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림 감독은 <더 킹>의 검사 태수(조인성)의 이름을 오래전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격동의 80년대 정치판에 뛰어든 조직폭력배 태수(최민수)에서 따왔다. <더 킹>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된 후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는 1%의 권력을 가진 검찰로 온갖 이권을 누리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태수를, 그의 하수인인 조직폭력배 두일(류준열)과 같은 인물이라고 봤다. ‘한강의 기적’과 같은 한강식(정우성)을 좇지만 결국 그 욕망은 독이 되어 그를 파멸로 이끈다. 민주주의라는 명분에 숨어, 되레 조작과 은폐를 일삼는 ‘가짜 왕’ 속성은 무엇일까. 한재림 감독은 <더 킹>에 대해 그들 한가운데로 들어가 그들을 셀프 조롱하는, 의외로 한 편의 블랙코미디라고 말한다.
-블랙코미디의 재미를 맛보기엔 지난해 2월 크랭크인 후 영화를 만드는 그사이 대한민국의 현실이 더 블랙코미디가 되었다.
=시나리오를 한달 만에 썼다. 준비하던 무협영화가 하도 안 풀려서 이 이야기를 썼는데, 금방 써지더라. (투자사가 바뀌었는데) 이전 투자사에서는 그래도 무협영화를 했으면 하더라. 흥행과도 관련 있고, 뭣보다 지금 시국과 달라서 좀 눈치를 보는 위험한 상황이기도 했다. 다루는 소재가 세니까 독보적인 캐스팅을 해보자, 그러면 좀 제작이 수월하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고등학생부터 30대까지를 다 할 수 있는 배우를 찾다가 (조)인성씨를 생각했다. 몇년 만의 복귀작인데 인 성씨가 이렇게 위험한 걸 할까. 안 할 것 같더라. 그래도 한번 만나봤다. 복귀, 전략 이런 계산 없이 순수하게 재밌겠다라는 마음 하나로 선뜻 하겠다고 하더라. 현장에 잘 융화하고 유연한 배우더라. 잘생긴 배우에 대한 위화감, 선입견이 있었는데 같이 작업하면서 그게 깨졌다. (웃음)
-자료화면으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당시 미소 짓는 박근혜(당시 한나라당 대표) 대통령의 영상이 보인다. 이 끝을 보려고 빠르게 달려왔나 싶어지는 지점이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진정 충격이었다. 이 영화는 거기서 시작됐다. 그날 잠이 안 와서 소파에 누워 있다가 뉴스를 봤다. 눈물이 나더라. 비극이고 굴욕이었다. 한동안 정치에 관심을 끊었다. 내가 느낀 것처럼 많은 사람에게 그 사실이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이야기의 끝은 거기구나. 그걸 이야기해야겠다 싶었다. NEW라는 투자·배급사가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 어쩌면 당연하게 이런 문제에 덤빌 수 있다. 그런데 투자사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그게 감독님의 최종 생각이십니까?’라는 질문이 전부였다. 그 이후 내 선택에 별말 안 하더라.
-정권의 부침에 기생하며 부와 권력을 누리는 부패한 검찰 조직, ‘전략 1부’라는 가상의 공간이 등장한다.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자 사건을 묵히고 이용하는 검찰의 모습이 디테일하게 묘사된다.
=개인적으로 경계했던 것은 <연애의 목적>(2005) 때 교사를 그릴 때도 그랬지만 정말 오해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영화에서 검사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건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로 인해 검사들이 오해받지 않았으면 했다. 영화 속 인물들이 1%의 정치범이라는 걸 특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고증을 실제 검찰과 다르게 했다. 60년대~70년대처럼 클래식하고 올드한 분위기로 스타일을 잡았다.
-<관상>의 수양대군으로 이정재를 캐스팅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캐스팅 역시 시도와 모험의 성격이 강하다. 이 역할에 특화된 연상되는 배우들을 일부러 배제했다. 비주얼적인 강렬함의 측면에서 연출자의 의도가 정확히 부합했다면 어느 장면에서는 그 선택으로 인해 조금 아쉬운 지점도 보였다. 취하고 싶은 부분이 확실히 보이는 캐스팅이었다.
