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하다. 지난해 최고의 영화를 꼽으래도 사흘 밤낮 머리만 부여잡다 쓰러질 내게 인생의 영화 한편을 소개하라니. 게다가 나라는 인간은, 이 영화는 이래서 좋고, 저 영화는 저래서 좋고, 그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래서 좋아할 운명을 타고났는데. 오래전 절친한 친구 한명은, 마치 심각한 문제라도 발견한 듯 내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단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각각 호불호(好不好)라는 게 있잖아? 그런데 너는 호호호(好好好)가 있는 것 같아. 정말 좋아하거나, 그냥 좋아하거나, 그래도 좋아하거나.”
좋아하는 게 많은 나는, 그중에서도 영화를 제일 좋아하고, 그래서 좋아하는 영화가 참 많다. 아니,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영화가 실제로 내 인생을 참 많이 흔들었고, 바꾸었고, 때론 소박하게나마 구원하기도 했다. 누구라도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E.T.>(1982) 같은 대작들부터 나 혼자 은밀히 기억하고 있는 듯한 <박하향 소다수>(1977) 같은 작은 영화들까지. 늘 애정을 고백하고야 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님의 모든 영화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렇게 내 인생영화 리스트는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새해가 되니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다. 언젠가부터 매년 1월1일이 되면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보는 영화인데, 바로 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1959)다. 영화는 “오하요!”라고 아침 인사를 건네는 듯한 밝고 경쾌한 음악으로 시작한다. 오프닝 타이틀이 지나면 큰 송전탑을 가운데 둔 작은 주택단지가 나오고, 나란히 늘어선 비슷한 가옥들 사이로 부지런히 등교하는 학생들, 시장에 가거나 출근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어 푸른 하늘 아래 높이 솟은 둑 위로, 네명의 아이들이 즐겁게 노래하며 걸어간다. 중학생 형 미노루와 두 친구들, 그리고 초등학생 동생 이사무가 바로 그들이다. 등교하던 아이들은 문득 멈춰 서서 누가 더 방귀를 잘 뀌나 시합을 하는데, 한 친구는 그만 힘 조절에 실패하는 불상사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만다. 영화가 시작한 지 5분도 안 되는 그 순간, 나는 마음을 온전히 빼앗겨버렸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풍경 속, 이렇게 유치하고 실없는 아이들의 장난으로 활짝 힘차게 문을 여는 영화라니. 그처럼 단순한 즐거움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시작하는 영화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 영화 전체가 그런 매일매일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직조되어 있다. 미노루와 이사무 형제는 TV를 사달라고 부모를 조르다 침묵시위를 감행하고, 이는 곧 부녀회비 분실사건으로 소란을 치른 엄마와 부녀회장 사이에 또 다른 오해를 불러온다. 아파트에 사는 영어과외 선생과 늘 번역을 부탁하러 오는 고모는 서로 미묘한 호감을 갖고 있는데, 형제가 일으킨 소동 덕분에 한뼘 가까워진다. 각각의 이야기는 다 별개의 것 같지만 사실은 긴밀히 관계를 맺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렇게 사소한 일상의 순간들이 모인 총합이 결국 우리 인생이라고, 그러니까 모두가 모두에게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아니, 사실 이런저런 해석을 떠나 그저 매 순간 모든 장면에서 귀엽고, 웃기고, 아름다운 요소들을 즉각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영화다.
이번 새해엔 무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는 행운을 얻었다.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이 동시에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광경을 목격하며, 마치 내가 감독이라도 된 듯 뿌듯함마저 느꼈다. 행복해졌다. 가만. 그나저나 나는 언제 이렇게 오롯이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영화를 만들 수 있으려나. 힘들게 고통받는 아이들 이야기 말고…. 휴, 오래 살아야지. 새해 첫 영화가 내게 준 교훈이다.
윤가은 영화감독. <사루비아의 맛>(2009), <손님>(2011), <콩나물>(2013) 등의 단편으로 주목받은 뒤 장편 데뷔작 <우리들>(2016)로 청룡영화상, 부일영화상 등 국내 영화제의 거의 모든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