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은 그간 총 10번의 대담에서 감독, 제작자, PD, 스탭, 학생 등 각계각층의 영화인들의 ‘영화계 내 성폭력’ 및 성차별적 문화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을 아카이빙했고,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모색해왔다. 이번 11번째 대담 참여자들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의 영상원 영화과 강물결, 곽소진 재학생과 이지민, 최하나 졸업생이다. 한예종 학생들을 불러모은 까닭은 이들이 자신이 소속된 영화과라는 작은 사회 내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변화를 이끌어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한예종 학생들은 산학 협력으로 제작된 페리에 광고 영상이 여성을 납치해 토막살해하는 내용을 연상시키는 여성 혐오적 내용을 담은 것에 항의했고, 연출하고 제작한 학생들의 사과를 받아냈으며 지도 교수가 해당 사태를 해명하는 공식적인 자리까지 만들었다. 한편 SNS에 문화계_내_성폭력,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생성된 후엔 한예종 영상원 영화과를 비롯한 애니과, 방영과, 연극원 등 다양한 학과들의 여성 혐오 아카이빙 계정을 개설해 활발한 제보를 이어갔다. 남학우들의 여성 혐오를 지적하는 대자보도 심심찮게 붙었고, 학내 커뮤니티에서 비판 여론도 거세게 일었다. 결국 한예종은 총장, 영상원장, 연극원장을 비롯한 각 원장과 전임 교수들이 사태에 대한 깊은 책임을 통감하고 변화를 모색하겠다는 사과문을 올렸고, 현재는 이 사안에 대한 TF팀이 신설돼 성희롱 예방을 주제로 한 강의를 공필 수업으로 만드는 등의 방안을 검토 중이다. 영화과에서 시작된 변화가 영화계로도 이어질 수 있을까.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봤다.
강물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학과 13학번 사운드 전공. 현재 재학 중이다. 트위터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 여성 혐오 아카이빙 계정의 공동 운영자이자 센세이셔널했던 교내 대자보 ‘씨스탠드 조금 든다고 욕하던 영남이에게’를 작성한 장본인이다. 단편 <발치>의 후반작업을 막 마무리했다.
최하나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학과 10학번 시나리오 전공. 2016년 졸업했다. 영화 및 페미니즘 굿즈와 배지를 제작하는 초우상회 공동대표이자 돌곶이요괴협회 회장으로, 최근 <귀여운 요괴도감>을 출간했다. 대단한단편영화제 상영작 <고슴도치 고슴>(2012)을 연출했다.
이지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학과 08학번 촬영 전공. 2016년 졸업했다. 인디포럼 상영작 <오늘 너는>(2013)을 비롯해 밴드 못의 <먹구름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뮤직비디오, 네이버 온 스테이지 코너를 연출 및 촬영했다. 현재 뮤직비디오를 비롯한 영상물과 사진을 작업하는 프리랜서 비디오그래퍼 겸 포토그래퍼로 일하고 있다.
곽소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학과 14학번 연출 전공. 현재 재학 중이다. 개봉 예정인 이길보라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기억의 전쟁>에서 촬영을 맡았다. 시위를 전위적으로 하는 학내 모임 ‘새나라 새방구’에 소속되어 있으며, 실험영상과 퍼포먼스 작업을 주로 하고 있다. 영화를 제작하는 대안적 시스템에 대해 고민 중이다.
-여태까지 영화인들의 대담을 본 소감이 어떤가. 이 자리에 나오기까지 용기도 필요했을 것 같은데.
=최하나_ 트위터에 고발 해시태그가 올라오는 걸 보면서 몸이 아플 정도로 화가 났다. <씨네21>에서 연속 대담으로 다뤄준 덕에 업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어서 좋더라. 이 자체가 연대고,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는 생각에 힘이 난다. 그전까진 많은 고발이 익명으로 이뤄졌고, 아카이빙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는데 가시화가 된 것이니까. 나도 가시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해야겠다 싶어서 나왔다. 대담 나오기 전에 영화과 친구들을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대화를 나눴는데, 파도 파도 끝이 없더라. (웃음)
=이지민_ 대담 기사들을 보며 속이 시원했다. 이제 확실히 가시화됐다는 느낌이었다. 여성들의 입장에서 말로 표현하진 못했지만 모두가 느껴왔던 것들이 정확히 드러나는 계기가 됐달까. 이를테면 연출 전공 여학생들은 많은데 왜 여성감독은 없을까, 짐작 가는 이유는 수백개지만 선배들에게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감독, PD, 스탭 등 분야별 대담을 통해 어느 정도는 객관적인 지표가 쌓인다는 게 좋더라. 물론 혹시 받을지도 모르는 불이익에 신경이 안 쓰였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것에 매여 말을 안 하면 안 된다는 반발심이 들었다.