=김의성 선배가 <관상>에 출연하고 나서 연기에 대한 호평을 듣고는 “한재림이 캐스팅하고 내가 거기 서니까 된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다”고 하셨다. 그 말이 와닿더라. 그렇게 캐릭터는 연기와 몽타주, 음악과 편집이 합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하나(가령 연기)가 너무 끌고 가버리면 영화의 스타일이 죽을 거 같더라. 내겐 배우가 가진 스타의 이미지도 필요했다. 이들이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보여줄 수 있는 포스를 관객이 배우의 스타성과 연계해서 받아들이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뭣보다 안전한 캐스팅은 피하자, 최대한 신선한 느낌을 주자고 생각했다. 어느 부분은 겁나기도 했지만 내 스타일을 돌아보면 배우한테 맞추는 편이다. 배우의 장단점을 따져 현장에서 그걸 최대한 반영해 나간다.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디렉팅해본다. 정답이 우는 거라면 반대로 웃어보자든지. 그러면 예기치 않았던 다른 반응이 도출된다. 편집 때도 포커스나 장면보다 배우의 연기를 선택의 제1원칙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모자랐다면 그건 전적으로 감독 탓이라고 생각한다. 배우의 장점을 활용해야 하는데 내가 욕심을 부린 장면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아깝지 않다.
-134분의 모든 장면이 하이라이트로 구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하나의 사건을 조명하는 것이 아닌, 모든 사건을 망라해야 한다. 104회의 촬영과 더불어 편집 과정까지 고충이 컸을테다. 뭣보다 자칫 이 연속적인 흐름으로 인해 극의 재미를 놓칠 우려가 컸다.
=임필성 감독이 크랭크업 이후 1차 A편집본을 보고 한마디 하더라. “너 미친놈 아니냐.” 이렇게 짧은 시간에 후반작업을 할 영화가 아니라는 거다. 하도 힘들어 나도 ‘내가 이걸 왜 했지. 미쳤지’ 생각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관객 평가에 앞서 시나리오를 좋게 평가해주신 분들이 많았고, 그래서 그만 거기 취해 밀어붙인 것 같다. 5개월 촬영기간 동안 예산상 100회 정도 촬영을 해야 하는데 270회 분량이 나왔다. 콘티대로 해야지, 거기서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분량을 소화할 수 없는 상황인데, 또 하다보면 다들 욕심이 더 생기지 않나. 스탭, 배우들이 얼마나 힘들었겠나. 편집 때도 기사님이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감독님과 대화가 많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마침 편집실이 <마스터> 작업으로 바쁠 때였다. 사무실에 컴퓨터 가져다주고 두달간 주말 없이 혼자 편집했다. A편집본이 5시간이라는 소문이 났던데 그건 아니고, 2시간40분 정도 나왔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참사와 전두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의 자료화면이 주인공 태수의 흥망성쇠를 나타내는 지표로 작용한다. 자료화면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분량과 중요도가 컸다. 편집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도 그만큼 컸을 것 같다.
=시나리오에는 한줄이었던 자료화면 영상이 막상 작업하려니 엄청나더라. MBC, KBS, YTN에서 구하려면 보통 60초에 500만원에 달했다. 그러니 필요한 영상이 있으면 비슷하지만 좀더 낮은 판권료를 지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요령 없이 시간과 노동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탄핵 장면은 신민경 편집감독이 많이 찾았다. 현대사에서 강렬하게 우리에게 작용한 장면들을 바탕으로, 태수의 굴곡과 이 시대상이 관객에게 담담한 비극처럼 쌓여 나가게 하려 했다. 정말 수많은 편집을 했다.
-편집 과정 중 최순실 국정 농단, 박근혜 탄핵 등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자료화면의 선택이나 편집에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한편의 정치 다큐멘터리로 흘러간다.
=편집하고 다큐멘터리 영상도 어느 정도 찾았을 때 국정 농단 사건이 터졌다. 혼란스럽더라. 이런 시국이 아니라면 이건 분명 용감한 시도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정국을 이용했다 욕먹지 않을까. 거부감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되더라. 초심을 돌아봤다. 내가 지금 상황에 따라 편집을 바꾸기보다 이 이야기를 애초에 하려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고, 의성 선배나 우성 선배, 인성씨와도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우리 모두 이 영화가 권력과 욕망, 선택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성공만 목표로 훅 하고 지나갔다. 저 멀리 친일이건 삼풍이나 성수대교 참사건 차분하게 돌아보지 않은 채 여기까지 왔다. 그런 것에 대한 답답함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 의도를 잃지 말자 생각했다.
