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술집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일은 생맥주 따르는 법이었다. 천직을 만난 것이다. 내세울 거라고는 술 마시는 재주뿐이어서 밤마다 수십번씩 잔을 채우며 숱한 날을 보낸 나는 신이 났다. 그렇게 헛되이 보낸 세월이 헛되지 않았어! 그러다가 오전 수업을 몽땅 빼먹는 바람에 4년제 대학을 5년 다닐 위기에 처하긴 했지만!(그리고 나중에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위기인 줄로만 믿었던 그 예감은 현실이 된다… 하아.)
나는 처음 맡은 2000㏄ 피처를 거품 한점 없이 채우는 기적을 이루었다. 아아, 신은 나에게 단 하나의 재능을 하사하셨구나. 나는 처음으로 이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사장의 낯빚이 어두웠다.
“정원아, 이 생맥주 한통에서 몇잔의 생맥주가 나오는 줄 아니?” 글쎄요, 네 자릿수 나눗셈은 좀 버거워서. “그건… 네가 담는 거품의 양에 달려 있단다. 500㏄ 잔에 1/10만 거품을 더 담으면 10잔을 따를 때마다 한잔의 생맥주가 추가로 나오는 거야. 그럼 잔당 이익은 ***원에서 &&&원으로 상승하고, 통당 **잔의 생맥주가 더 나온다고 치면 그 순간 이익은 다시 ^&^%%$#$@#….” 저기 오빠, 나 문과, 국사학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한자로 한번 읊어볼래요? 어차피 못 알아듣겠지만.
우리 사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은행에 다니다가 틀에 박힌 생활이 싫다면서 때려치우고 나온 사람으로서 그 자유로운 영혼을 과시하듯 술집 이름을 ‘파라오’로 정하고 (왜지?) 내부를 분홍색으로 (도대체 왜?) 도배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일하던 술집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하다기보다는 좋게 말해 제멋대로, 제대로 말하자면 오리무중인 편이었다.
그처럼 핑크빛 카오스에 빠진 술집 주인으로서 그가 제대로 하는 단 한 가지는 장부 계산뿐이었다. 하지만 기록할 돈이 들어와야 장부도 의미가 있는 법. 주방 이모가 퇴근한 심야 시간이면 냉동 감자 튀기는 법도 모르는 사장이 않아 농구공처럼 뭉친 감자튀김을 내놓는(10년쯤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냉동식품을 튀기는 기름 온도가 너무 높으면 그런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술집에 손님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술집을 차릴 수 있었을까, 건물주가 아빠였다. 그래, 아빠라고 하면 역시 부자 아빠, 드라마 <도깨비>식으로 말하자면 (건물)주님. 아빠가 그 정도 되니까 팝콘 기계 청소하기 귀찮다고 기본 안주로 마른오징어를 내놓는 무모한 짓을 일삼는 거야. 결국 철모르는 건물주 아들은 2년도 되지 않아 술집을 말아먹고 그 자리에 PC방을 차렸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는 못했다는 후문이다.
월세를 반만 내는 술집을 그처럼 신속하게 말아먹으려면 장사를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해야 하는 걸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은 나도 그냥 가지 않는 게 최선이니 자영업자의 지옥이라는 이 시대에 되새겨보지 않을 수 없는 술집 주인의 도(道)가 거기 있었다.
엉망진창인 술집 주인으로 말하자면 <북촌방향>의 김보경을 지나칠 수 없다. 아마도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많은 술집 주인이 등장할 홍상수의 영화 중에서도 독보적인 방만함을 자랑하는 김보경은 손님이 오든지 말든지 이틀 연속 술집을 비우는 패기의 자영업자다. 맥주 병당 이익이 ***원이라고 치면 하룻밤에 손님 한명이 맥주 한병만 몰래 마셔도 손님 한명당 이익이 $$$원 하락하여 그러니까, 음… 아, 모르겠다. 장부라도 제대로 계산하는 게 대단한 거였구나.