=강물결_ <씨네21> 같은 영향력 있는 매체에서 이런 문제를 다뤄줘서 좋았다. 그간의 대담을 보면서 연대감을 느꼈고, 용기를 얻었다. 혹시라도 불이익이 생기진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할 말이 너무 많았다.
=곽소진_ 대담을 쭉 읽어왔고, 이야기의 장이 펼쳐진 게 좋더라. 대담에 나와준 선배 영화인들이 든든했고 위안도 됐다. 나오는 데 용기는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웃음)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에서 산학 협력으로 만들어진 페리에 광고 영상이 여성 혐오적 내용으로 문제가 됐다. 여성을 납치해 토막살해하는 것을 연상케 하는 장면을 보여주다가 알고 보니 피해자가 여성이 아닌 페리에병이었다는 반전을 준 영상이다. 학우들의 반발로 영상은 삭제되었고, 연출한 학생과 제작한 학생이 사과문을 올렸다. 지도 교수는 학생들에게 해명하고 의견을 듣는 공식적인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최하나_ 학교에서 지원받아 만든 작품이고 담당 교수도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영상이 나왔는지 놀랍더라. 장르적 쾌감에만 치중하다 젠더 감수성을 무시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지민_ 그 영상에서 이미지를 쌓아올리는 방식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그 뒤로는 페리에를 못 먹는다.
곽소진_ 나 역시 그 음료를 먹고 싶지 않다. 능동적 보이콧이 아니라 영상을 통해 그 음료의 이미지가 그렇게 됐는데 소비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이렇게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진 광고 영상을 누구도 문제제기하지 않고 컨펌하고 릴리즈할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그 영상은 보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는 걸 인지조차 못하는 것 같다.
이지민_ 이후 제작자, 연출자가 올렸던 사과문은 문제가 된 것에 대해 정확히 언급하는 좋은 사과문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지도 교수가 올린 글이 문제였다.
최하나_ 표현의 자유를 들며 예술은 검열해선 안 되고, 이제 막 피어나려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짓밟지 말라는 논조였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면 비판이 있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창작자의 태도도 중요하다는 걸 왜 모를까.
이지민_ 올바른 비판과 논의가 이어져야 하는 상황에서 검열을 하지 말라는 것이야말로 단순한 입막음에 불과하다. 교수의 그 글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제대로 된 사과문을 요구해 간담회 자리가 만들어졌다.
강물결_ 간담회에서도 남학우와 여학우의 온도 차가 극명했다. 여학우들은 20여명이 참석했는데, 남학우는 3명밖에 오지 않았더라. 교수님과도 소통이 되지 않았다.
이지민_ 교수님은 ‘여성 혐오’가 뭔지도 몰랐다. 그저 여성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게 여성 혐오인 줄 알고 계시더라.
곽소진_ 총학생회에서 내용을 기록했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기록이 어려운 지경이었다더라. (웃음) 간담회라고 부를 수 없는 자리였다. 해결하는 장이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저 교수님의 억울함만 호소하는 자리였다. 사과문을 다시 써주셔야 하고, 영상원 전체의 이름으로 전체 학생들과 교수들과의 간담회를 주선해주고, 학사 내규를 바꿔서라도 공필 과목의 개설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대화가 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최하나_ 페리에 영상 외에도 학내에서 제작되는 여성 혐오적인 콘텐츠에 대응한 적이 있다. 교내에 한 영화의 배우 구인 전단지가 붙었는데, ‘2m 길이의 성기를 가진 남성이 성관계 중 여성의 입을 성기로 뚫어서 죽이는 영화를 찍겠으니 연락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전단을 패러디해 바로 옆에 ‘남성이 2m 성기로 여성을 살해하는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한 창피한 남자에 대한 영화를 찍겠으니 연락 달라’는 전단지를 붙였다. 전단이 몇 차례 붙으며 공방이 오갔고, 나중엔 전단지를 붙인 남학우를 만나 그 이야기가 왜 여성 혐오적 내용인지 설명했지만 이해를 하지 못해 안타까웠다.