-권력을 밑에서 바라보지 않고, 권력의 정점에 선 1%의 비리 검사 태수를 통해 권력의 핵을 파헤치는 구조다. <갱스 오브 뉴욕>(2002)이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마틴 스코시즈의 영향이 엿보인다.
=마틴 스코시즈의 영향은 지대하다. 워낙 좋아하는 감독이다. 다큐멘터리 터치, 내레이션 화법의 구성은 한국에서는 새로운 시도일 수도 있는데 최근 해외에서는 워낙 많이 볼 수 있다. 멀리 보면 폴 토머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1997)도 있고, 최근엔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의 일대기를 그린 넷플릭스의 <나르코스>도 그렇고 1970년 미국 록음악을 배경으로 음반사 사장 리치 피네스트라를 그린 <HBO>의 <바이닐: 응답하라 로큰롤> 등에서 본 것처럼 관객이 잘 모르는 세계로 들어가서 끝까지 가보는 것에 대한 매력이 있다. 실제 자료화면도 들어가면서 한 인물에게 동화된 채 관객을 이입시켜 따라가게 하고, 그걸 배신하고 이런 흐름을 통해 주제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관상> 때만 해도 관객에게 스토리 전달을 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재밌겠다, 시도해보자 하고 좀더 편하게 접근했다. 내레이션이 주는 설명적이고 직접적 표현은 인물들의 탐욕을 상징하는 육류, 샴페인 등의 인서트컷 등으로 상쇄시켜나갔다.
-연상되는 사건이나 인물을 짚어보게 만든다.
=고마운 질문인데 진짜 없었다. 시사 후 그런 이야기가 있어서 그만큼 리얼하게 받아들여지는구나 긍정적으로 느꼈다. 한 6개월을 검사, 주변 법조인, 변호사들 만나고 정치부 출입 기자, 검찰 관련 서적을 봤다. 그렇게 조사한 자료들을 모아서 시나리오를 써내려갔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검사가 샐러리맨 생활을 하고 업무로 고생하고 있다. 아는 검사에게, ‘만약 선배가 전화해서 뭐 좀 덮어달라고 하면 덮을래’ 하고 물었더니 ‘그런 선배도 없고, 그렇게 한다면 아마 이 업계에서 안 좋게 찍힐 거’라고 하더라. 질문을 바꿔서, ‘무릎 꿇고 해달라고 하면, 돈이 얽혀 있다면’이라고 한다면 영화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봤다.
-권력을 맛본 후 태수의 시선이 가지는 균형이 중요하다. 같은 범죄자인 태수에게 자칫 함께 비리를 저지른 이들을 비판하는 역할을 부여해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태수가 욕망을 탐하지만 이후 그것으로 인한 비극은 커져야 했다. 매 순간 작은 선택들이 모여 악이 될 수 있다. 그들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서할 수는 없는 거다. 분명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한 거다. 분노와 감정적 호소에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단죄를 내리자면 이 사람들을 먼저 알아보고 이해해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들이 권력에 취해가는 메커니즘을 알면 우리가 대처할 방안도 생길 거라고 본다.
-개봉을 바로 앞두고 있다.
=지금 와서 이 영화가 시국을 탈 뿐이다. 배우들한테 ‘나 잡혀들어가면 1인 시위 해줄거지?’ 이런 농담을 했지만, 걱정은 없었다. 촬영하는 내내 찍어야 할 분량이 워낙 방대한 탓에 바빠 스탭들과 트러블을 가질 시간도 없었다. 김우형 촬영감독님은 촬영 한달 전에 뒤늦게 합류했는데도, 다 이해해주시고 매번 촬영 중간에 더 좋은 아이디어를 주셨다. <관상> 때 카메라 2대로 찍은 경험이 있는데 이번엔 1대였다. 그럼에도 촬영 소스가 많아서 디테일한 부분들 중 편집한 컷도 많다. 후반작업을 어떻게 할지 생각도 못하는 사이 정신없이 여기까지 달려왔다. 개봉을 앞두고 나니 지금은 그냥 마당놀이한 것처럼 한바탕 털어놓고 온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