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 드 프랑스’는 자전거 라이더들에게 그야말로 월드컵과 같은 경기다. 세계 각지의 내로라하는 자전거 선수들이 모여드는 축제이자, 알프스와 피레네산맥이 포함된 3500km를 21일 만에 완주하는, 극한의 코스를 보유한 레이스이기도 하다. <뚜르: 내 생애 최고의 49일>(이하 <뚜르>)은 그런 투르 드 프랑스의 코스를 최초로 완주한 청년, 이윤혁씨 이야기다(자세한 내용은 46쪽 프리뷰 참조). 전세계에서 오직 200여명이 앓고 있다는, ‘결체조작작은원형세포암’에 걸린 그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프랑스로 자전거 투어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다큐멘터리 제작부터 개봉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이 작품의 감독은 무려 네명(전일우, 임정하, 박형준, 김양래)이다. 이들 중 윤혁씨의 프랑스 투어를 카메라에 담은 전일우 감독과 영화의 편집을 도맡은 임정하 감독을 만나 제작과정에 대해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처음 이윤혁씨를 알게 된 계기는.
=전일우_ 2009년에 자전거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던 도중 윤혁이를 알게 됐다. 윤혁이가 암 투병 도중 투르 드 프랑스에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기획서를 만들어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후원인을 찾기가 쉽지 않을 때였다. 회사 입장에서는 희귀암 말기라는데 자전거 투어 도중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사람에게 후원을 해주기 어렵다고 했다더라. 다행히 당시에 나와 같은 프로덕션에서 일하던 김민정 PD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을 맡았던 이정훈 회장을 알고 있었고, 그분이 후원을 승낙하며 이 영화가 시작됐다. 그전까지 하도 많은 거절을 당해서 윤혁이는 출발하는 순간까지 우리가 프랑스에 갈 거란 걸 믿지 못했다.
=임정하_ 나는 한참 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뚜르>의 또 다른 공동 연출자인 박형준 감독과 사극 액션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는데(임정하 감독은 <음란서생>(2006), <추격자>(2007) 등의 작품에 참여한 프로듀서 출신이다),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영화로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거다. 처음에는 <병원24시>류의 투병영화를 만들어달라는 제안이면 거절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촬영분을 봤는데 기획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이 많았다. 특히 겉으로 보아서는 전혀 아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씩씩하고 밝은 20대 암 투병 환자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쉽지 않은 작업이 될 것 같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이 작품을 연출하기로 한 건 윤혁씨의 캐릭터가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윤혁씨의 프랑스 투어를 조명하는 과정에서도 암 투병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가 없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건강한 청년의 자전거 투어를 다룬 영화라 짐작할 것 같다. 의도적인 편집 방향이었나.
임정하_ 나는 윤혁씨가 프랑스에 도착해서 자전거로 개선문까지 향하는 과정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봤다. 그가 어떻게 꿈을 향해 달려가는지, 달리는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그런데 윤혁씨가 암 선고를 처음 받고 프랑스로 가기까지 고군분투했던 과정과 프랑스에서 자전거를 타며 주변 인물들과 심리적 갈등을 겪는 과정이 놀랍도록 닮아 있더라. 출발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최대한 줄이고, 빨리 프랑스 촬영분으로 넘어가 본게임을 충분히 보여주자는 게 컨셉이었다.
-투어를 떠나기 전 윤혁씨가 특별히 부탁한 것이 있었다면.
전일우_ 딱 한 가지 부탁이 있었다. 이래라저래라 요구하면 안 찍겠다는 거였다. 윤혁이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담아주길 원했다.
임정하_ 현장에서 ‘연출’을 하지 말아달라는 원칙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던 것 같다. 전일우 감독 이전에 접촉했던 촬영팀에서는 자전거 저지가 아닌 허름한 옷을 입고, 자전거도 로드가 아닌 철제 자전거를 타면 어떻겠냐고 했다더라. 극적인 장면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내레이션을 배제하고 인물들의 대화로 영화를 구성한 데 나름의 이유가 있나.
