팰린드롬(Palindrome)은 회문, 즉 앞에서 읽으나 뒤에서 읽으나 같은 단어나 어구를 뜻하는 말이다. 예를 들면 리효리, 오디오, 기러기 같은 단어가 있겠고 ‘여보 안경 안 보여’, ‘소주 만병만 주소’ 같은 문장도 있다.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1995)를 연출한 토드 솔론즈의 2004년작 <팰린드롬>의 주인공은 아비바(Aviva)라는 이름의 소녀이고, 그 역시 앞뒤로 읽어도 똑같은 팰린드롬식 이름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아비바 역은 완전히 다른 8명의 배우가 연기하는데, 이 때문에 처음 영화를 볼 때 주인공 아비바에게 몰입이 잘 되지 않았다. 백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비바의 첫 번째 모습은 흑인 소녀였는데(거기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혼란스럽고…) 이내 짙은 갈색 머리의 통통한 백인 소녀로 바뀌었다가, 빨간 머리의 교정기를 낀 마른 백인 소녀-통통한 금발의 백인 소녀-갈색 단발과 보통 체격의 백인 소녀-긴 머리의 엄청난 과체중 흑인 소녀-검은 파마 머리의 백인 소녀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발의 마른 여성으로, 정말 엄청나게 바뀐다. 아비바의 이 엄청난 외형 변화는 영화의 스토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전혀 바뀌지 않는) 주변 인물 중 누구도 그녀의 이런 변화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오직 관객인 나만 이 엄청난 변화를 오롯이 감당해야 하고, 9개의 챕터로 나뉜 영화에서 챕터가 바뀔 때마다 다음엔 어떤 아비바가 나올지 혼자 설렘/기대/걱정을 하고 있다. 이 영화는 단지 ‘아이를 갖고 싶어서’ 섹스를 하기 시작한 아비바의 섹스 여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겨우 10대 초반에 불과한 아비바가 정말 아무 남자와 섹스를 하는 모습을 영화 내내 지켜보게 되는데, 스토리 자체도 충격이지만 더욱 충격이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아비바의 외형이 바뀔 때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진짜 아비바’를 찾고 있다는 거였다. 아무 남자랑 섹스를 할 수 있을 법한 아비바란 역시 뚱뚱하지 않겠지, 역시 백인이겠지, 역시 얘겠지, 역시 얘는 아니겠지 하며 나도 모르게 판단을 하고 있는 거였다. 이런 끔찍한 이야기에 어울릴 법한 여자아이의 이미지를 찾고 있는 나에게 엄청난 경멸을 느꼈고, 그 때문에 이 영화는 내게 엄청난 반성을 하게 만들어준 아주 특별한 영화가 되었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있으면서 나는 어느새 사람보다 이야기를 우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고,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가 있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 기본적인 걸 다시 떠올려야 하다니 정말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섹스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비바를 환영하는 파티에서 사촌 마크가 아비바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누구도 변하지 않아, 자기들은 그런 줄 알지만 아니야. 살 좀 빼고 얼굴을 바꾸고 태닝을 하고 가슴 성형을 하고 심지어 성별을 바꿔도 변하지 않아. 너는 언제나 똑같아.”
나는 극적으로 바뀌는 아비바의 외형을 판단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아비바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어야 한다. 그것이 아주 끔찍한 이야기일지라도 말이다.
이랑 앨범 《신의 놀이》 《욘욘슨》을 낸 뮤지션. 영화 <유도리> <변해야 한다> 등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