이지민_ 패러디 소자보는 정말 재미있었는데, 이후에 (최)하나씨가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최하나_ 그 일 이후 내 연락처가 있는 전단지 사진이 모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갔더라. 메시지 앱에 모르는 사람 50명이 친구로 추가돼 연락이 오거나, 내 프로필 사진을 보고 품평을 했다.
-콘텐츠로 드러난 것 외에도, 영화학과 내에서 여성 혐오적이거나 성차별적인 분위기를 느낀 적이 있나.
강물결_ 워크숍 단편을 찍으며 합숙했을 때 일이다. 제작을 맡은 헤드스탭이 남자 선배였는데, 여자 후배들을 불러서 합숙 기간 내내 밥을 하라고 시키더라. 왜 남자들은 안 하냐고 물어봤더니 할 줄 모른다는 거다. 어느 날은 촬영이 다 끝나고 여자들이 자려고 2층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 선배가 올라와서 “물결아, 밥해야지” 하는 거다. 내가 쌀을 씻어 앉혀서 압력취사 버튼만 누르면 되는 상태였다. 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했더니 무작정 자기는 할 줄 모르니까 나보고 하라고 하더라. 어쩔 수 없이 내려가서, 낄낄거리며 떠들고 있는 남자 선배들을 지나쳐 취사 버튼을 누르고 왔다. 황당했지. (웃음) 합숙하는 현장에 가면 식사 준비는 당연히 여자 후배들의 몫이다.
최하나_ 입학했던 20살 때 선배가 불러서 현장에 처음 갔다. 인력이 필요하다고 절박하게 부탁해서 갔는데 막상 가니 사람이 많았다. 스탭들이 전부 나이 많은 남자들이었는데 나를 부른 선배가 다른 남자 선배에게 “형, 전에 말했던 토끼가 쟤야”라고 하더라. 그랬더니 그 선배는 웃으며 “그래? 오늘의 화동은 하나야?” 하는 거다. 당시엔 그 말의 함의를 제대로 파악을 못했고, 찝찝했지만 일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했다. 나중에 비슷한 일을 몇번 더 겪으면서 나를 눈요깃거리로 부른 거라는 걸 알게 됐다.
성적 대상화 아니면 ‘미친년’
이지민_ 현장에서 여자는 고정된 성역할로 대상화되는 게 아니면 ‘미친년’이 된다. 우리 영화과에 유명한 ‘3대 미친년’이 있지 않나. 좋은 작품을 찍어서 국내외 영화제에 자주 갔던 연출 전공 선배들을 그렇게 부른다. 현장에서 독하다는 거다. 그들이 누굴 욕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고, 단점이 있다 해도 개개인의 특성일 수 있는 건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 특유의 특징인 양 ‘년’으로 카테고리화한다.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멸시가 깔려 있는 거다.
최하나_ 성격 나쁜 남자감독들도 많은데 왜 ‘3대 미친놈’은 없을까. 여자 연출과는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작업하지 않겠다는 남학생들을 자주 봤다. 심지어 여자 연출에 여자 촬영감독, 여자배우인 현장을 ‘삼재’라고 말하는 경우도 봤다. 하지만 정작 가장 힘들었던 현장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남자 연출이다. (웃음)
이지민_ 남성 연출자가 현장에서 패닉에 빠지면 “그럴 수 있지”라고 하면서 여성 연출자가 그러면 “그럴 줄 알았다”가 되니까.
강물결_ 한 여성 연출자를 언급하면서 여자 같지 않고 털털하다며 치켜세우는 이야기도 들었다. 남성적이라고 대변되는 특징들이 마치 영화를 잘하는 능력인 양 간주되는 거다. 입학해서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에 좌절했던 것은 영화를 하기 위해선 여성스러움을 버려야 하고, 여자들은 필드에 나가면 힘들기 때문에 영화를 안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 교수님에게 “너는 영화 안 하게 생겼다. 영화하려면 너처럼 여성스러우면 안 돼”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내가 영화를 할 만한 남성적 성격이 없으니 능력이 없는 건가 좌절하게 되는 말들이었다.