임정하_ 전일우 감독이 윤혁씨와 인터뷰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 내레이션으로 사용할 소스들은 충분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스들을 쓰지 않은 건 누군가의 내레이션이 들어오면 윤혁씨의 목소리와 충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많이 들어갈수록 영화가 설명적이고 서정성이 생긴다. 불필요한 감정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윤혁씨가 프랑스의 고된 업힐을 자전거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손담비의 <미쳤어>가 흐른다. 이 장면의 리듬감이 재미있다.
임정하_ 프랑스 투어 때 윤혁씨가 가장 많이 들은 노래가 손담비의 <미쳤어>와 조PD의 <친구여>라고 들었다. 이 노래가 한편으로는 윤혁씨가 당시 처해 있던 상황과도 닮아 있다고 여겨졌다. 투어를 어느 정도 진행하다보니 자전거를 타고 산을 오른다는 데 약간은 대담해진 측면도 있었고, 그 이전까지의 ‘자글자글’한 사건들, 그러니까 자전거가 부서지고, 숙소 때문에 싸우고, 넘어져서 다치는 그런 일들을 어느 정도 봉합하는 몽타주 시퀀스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런 시퀀스에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고 생각한다.
-한편 한밤중에 윤혁씨가 알프스를 오르는 과정에서 부모님을 떠올리며 흐느끼는 장면은 조악하게 촬영되었지만 울림이 있다.
전일우_ 윤혁이는 정말 멘털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강하냐면 자기 몸에 삽입한 관에 직접 주사를 놓을 정도다. 평소에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는 성격인데 그날따라 현지 코디네이터였던 영석이와 얘기를 나누다가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더라. 윤혁이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본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다.
임정하_ 그 이전까지 투어 동료들과 나눈 대화를 보면 대부분이 운동 이야기였다. 칼로리를 어느 정도 소비했고, 단백질은 어떻게 보충했는지 하는 이야기들. 그러다가 알프스에서 비로소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관계로 발전되었다는 것이 내게는 중요해 보였다. 투어 내내 죽음에 의연해 보였지만 ‘살고 싶다’는 말을 꺼내고, 미래에 대해 기약을 할 수 없으면서도 ‘한국에 가면 남산에 가서 고기를 구워먹자’는 말을 하며 키득거릴 수 있는 관계. 이들에게 어느 순간 ‘전우애’와 비슷한 감정이 생겨났던 것 같다.
-<뚜르>가 각자에게 남긴 것이 있다면.
전일우_ 윤혁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촬영을 했다. 사실 그가 세상을 떠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프랑스 다녀와서도 한동안 건강했는데 3개월간 병세가 악화되더니 그리되었다. 아들 같은 친구를 잃었다는 생각에 1년간 일을 쉬기도 했다. 지금은 그를 알았던 게 내 인생의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임정하_ <뚜르>를 연출하기 전까지 영화 편집을 해본 적도 없었다. 임기응변으로 배워 49차본까지 편집했다. 3년 반 정도 걸렸나. 모두가 이제는 놓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놓지 못했던 이유는 내가 영상 속 윤혁씨를 보며 사랑에 빠졌기 때문일 거다. 윤혁씨가 살아 있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 이후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그게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핸디캡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건 윤혁씨 한 사람을 기념하고자 하는 전기영화가 아니고 좌절에 빠진 모든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 생각한다. 나 역시 윤혁씨와 비슷한 좌절의 감정을 경험해봤기 때문에 그의 삶에 깊이 몰입하며 내 얘기처럼 느꼈던 것 같다. 아마 윤혁씨가 이 영화의 연출을 맡았어도 그랬을 거다. 업힐을 오르던 때처럼, 조금만 더 해보자, 조금만 더 가자,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