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50박51일로 잠깐 도망갈게요.” 지난해 2월 크랭크인, 1년간의 작업을 거쳐 이제 막 개봉을 앞둔 <더 킹>의 주연 조인성이 한재림 감독에게 귀여운 엄살을 부렸다. 2008년 <쌍화점> 개봉 이후 지금까지 햇수로 9년 만의 신작이니 긴장과 흥분의 무게가 더해졌을 테다. 그간 조인성은 스크린 공백기, 아니 스크린이 ‘조인성 공백기’를 거쳐야 했다.
<더 킹>은, 오랜 기다림 끝의 선택지는 권력의 흥에 취해 정점으로 향했으나 결국 그 끝을 보게 된 검사 태수의 흥망성쇠기다. 80년대부터 거쳐온 ‘가짜 왕’ 태수의 수난사가 마치 대한민국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아 조인성이 그리는 태수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영화의 90%를 장악한 <더 킹>의 중심. 한재림 감독은 그런 조인성을 두고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확실히 달라진 조인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그렸던, 그러나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2017년의 조인성. 배우 조인성의 2막이 시작된다.
-<씨네21> 스튜디오에 얼마 만인가. 요즘은 차기작이 빨리 공개되는 편이라 이렇게 오랜만에 오는 배우도 흔치 않다.
=그러게. 그런데 여긴 왜 그대로인가. 9년 전에 왔을 때도 이 모습이었고, <마들렌>(2003) 때도 인터뷰하고 밖에 나가서 잠깐 쉬었다 돌아오고 그런 기억이 다 그대로 난다. 매번 인터뷰하면서 개봉 전이라 고민도 하고 그랬는데. 스튜디오 소품들이 거의 박물관 수준이다. (웃음) 그래도 영화전문지가 이렇게 계속 자리를 지켜주고 있어서 반갑고 든든하다 싶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제작보고회하고 인터뷰하고 바쁘게 지내는 건 <쌍화점> 이후 오랜만이다. 그사이 영화계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고, 변화의 폭도 컸다.
=상암 MBC를 못 가봤으면 옛날 사람이라더라. (웃음) 나는 여의도 MBC 시절 사람이다. 그러고보면 연기 생활 참 오래했네. 군대 갔다와서 공항 사진 찍히고 깜짝 놀랐다. 직접 겪어보니 다르더라. 그래도 그 과정을 다 겪지는 않았으니 아직까지는 반 발짝 정도 떨어져서 보게 되는 것 같다.
-<씨네21>이 21주년 창간기념 특집호로 <더 킹> 촬영장을 간 게 지난해 봄이지 않나. 촬영 1/3 지점에 만났고, 이후 긴 촬영을 거쳐 결국 완성의 순간까지 왔다.
=현장은 똑같더라. 늘 춥고 고되더라. 한재림 감독님도 필름시대부터 활동하셨던 분이라 분위기도 다르지 않고. 그런데 표준근로계약서로 촬영 시간 엄수하고, 스탭도 늘고, 이런 변화들을 직접 경험하니 좀 편해졌다. 디지털화되다보니 리허설이 조금 자유로워진 것도 좋더라. 예전에는 뭘 좀 하려고 하면 ‘롤 체인지!’했다. 순발력 있게 다시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배우로서는 도움을 많이 받는 것 같다.
-지난해 2월 크랭크인했으니 촬영과 편집기간이 상당했던 작품이다. 촬영 100회차를 거치면서 현장에 대한 그간의 목마름을 해소한 기회였을 것 같다.
=정말 그런 목마름을 원없이 다 풀었다. 영화 촬영장이 주는 낭만이 있다. 같이 출연한 (정)우성이 형이 예전 촬영장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핵 아닌가. 촬영 끝나면 1차 가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한잔 더 하고. 그걸 (류)준열이도 자연스럽게 이어받는 거다. 끝나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길 원하는 친구들도 물론 있다. 우린 그런 문화가 아니다. 눈뜨면 선배님들 식사했는지부터 챙기고, 노는 날 생기면 촬영현장 가고 그렇게 배워왔다. 우성이 형도 촬영 없는 날 현장 와서 지켜봐주시고, 컷 하면 물 챙겨주시고 그랬다. 정말 든든하더라. 그런 촬영장이 주는 낭만을 동경해왔던 나로서는 이번 현장이 주는 감회가 정말 새로웠다.
-검사 태수는 소위 말해 ‘개천에서 용 난’, 전형적인 한국형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로 부패권력의 추태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박근혜 정권의 민낯이 드러난 지금 연상되는 사건이나 상황, 인물이 많다.
=감독님 이름도 재.림, 영화사 이름도 우주필름. 뭔가 알고 쓰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웃음)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이 굿을 하고 그런다는 게…. 감독님도 캐릭터나 상황에 대해 사전조사는 하셨겠지만 영화적으로 좀 과장하려고 하셨을 거다. 그만큼 말도 안 되고, 굉장히 영화적인 캐릭터였는데, 지금 보니 기가 막히게도 이게 우리 현실이 돼버렸다. 우린 풍자를 하려고 한 건데 그 풍자가 리얼이 돼버렸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좀 당황스럽기도 하다.
