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홍수정의 영화비평] <사랑의 시대>와 공동체의 불영속성
2017-02-16
글 : 홍수정 (영화평론가)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사랑의 시대>(2016)는 그의 전작들과의 연속성 밖에서 논할 수 없는 영화다. 그는 첫 장편영화 <셀레브레이션>(1998)과 <더 헌트>(2012)에 이어 다시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 앞에 가져다놓았다. 에릭(울리히 톰센)이 상속받은 대저택에 함께 살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공동체가 형성된다. 곧이어 이 공동체는 에릭의 연인 엠마(헬렌 레인가드 뉴먼)의 합류로 변화를 맞는다. 에릭의 외도와 엠마의 등장이 유쾌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영화에서 변화의 시작은 항상 불쾌한 해프닝이다. 일대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집단 안에서 지속되는 긴장과, 꿈틀거리며 변화를 수용하는 공동체를 보여주는 것은 빈터베르그 영화의 특징이다. <사랑의 시대>에서도 공동체의 일원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엠마를 결국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 수용의 과정은 어딘가 의심스럽다. 그들은 왜 엠마를 받아들였을까. 엠마가 불편한 존재라는 것은 그들 스스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를 먼저 제안한 안나(트린 디어홈)다. 안나는 이것이 에릭의 권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녀가 에릭의 권리를 언급하는 순간은 늘 미묘하다. 둘의 과거를 회상하는 안나 앞에서 에릭이 엠마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자 안나는 함께 공동체에서 살 것을 제안한다. 엠마와 처음 대면할 때도 그녀는 정성껏 꾸미고 있다. 또 안나는 자신과 다르게 갈색인 엠마의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고서, 에릭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따를 권리가 있다고 한다. 이때 안나의 감정이 미련, 질투, 동경 중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가 에릭의 권리를 언급하는 순간마다 그녀는 에릭을 향한 개인적인 욕망에 휩싸여 있다는 것이다.

다른 구성원들의 경우도 유사하다. 처음 투표 당시 그들은 모두 엠마의 합류에 반대한다. 하지만 에릭이 저택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자 다들 슬그머니 엠마를 받아들인다. 알론은 에릭에게 “네가 대장”이라고까지 한다. 그들은 에릭의 주장을 존중하는 듯하지만 이때 엿보이는 것은 크고 멋진 저택에 계속 머물고 싶은 비밀스러운 욕망이다. 결국 영화에서 공동체가 불편한 변화를 수용하는 이유는 공동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아래 숨 쉬는 개인들의 욕망 때문이다. 이 욕망들은 입 밖으로 발화될 때에 “권리”, “대장”과 같은 공적인 언어로 치환되어 우리를 교란시킨다.

그리고 사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한번 공동체에 수용된 변화는 이 집단의 규범으로 격상된다. <더 헌트>에서 루카스(매즈 미켈슨)는 그의 결백이 드러난 뒤에도 계속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의 개인적 감정에서 시작된 루카스에 대한 거부가 어느새 이 마을의 규율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계기야 어찌됐든 엠마가 이 공동체에 편입된 순간부터 그녀와의 공생은 이 공동체의 규율로 그 위상을 인정받는다. 공동체를 만들었던 안나는 이제 모멸의 순간들을 견디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런 안나의 몸짓에 대한 것이다. 빈터베르그는 이번에도 공동체에 난입하는 변화와 그 변화로 인해 새로이 정립되는 규율, 그리고 그 규율 아래에 놓인 개인을 응시한다.

흔들리는 공동체와 떠나가는 사람들

흥미롭게도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공동체들은 계속해서 변모하고 있다. 공동체의 성격은 혈연관계(<셀레브레이션>)에서 작은 마을(<더 헌트>)을 거쳐 대안적인 공동체(<사랑의 시대>)로 눈에 띄게 느슨해졌다. <셀레브레이션>에서의 토머스와 같은 폭력적이고 과격한 공동체 수호자는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들도 예전과 다르다. <셀레브레이션>의 크리스찬은 아버지에 대항하여 승리하지만 <더 헌트>의 루카스는 마을에 위태롭게 남아 있을 뿐이고 <사랑의 시대>의 안나는 심지어 공동체를 떠난다. 공동체의 외연은 느슨해지고 개인의 감정은 더욱 요동친다. 빈터베르그의 첫 장편영화 <셀레브레이션>에서 아버지의 질서와 이별하고 자신들의 세상을 향하여 떠난 크리스찬과 그의 연인 피아를 열연한 배우들은 <사랑의 시대>에서 다시 만난다. 연인을 연기했던 그들이 이 영화에서 부부로 만나 결국 이별을 맞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지금 빈터베르그의 공동체는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 속에서 <사랑의 시대> 속 공동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특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불영속성이다. 영화는 적지 않은 장면에서 이 공동체의 계속적인 존립이 어려우리란 것을 암시한다. 어린아이 빌라스는 영화의 말미에 죽음을 맞이한다. 아이의 선천적인 질병과 예견된 죽음은 영화 내내 위태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이 영화에서 관찰자적 시선을 갖는 프레아 역시 공동체를 떠나 남자 친구의 집으로 향한다. 빌라스와 프레아는 이 집단의 유일한 아이들이다. 이들과의 이별로 이 집단이 오래 지속될 가능성은 다시 한번 희박해졌다.

공동체가 풍기는 불영속성의 정서는 이 작품이 다루는 감정들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방에서 에릭과 안나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곧이어 에릭이 변심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고 우울하다. 안나가 엠마를 바라보는 감정 역시 시시각각 변하고 배우 트린 디어홈은 그 순간의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하여 얼굴 위에 새긴다. 올레와 모나의 키스는 충동적으로 행해지고 이후 둘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프레아에게 호기심의 눈빛을 보내던 빌라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둔다. 이 짧은 영화 안에서 무수한 감정들이 생겨나며, 그것들은 한순간 반짝이고서 종말을 맞는다.

이 찬란하고 처연한 순간들을 이미지화하는 것은 태양빛을 만지는 안나의 손가락이다. 안나는 에릭과의 섹스 후 손가락 사이에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본다. 그 순간 눈부시게 부서지고 사라지는 햇빛, 그것은 안나에게 드리우는 사랑의 감정이다. 엠마의 존재를 알게 된 후 안나가 같은 동작으로 어루만지는 것은 태양이 아닌 조명의 빛이다. 그리고 얼마 뒤 안나는 뉴스를 하기 직전, 어둠만이 가득한 곳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완전히 무너져내린다.

<사랑의 시대>에서 안나는 빈터베르그의 영화 주인공들 중 이례적으로 공동체를 떠나간다. 이 결말은 공동체의 지속을 희생하고서라도 자유로이 변화하는 안나의 감정을 존중하려는 선택의 결과다. 이 영화는 집단의 공고한 존립을 위하여 감정을 박제하지 않는다. 대신 생겨나고 사라지는 감정의 자연스러운 불영속성을 조용히 긍정한다. 그 선택으로 감정과 공동체 모두 빌라스와 같은 시한부 삶을 살게 된다 하여도 말이다. 그런 시선으로 돌아볼 때 공동체 안에서 에릭의 감정을 존중하고자 했던 안나의 노력도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짙은 종말의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순간을 위해 다시 잔을 든다. 순간이면 사라지고 마는 태양빛을 무심히 만지던 안나처럼. 절대 영속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 빛은 아름답고, 이 영화가 품은 시선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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