어쨌든 그 집은 날마다 오는 손님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북촌방향>의 김보경이 방만함의 상징이라면 <좋아해줘>의 술집 주인 성찬(김주혁)은 속 편함의 화신이다. 상영시간 120분짜리 영화에서 주·조연 외에 손님이라고는 두세팀이 고작인데, 집주인도 돈이 없어서 전세로 내놓은 새 아파트에 들어가고, 술집 영업시간일 텐데도 집에서 최지우랑 논다. 집에 최지우가 있다면 나라도 장사 접고 들어가서 도매 떼는 술집 주인 주제에 비싼 편의점 캔맥주 사다가 최지우랑 술 마시고 싶겠지만.
그렇다면 안 되는 술집이 아니라 잘되는 술집의 비결은 무엇일까, 독창성이다. 나이 40에 13살 어린 단골 술집 바텐더와 결혼한 초능력자 지인의 말에 따르면 무릇 술집이란 손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곳이어야 한다고 한다. 자기도 그래서 아내에게 반했다고. 저기, 몇년째 댁의 수다를 참아주고 있는 나는 왜? 됐어, 이유는 말하지 마, 나도 알아.
하지만 설계 실수로 인해 폭 1m, 길이 5m가량의 기묘한 구조를 갖추는 바람에 테이블이 없어 싫어도 바에 앉을 수밖에 없는 우리 오피스텔 1층 술집은 그 반대 전략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니까 사장이 수다쟁이다. 바의 시작, 바의 끝, 바의 중간, 그 모두에 앉아봤지만 사장의 수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바텐더로 위장한 <타임 패러독스>의 에단 호크는 영화 상영시간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시간을 손님 수다 들어주면서 보내던데, 나는 어찌하여 손님으로 위장하고 바텐더 노릇을 하고 있는가. 심지어 술도 병맥주밖에 안 팔아서 내 손으로 따라 마신다고, 안주도 과자랑 과일밖에 없어, 내가 육포라도 사다놓으면 안 되냐고 그렇게 징징대는데.
그런데도 나는 그 술집에 가고 있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술만 마시면 돼. 그곳은 술집에선 술이나 마시면 된다는, 원초적인 존재의 이유로 돌아간 술집이다. 가끔은 그런 게 필요하다. ‘멀티’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 영역이 없는 이 시대에서 나는 잠깐이라도 한 가지 일만 하고 싶다. 아쉬운 점은 있다. 생맥주가 없다는 것. 신이 내려주신 내 단 하나의 재능을 썩힌 지 어언 20년이다.
취하면 다들 헐크가 되지
소중한 술집을 말아먹지 않기 위해 술집 주인이 취해야 하는 두세 가지 자세
과감한 포기
분홍색 파라오에서 일하던 어느 밤, 손님이 동태찌개를 다시 끓여달라고 했다. “이거 너무 비린데요, 제가 이상한 거예요?” 아니요, 정말 이상한 건 여기서 일한 지 반년이 넘도록 안주에 대해 불평한 사람이 손님뿐이라는 사실이지요. 다들 이걸 어떻게 먹는 거지. 역시 홍상수 영화인 <우리 선희>의 술집 주인 예지원은 손님이 오면 자꾸 치킨을 시킨다. 그래, 그게 현명한 거야. 나도 단골 술집 사장 언니가 짜장 돈가스를 시킨다기에 그런 걸 어떻게 먹나 싶었는데 그 집 안주보다는 낫겠지 싶어 참고 먹었다가… 사랑에 빠졌습니다.
과감한 잔상
<타임 패러독스>의 에단 호크는 농담 한마디 해보라는 손님의 진상에 차마 들어줄 수 없는 농담을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겠다. 이처럼 되로 받으면 말로 줘야 하는 법, 두 테이블에 안주 하나 시키고 서비스 달라는 진상 손님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응했다, 오빠, 감자 하나만 튀겨주세요. 어디, 먹을 테면 먹어보라고.
과감한 폭력
<가루지기>의 주모 전수경은 술집에서 진상 부리는 손님에게 뭔지 모를 대형 작대기를 들고 달려든다. 이것이야말로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내가 일하던 술집에서 싸움이 났다. 일단 한명이 소파를 들었다. 그래, 취하면 다들 헐크가 되지, 히어로 최고의 변신 무기는 방사능이 아니라 알코올. 두명이 한명한테 휘둘리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는 나의 부추김에 또 하나의 소파가 공중 부양했고 결국 그들은 비좁은 공간을 참지 못해 밖으로 나가 제대로 붙었다. 안녕, 덕분에 우리 소파는 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