이지민_ 난 영화를 하기 전까지 내가 여성이라는 게 약점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영화를 시작하니 내가 어린 여성이라는 게 큰 약점이더라. 영화과는 여성과 남성 비율이 7 대 3 정도로 여자가 훨씬 많은데도 여성 촬영 전공 학생은 드물다. 촬영이 재미있어 촬영 전공을 선택했지만 돌아오는 말들은 “너 이거 들 수 있겠어? 여자는 촬영하기 힘들어” 하는 말뿐이었고, 같이 촬영을 시작한 남자 과 동기들에 비해 들어오는 작품 수가 훨씬 적었다. 많이 경험해봐야 실력도 느는데 기회 자체가 제한된 느낌이었다.
최하나_ 난 여자라 일을 못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무리하게 일을 하기도 했다. 시스탠드(긴 철제 플래그 등을 지지하는 3개의 다리를 가진 촬영, 조명 설계용 스탠드. Century Stand라는 이름을 줄여 C스탠드라고도 부른다.-편집자)를 하나밖에 못 든다고 해서 촬영 능력이 없는 건 아니잖나. 촬영감독이 디자인을 하면 조작은 오퍼레이터가 해도 되는 건데. 지난 <씨네21> 1084호 여섯 번째 영화계 내 성폭력 대담에 참여했던 김보라 감독이 모든 촬영 기자재가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맞춰져 있다는 말을 한 것이 인상 깊었고, 나도 해방감을 느꼈다.
강물결_ 모든 게 여자는 영화를 못한다는 뿌리 깊은 편견에서 비롯 된 거다. 연출부가 전부 여자인 현장에 참여한 적이 있다. 한 남학우가 “여자만 있는 연출부는 한번쯤 의심해봐야 한다. 여자밖에 없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하더라. 남자가 월등히 많은 현장은 자연스러운데, 어느 한 파트가 여자로 이루어져 있으면 부정적인 이유를 찾으려 한다.
최하나_ 생각해보면 현장뿐 아니라 학내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권력자는 늘 나이 많은 남자 선배고 그를 우러러보고 형님으로 모시는 남자들의 ‘알탕 카르텔’이 있었다. 어떤 선배는 공공연하게 “내 현장에 여자는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교내든 촬영장이든 술자리든 그런 사람이 항상 자리의 중심에 있고 그 자리에서 여자는 대상화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쿨 걸’ 혹은 ‘명예남성’들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지민_ 영화 현장의 수직적인 체계와 남성들의 마초적인 가치가 결합된 결과다. 이 과정에서 여성적 소통방식은 무시된다. 조직적으로 일을 하는 것과 남성 중심적인 소통방식은 사실 별개의 문제인데, 남성 중심적인 수직 관계만이 디폴트로 받아들여지고 다른 규칙들은 배제되는 거다.
곽소진_ 사람이 먼저 있고 그에게 편안한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현장에선 내 존재 자체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시스템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내가 못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가 시스템에 맞지 않아 있을 수 없게 된다. (이)지민씨와 작업을 같이 했을 때 나는 나에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고 그것이 너무 편안했다. 기존 남성 위주의 시스템 안에 진입하자면 우리 몸을 어떻게든 부자연스럽게 바꿔서 우겨넣을 수밖에 없지 않나. 나는 우리가 편안하다고 느끼는 시스템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대안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지민_ 연출자의 성격에 따라 다른 형태의 시스템이 나올 수 있어야 하는데, 학교에서조차 그런 것이 허용되지 않는 경직성이 있다. 학교는 이런저런 걸 다 해보고 배워가는 장인데, 상업영화 현장을 다녀온 누군가들의 대물림으로 이런 문화와 구조가 계승되는 거다. 이젠 우리가 주체로 나서 새로운 판을 만들어보고 싶다.
최하나_ <미씽: 사라진 여자>(2016)의 공효진 배우가 엄지원 배우, 이언희 감독과 작업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인터뷰를 봤는데 “술을 안 마시면 진솔한 이야기를 못하는 남자들과 달리 물 마시고 스트레칭하면서 이야기했다”는데, 천국이다. (웃음)
이지민_ 남성 중심 소통방식만 강조되는 와중에 긁어주는 느낌이 있었지. (웃음) 여성 창작자들의 공감을 많이 산 이야기다.