-겉으로는 우아함을 가장하지만 실은 교양 없고 천박한 권력 집단, 태수와 그가 교류하는 주변 인물들이 가진 이중심리가 어떻게 표현될지가 관건이다.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다분히 기대되는 지점이자 그만큼 연기하기 까다로운 설정으로 보인다.
=망가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용기 있게, 과감하게 보여주는 게 필요했다. 슬랩스틱 코미디보다 더 강력하게 웃음거리가 되고, 구경거리가 되어야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도 될까 하는 의심이 들더라. 우성이 형과도, (배)성우 형과도 그 부분을 계속 이야기했다. 감독님도 세세한 톤을 조절해주셨다.
-조직에 충성하다 내쳐지는 <비열한 거리>(2006)의 병두는 조인성이라는 배우가 가진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잘못을 해도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애틋하고 안쓰러움이 모세혈관에 흐르고 있다고나 할까. 태수는 그간 작품에서 보여준 연민의 대상과 달리 좀더 객관적인 비판을 하게 만드는 인물이라 연기 톤으로서는 큰 변화이자 도전으로 보인다.
=이전 캐릭터들은 상당히 감정적이었다. 이 영화의 태수는 곧 관객이 보는 세상, 대한민국이어야 했다. 태수가 건달에서 검사가 되고 좌천되고 그렇게 인생의 굴곡을 지나치는 동안 그 인물을 인정하고 따라가게 해줘야 관객이 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다. 초반에 태수에 대한 호감도를 얼마나 높일지가 고민 지점이었다. 관객 입장에서는 여기 나오는 부패한 인물들이 다 나쁜 놈들이다. 태수 역시 그 분위기에 빠져 있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나 하는 내면의 욕망과 갈등이 드러나야 했다.
-한재림 감독이 촬영보다 더 무서운 게 후반작업일 것 같다고 했다. 태수가 자신이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는 상당한 분량의 내레이션도 그중 하나였다.
=정말 몇번을 했는지 모른다. 러닝타임이 2시간 정도라고 치면 내레이션 작업은 3분40초의 노래 같더라. 태수의 인생을 빠르게 내레이션으로 소화한다. 그 시도가 어떻게 작용할까. 걱정보다는 관객의 반응이 궁금하다.
-영화로는 <쌍화점> 이후 9년 만의 작품이다. <쌍화점>은 사극, 동성애 코드, 베드신, 액션 연기 등 도전 지점이 많은 작품이었다. 군 입대의 공백에 앞서 뭐든 더 보여주려는 욕심이 느껴지는 선택이었다. <비열한 거리>로 그해 대한민국영화대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기에 대한 욕심이 막 분출할 때라는 생각도 들었다. 반면 앞선 작품(<권법>)의 불발 이후 오래 돌아 도착한 <더 킹>은 어떤 목적을 가진 선택이었나.
=맞다. 그땐 객기가 있었다. 좀더 자극적인 걸 선택하고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았다. 지금은 선택에 좀더 유연해졌다고 말하고 싶다. 지인이 “그땐 그 선택이 옳았다. 그래서 지금의 네가 있는 거야”라는 말을 해주더라. 과거의 나, 그렇게 욕심을 냈던 내가 있었다. 그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게 지금 트라우마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좋든 나쁘든, 성공했든 실패했든 지금의 나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고, 그때의 내가 왜 그랬는지 지금의 내가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그 선택에 위축되지 않고 스스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스타와 배우를 구분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배우가 되겠어’라는 결심이 상당했다. 그게 내 화두였다. ‘나도 할 수 있어, 기회가 없을 뿐이지.’ 이런 생각에 한참 빠져 있을 때였다.
-군대와 작품 연기로 인한 공백 이후 이제 조인성의 스크린 필모그래피가 리셋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만큼 배우 조인성을 향한 기대 지점, 온도도 달라졌다는 체감을 하게 될 것 같다.
=객관적으로 내 위치가 달라진 걸 느낀다. 나이도 좀 들었고, 나로서는 좀 편해진 것도 있다. 내가 원하는 길을 가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내가 원하는 것도 할 수 있고, 대중이 원하는 것도 가끔 할 수 있다. (송)중기나 (김)우빈이도 아마 내가 해온 고민들을 똑같이 할 수 있을 거다. 한번은 중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지금 작업 중인 <군함도>로 2천만 관객을 한번 동원해봐라.’ 그런 성취는 내가 이루지 않아도 된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시기, 그때밖에 할 수 없는, 그때 가진 무시무시한 힘이 있다. 후배가 하는 성취에 질투하지 않고, 같이 작업하고, 같이 놀다 갈 수 있는 그런 순수한 마음이 든다. 그렇게 나이 들고 싶다. 우성이 형 보면 주연도 하지만 비중에 상관없이 조연으로도 존재감을 보여준다. 우성이 형한테 정말 많이 배웠다. 나도 그런 길을 가고 싶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절실한 게 있다면 무엇인가.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흥행도 물론 잘되면 좋겠지만 그보다 작품의 퀄리티가 잘 나왔으면 좋겠고, 나 또한 냉정하게 평가받고 싶다. 감독님과 스탭들, 배우들이 함께 영화를 만들면서 나눈 그 많은 고민의 시간들이 우리의 자존심이다. 그게 퀄리티로 입증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