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에서 온 인류가 지향하는 삶의 목적이 ‘2x2=4’가 되는 것은 죽음의 시작이며 인간에 대한 멸시라고 말했다. 2x2=4는 이성과 수학의 추론에 의해 보증된 과학이면서 상식이다. 인류가 마땅히 준수하기로 정한 법칙이며, 이 정상적인 이익에 반(反)하거나 역행하는 것은 곧 비정상이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는 묻는다. 어떻게 그걸 확신하나? 그것이 논리의 법칙이더라도 왜 모든 인간의 법칙이어야 하는가? 미치광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는 ‘2×2=5’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2=4가 꽤 괜찮은 녀석이라면, 2×2=5는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이 불가능한 욕망을 의지로 만드는 건 인간의 자의식이다.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의미 모를 고통과 그 초월. 이 테마를 건드리는 일은 쉽지 않다.
살다 보면 드문 경우로, 학생들에게 진실을 가르치는 선생을 만나거나 어느 날 선생이 사실을 말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인간의 잠재력이나 재능과 노력은 실은 불평등의 영역이고, 우리 모두는 노예라는 것. 알다시피 오늘날 교육의 목적은 인간을 평범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상인으로 규정될 수 있는 삶에서 되도록 벗어나지 말 것. 노동과 소비를 반복하며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고 경제 사회의 일원이 될 것. 그런데 가끔, 그렇게 살아서 과연 행복할까? 묻는 선생이 있다. 다수가 지배하는 세계의 압제에 끌려다니지 않고 감히 본인의 자유로운 의지대로 사는, 위험천만하고 고독한 삶에 대해 헛된 환상을 심어주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대개 문학이나 예술 따위를 가르치는 선생들이 자신은 학교에서 주는 녹을 받아 연명하면서 그런 짓을 한다.
무의미한 삶을 스스로 파괴하라
루퍼트 와이어트의 <겜블러>(2014)에서 짐 베넷(마크 월버그) 교수도 그런 선생처럼 보인다.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가르치는 그는 학생들에게 “나는 뭐라도 가르치는 척할 테니 너희들은 뭐라도 배우는 척해”라며 교탁 위에 벌렁 드러눕는다. 그가 자신이 가르치는 클래스 안에서 유일하게 문학적인 재능과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는 학생은 에이미 필립스(브리 라슨)뿐이다. 그가 말하는 ‘재능’이란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을 거라 믿는 미미한 잠재력 따위가 아니라 타고난 천재적인 능력이고 ‘마법’이다. 뛰어난 운동선수처럼 일반인을 넘어선 영역이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나도 통장에 돈 좀 있고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럴듯한 소설 한권 써낼 수 있을 거라고 너무나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과거에 꽤 괜찮은 소설을 써냈던 작가이지만 더이상 소설가가 아니며 글을 못 쓰고 또 써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다고 짐은 말한다. “내가 신이 되려나보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면 의미 없기에 그는 ‘상업적으로 이미 한물간 직종’에 종사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가 학교 밖에서 무엇을 하냐면, 도박을 한다. 한국인 갱단이 소유한 비밀스런 사설 카지노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던 에이미는, 그곳에서 거액의 돈을 한방에 날리는 교수의 모습을 목격한다.
짐이 한국인 갱과 흑인 사채업자에게 빌려 빚진 돈은 26만달러다. 이 글을 쓰는 지금 환율 기준으로 약 3억2500만원(나는 미국영화를 볼 때마다 꼭 금액을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있다. 얼마 때문에 저러는지 실체적으로 가늠하고 싶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가 빚을 갚아야 하는 일주일의 기한을 따라간다. 지역 대부호의 손자인 그는 어머니에게서 돈을 뜯어내지만 곧바로 빚을 갚는 대신 또다시 도박으로 날려버린다. 그러곤 이 일로 어머니와 연을 끊을 수 있다면 된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는 빚과 거기 달린 자신의 목숨에 크게 관심이 없다. 도박에 대한 그의 욕망은 자기 파괴로 향하는 의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도박중독자가 빚을 갚기 위해 안달복달하다가 마침내 곤경에서 벗어나 갱생하는 이야기가 ‘애초에는’ 아니었다. 리메이크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리지만, 원작 영화에서는 결코 아니다.