곽소진_ 우리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러 새로운 형태와 시스템들이 있을 텐데, 지금은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에 지배되는 하나의 필드와 하나의 기준밖에 없는 거다. 그렇기에 기존 담론을 비판하고 새로운 담론의 장을 펼치자는 이의 제기가 생겨나는 거고. 제2의 목소리가 있고, 이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세계가 있어야 한다. 이걸 파괴하려는 목소리로만 받아들이는 건 그들이 두려워서겠지.
체화되지 않은 온도 차가 불러오는 차이
-본격적인 필드가 아닌 교육 현장에서부터 여성 혐오에 부딪힌다는 건 큰 문제다. 촬영현장뿐 아니라 수업 과정에서도 체감하는 부분이 있나.
최하나_ 교수나 강사들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워크숍 단편 과정 중 성추행을 당할 뻔한 한 여학우가 담당 교수를 찾아가 상담했더니,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데 무너져서 되겠냐. 강해져라”라고 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강물결_ 수업시간에도 교수나 강사들이 여성 혐오적 영화를 레퍼런스로 보여줄 때가 많고, 여성 혐오적 발언도 빈번히 듣는다.
이지민_ 가르치는 교수가 페미니즘의 반대편에 있다면 당연히 그의 담론이 답습될 수밖에 없다.
곽소진_ 여성 혐오를 재생산하는 이중적인 문제다. 조직이 남성 중심적으로 돌아가는 문제도 심각하지만 영화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니까. 최근 페미니즘이 ‘힙’한 것이 됐고,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담론이 됐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의 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삶에서 지향하는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다른 이야기고, 둘 사이의 갭은 늘 존재한다. 시나리오를 다 같이 보는 수업이었는데, 한 남학우가 술 취한 여자를 자취방에 데려가 어떻게 한번 자보려는 여성 혐오적 시나리오를 써왔다. 많은 여학우들이 합평하지 않겠다고 보이콧을 했다. 그러자 그 수업의 강사가 “그냥 예술작품일 뿐인데 이렇게 냉혹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하더라. 그의 태도가 너무 우아해서 부럽더라. (웃음) 우리는 이 시나리오를 보는 것만으로 몸이 떨리고 수치스러운데. 체화되지 않은 그 온도 차이가 남성과 여성간의 차이를 만드는 거다. 우리한텐 이게 삶이고, 자칫하면 화장실에서 개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문제이지 않나. 담론이 아니라 삶의 문제, 생명의 문제인데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가 절망스러웠다. 어떤 수업에선 사랑을 주제로 작업을 해오라는 과제가 있었다. 어떤 학생이 여성간의 사랑도 되냐고 질문하자 “보편적인 사랑이 주제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더라. 남성 교수진의 보편이라는 개념은 너무 좁고 편협하다. 그 안에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이 설 자리는 없고, 여성 중심의 시나리오를 써갔을 때 제대로 비평해줄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여학우들이 여성 친구들간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써가는데, 남자 교수들은 이야기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디벨로프 과정에 접근하지도 못하더라. 이런 식으로 교육현장에서부터 여성 위주의 콘텐츠가 필터를 뚫고 가지 못하는 거다.
이지민_ ‘3대 미친년’으로 지목된 능력 있는 여성 연출자 선배들이 최소 5~6년 동안 회자된 인물들인데, 그들 중 아직도 장편 상업영화로 데뷔한 선배가 한명도 없다는 것도 하나의 사례라고 본다. 나 역시 신인감독을 찾는 제작자에게 여성감독을 추천했더니 “그분은 여자잖아”라고 거절당한 적이 있다.
강물결_ 학교에서는 여자가 더 많은데 여성감독은 너무 적다. 통계를 보니 다양성영화는 그래도 여성감독이 있는데 상업영화의 경우 숫자가 확 줄어들더라. 그만큼 여성감독이 상업영화판에 진입하기 어렵고 남성들간의 카르텔이 견고하다는 것이겠지.
최하나_ 몇년 전, 한예종 영화과 재학 중에 성폭력을 저질러 퇴학당한 남학생이 있다. 그런데 그 가해자가 학교를 나간 뒤에 바로 상업영화 현장으로 가서 지금은 10개나 되는 상업영화에 참여했더라. 피해자는 자기를 성폭행한 가해자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현장에 노심초사하면서 가야 하는데, 가해자는 당당하게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거다. 심지어 퇴학당한 후 재학생이 불러서 교내 워크숍 작품에 참여하러 온 적도 몇번 있었다.
