그녀가 원한 건 재하가 아니라 정교사 자리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삼 이 영화가 계급 문제를 모티브로 설정했다는 점을 환기하게 되면서 동시에 풀어낸 방법이 적절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효주를 심각한 신경증환자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혜영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녀의 고통 속에서 사회의 문제가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끔찍한 복수와 자극적인 설정 속에서 봉인되어버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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