1970년대 뉴욕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던 교수이면서 실제로 중증의 도박중독자였던 작가 제임스 토백의 자기 반영적인 각본을 처음 영화로 만든 사람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1981)와 <누가 이 비를 멈추랴>(1978)의 감독 카렐 라이츠로 영화명은 <갬블러>(1974)다(2004년 EBS에서 방영한 당시의 제목 표기). 원작에서 알렉스 프리드(제임스 칸) 교수가 도박으로 진 빚은 4만4천달러(5500만원, 물론 당시 물가를 고려해야 한다). 그가 어머니에게 돈을 뜯어내는 방법은 더 은근하고 뻔뻔하다. 알렉스는 어머니를 모셔간 해변의 모래 위에 ‘44000’이라고 쓰고, 헤엄을 즐기다 나온 어머니가 그걸 보게 만든다. 어머니의 돈을 인출하러 간 은행에서, 직원이 규정상 그녀의 신분증 외에 본인을 인증할 서류를 추가로 요구하자 알렉스는 직원의 멱살을 붙잡고 “내가 저 여자 자궁에서 나왔다”라고 말한다. 학교에서 시인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가 조지 워싱턴에 대해 쓴 에세이를 가르치며, 시인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에게 실망했던 이유가 ‘지는 것’(Losing)을 두려워한 나머지 무릅쓰지 않았던 ‘위험’(Risk)이라는 결론을 낸 알렉스는 D. H. 로렌스의 말을 빌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회피”하지 않기 위해 돈을 들고 라스베이거스로 간다. 얼마간 따는 듯했던 그의 좋은 징조는 뉴욕으로 돌아오자 곤두박질친다. 빚쟁이들은 알렉스의 친인척 등 돈을 뽑아낼 모든 루트에 대해 조사를 마친 참이다. 조부는 손자의 빚을 대신 갚길 거절했다. 이제 알렉스가 돈을 갚을 마지막 방법은 그의 수업을 듣는 대학 농구선수를 통한 승부조작(Point Shaving)뿐이다. 리메이크 역시 승부조작에 이르는 건 원작과 같다.
2014년작에선 이 지점에서 플롯을 한번 더 꼬아놓는다. 짐의 이중 베팅은 실패하고 러시아 마피아 돈까지 빌린 그가 빚을 갚을 최후의 방법은 결국 다시 도박이다. 그는 마지막 판돈을 들고 코리아타운의 뒷골목에 있는 비밀 도박장으로 향한다. 그렇다. 오늘날 현대 미국영화의 주인공이 목숨을 건 룰렛을 하러 들어가는 지옥의 밑바닥은, 곳곳에 자본의 독재자들이 제 구역을 지배하는 한국인의 거리가 되었다. 짐은 50 대 50 확률의 마지막 도박에 모든 걸 건다. 영화는 나름의 근사한 결말을 맞이하지만 1974년 원작이 도달했던 지점에는 이르지 못한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진실을 받아들이고
원작의 결말. 이기든 지든 7점 이상으로 점수 차를 벌려선 안 되는 경기, 긴장과 불안 속에 경기를 관전하는 알렉스. 관중석 저편에선 경기 결과에 따라 그를 처리하기 위해 두 사내가 기다리고 있다. 아슬아슬하게 6점차로 시합을 끝내고 승리의 환호성 속에 알렉스의 제자는 선생의 얼굴을 의기양양하게 쳐다본다. 모두 경기장을 떠나는데, 알렉스는 그 자리에 멍한 얼굴로 앉아 있다. 그가 자신의 삶에서 추구했던 리스크 따위는 이 도박에 없었다. 미리 정한 게임, 정한 대로의 결과. 조직은 오늘의 선수가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진출할 때까지 그들의 시스템에서 놓아주지 않고 계속 이용할 것이다. 빚을 청산한 알렉스는 그의 도박 중개인 힙스(폴 소비노)가 같이 자축하러 가자는 걸 거절하고 경기장에서 나와 아래로 쭉 걷는다. 홀로 흑인들의 게토를 향해 내려간다. 백인이 함부로 들어와선 안 되는 위험지대에서 그는 이상한 도박을 한다. 그는 흑인 매춘부를 사는 척하고 돈을 내주길 거절한 다음, 포주의 칼끝에 자신의 목을 댄다. 나는 여기서 죽을까, 살까? 이제 거는 것은 돈이 아닌 자신의 목숨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진짜 고통을, 파괴와 혼돈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고 했다. 고통이야말로 자의식의 유일한 원인이며 인간은 이 불행을 사랑하여 어떤 만족과도 바꾸지 않는다고. 말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나는 솔직히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2×2=4 다음에는 인간이 할 일이란 없고 더이상 알아야 할 것도 없다. 2×2=4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고 도스토옙스키가 주장하는 인간의 자의식 역시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지만 하다못해 자기 자신을 때릴 수는 있다”. <갬블러>에서 2x2=4와 맞닥뜨린 알렉스는 끝내 버릴 수 없는 자의식을 가지고 지옥으로 내려가서, 자신을 때린다. 설명할 수도, 설명되어져서도 안 되는 진실을 담은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알렉스는 묘한 미소를 짓는다. 이때 흐르는 음악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1번 D장조 <거인>(Titan)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