이지민_ 학교를 나가 상업영화 현장 활동을 하는 건 제재할 수 없다 쳐도 다시 학교로 부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폭력 가해자인 남성마저 이런 알탕 카르텔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거다.
최하나_ 내가 참여하기로 한 영화에 가해자가 스탭으로 온 적이 있다. PD가 내가 피해자 지인인 걸 알아서 불편하면 나오지 말라더라. 그 사람 딴엔 배려였겠지만 결국 현장에 남은 건 나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다. 학교 작품에 출교 조치 당한 사람이 크레딧에 버젓이 나오는 게 말이 되나.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해시태그가 생성되면서 한예종 영상원 영화과, 애니메이션과, 방송영상과, 영상이론, 연극원 등 다양한 여성 혐오 아카이빙 계정이 만들어졌고, 학내 성폭력 및 여성 혐오에 대한 수많은 고발들이 올라왔다.
강물결_ 사실 내가 친구와 둘이서 한예종 영화과 여성 혐오 아카이빙 계정을 공동운영하고 있다.
이지민_ 전혀 몰랐는데.
최하나_ 우리도 지금 알았다. (웃음)
강물결_ 영화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들을 보면서 너무 우울했는데, 애니메이션과 여성 혐오 아카이빙 계정이 생기는 걸 보자마자 영화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만들었다. 처음엔 다이렉트 메시지로 받다가, 혹시 모를 피해를 방지하고자 몇 가지 조항을 만들어 구글 서식으로 제보를 받았다. 계원예술대학교에서 메시지가 와서 연대하기도 했다.
곽소진_ 연극원 계정주에겐 계정을 폭파하라는 연극원의 압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대로 책임을 지자는 의미에서 88명이 모여서 공동계정주로 이름을 싣고, 그들끼리 만나 대담회도 하며 적극 대응했다더라.
-영화과 내 남학우들의 여성 혐오를 신랄하게 지적한 “시스탠드 조금 든다고 욕하던 영남이에게” 대자보도 트위터상에서 1200번 넘게 리트윗이 되면서 화제가 됐다.
강물결_ 또 하나 고백하자면 내가 썼다.
-명문이더라. (일동 박수)
강물결_ 페리에 사건이 터졌을 때 남학생들이 “여학생들 너무한 거 아니냐”, “왜, 상처 받았다잖아” 같은 농담조의 말을 하면서 자기 일로 생각하지 않는 걸 보고 화가 났다. 간담회가 끝나고 교수님이 여성 혐오가 뭔지도 모른다는 것에 폭발해서, 그날 밤에 썼다.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붙여놨는데 남학생들이 보면서 “영화과엔 영남이가 없는데 누굴 말하는 거지?” 하고 있더라. 어떻게 영남이가 ‘영’화과 ‘남’자들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있나. 여성이 한번 실수를 하면 개인의 실수가 아닌 여성 전체적인 특성으로 그렇게 몰아가면서. (웃음)
이지민_ 그게 인지가 안 된다는 게 슬픈 일이다. 과별로 영남이, 애남이, 방남이 다 만들어서 붙여줘야 한다. (웃음)
-교내 분위기에는 변화가 좀 있나.
강물결_ 페리에 사태가 터지면서 많이 느꼈던 게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문제를 받아들이는 온도가 너무 다르다는 거다.
이지민_ 그래도 좀 조심하는 느낌은 든다. 말하기 전에 한번 생각해보거나. 이런 말하면 어디 잡혀가진 않을까 하는 태도라도 생기게 된 거다. (웃음) 그것보다 여학우들 사이에서 남학우들이 농담을 할 때 ‘이건 좀 아닌데’ 생각했던 걸 ‘너 이건 잘못됐어’라고 말할 수 있는 인식 변화가 일어났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계속 변화할 수 있도록 전담 기구와 시스템이 확실히 만들어졌으면
-페리에 사건 간담회, 한예종 여성 혐오 아카이빙 계정, 대자보 활동과 학내 커뮤니티에서의 활발한 의견 개진들의 성과가 있었다. 총장을 비롯해 영상원장, 연극원장을 비롯한 각 원의 원장들, 전임교수들에게 사과와 공약을 받아냈다. 영상원에서는 성평등 및 젠더 감수성 강화를 위한 공필 수업 개설, 교수와 강사 그리고 학생의 성차별 및 소수자 혐오를 방지할 지침서 마련, 진상 파악 및 사례 기록을 위한 백서 발간, 유사사태 재발 방지를 위한 학사체계 및 영상원 문화에 대한 전반적 검토, 학생과 학생회 그리고 교수들이 참여하는 가칭 ‘영상원 여성 혐오 태스크포스’의 설치를 약속했다. 현재는 학교쪽에서 테스크포스(TF)팀을 만들어 학생 참관이 가능한 5차 회의까지 진행했다던데.
강물결_ 아직 이루어진 것은 TF팀이 생긴 것밖에 없는데, 이름이 ‘바른 성문화 장착을 위한 태스크포스’다. 고발된 성폭력 사례들은 전부 남성 가해자들이었는데, 변화해야 할 주체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바른 성문화라는 누구나 듣기 편한 워딩을 사용해 본질을 흐리는 이름이라 아쉽다.
곽소진_ 연극원에서는 교수들이 성인지 및 성희롱 방지를 주제로 한 강의를 필수 과정으로 신설하는 안을 구체적으로 논의 중인 상황을 공유하고 있더라.
최하나_ 어쨌든 이렇게까지 된 이상 영상원 교수들도 좌시하진 않을 거다. 성희롱 예방교육을 할 계획이 있다는 이야기를 비공식적인 경로로 듣긴 했다. 지금은 방학 중이니 학기가 시작되면 더 많은 활동들이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이지민_ 제도적인 변화가 학내 분위기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드에서도 성희롱 예방교육의 필요성이 인지되고 있고, 여성영화인모임에서 대책기구를 만들고 감독조합에서도 특별기구를 만들겠다는 입장 발표를 하는 등 변화의 움직임이 있다. 영화학과의 재학생 혹은 얼마 전 졸업한 졸업생으로서 영화계에 바라는 점이 있나.
강물결_ 필드에 나가면 학교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안전한 학교조차 이런 수준인데 밖에 나가면 어떨지 걱정된다. 그럼에도 여자이기 때문에 못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는 부담도 있다. 이런 환경 개선을 위해 페미니스트 남성 영화인들이 적극 나서줬으면 좋겠다.
최하나_ 맞다. 그들의 역할이 크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다 해도 ‘알탕 카르텔’을 깨부술 의지가 없으면 계속 제자리일 거다.
이지민_ 그들에게도 ‘알탕 카르텔’을 깨고 나와 소외된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한명이라도 깨준다면 변화는 시작될 거다.
최하나_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함께 진지하게 고민해줘야 한다.
이지민_ ‘찍는 페미’에 나가 현장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이 문제를 누가 중재하고 책임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고, 제작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견이 중론이었다.
강물결_ 지난 1085호 영화계 내 성폭력 대담, 남성감독들 편에 참여했던 박찬욱 감독 말대로 투자사 내규를 만들어 의무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이지민_ 표준근로계약을 철저히 지키고 스탭들의 일하는 질을 더 높일 수 있게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압박에 놓이게 되면 다양한 가능성과 서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이 좁아지고, 압박에 쫓겨 영화를 찍는 데만 급급하게 되니까. 창작자의 입장에선 제작자 및 투자자들이 여성 스탭만큼 여성 관객도 많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극장가를 점령한 영화들을 보면 비슷비슷한 남성 위주의 영화들이지 않나. 보편의 기준을 전부 남성에 맞추는 게 영화 시장의 질 저하를 가져오는 것 같다. 여성 관객의 수요와 감성에 맞는 영화에 주목할 때 여성영화도 만들어질 것이고, 여성감독과 여성 스탭들도 설 자리가 생길 것이다.
곽소진_ 나는 우리가 쉽게 피곤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근에 조라 닐 허스턴 작가의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를 읽고 있는데, 당시 시대배경인 1891년도 흑인 여성이 하는 말과 2017년의 우리가 하는 말이 별반 다르지 않다. 당장은 골이 들어가지 않는데도 계속 서로 패스하면서 공을 던져야한다. 우리가 계속 공을 던질 수 있게 하는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그게 필드에서 해줄 역할이다. 우리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학생이고, 덜 정형화된 인력으로서 현장에 투입됐을 때 불러올 수 있는 변화가 있을 거다. 우리는 그런 일을 할 테니까, 필드에선 전담 기구와 시스템을 확실히 만들어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