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내게는 그런 장면들이 꽤 많다. 그 가운데 두 가지 장면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두 가지 장면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그것이 결국 하나의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장면은 모두 한명의 배우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평생에 걸쳐 마흔세번 죽었고, 얼마 전 마지막으로 다시 죽었다. 이 원고는 그에게 바치는 글이다.
첫 번째 장면. 데이비드 린치의 초기작 가운데 <엘리펀트맨>은 실존했던 존 메릭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기승전결이 꽤 뚜렷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린치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그답지 않은 영화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야기보다 이미지와 그것을 둘러싼 공기로 먼저 기억된다는 점에서 <엘리펀트맨> 또한 감독의 인장이 곳곳에 박혀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존 메릭은 다발성 신경섬유종이라는 희귀병을 앓았던 실존 인물이다. 그의 얼굴에는 거대한 섬유종이 달려 있었다. 이러한 기형 때문에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 섬유종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질식의 위험 탓에 제대로 누워 잘 수도 없었다. 평생 동안 말이다.
그의 별명은 코끼리 인간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코끼리 인간이라 부르면서 그에게 돌을 던지고 침을 뱉었다. 그는 서커스단에 잡혀 들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구경거리로 살아갔다. 그가 사는 철창에는 코끼리 인간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어느 고귀한 영혼을 가진 의사가 우연히 존 메릭을 발견한다. 의사(젊은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했다)는 존 메릭을 불쌍하게 생각해 그를 서커스에서 구출한다.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왕립 병원으로 그를 데리고 가 보살핀다. 의사는 존 메릭이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도 불구하고 매우 지적이며 훌륭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데 놀란다. 왕립 병원의 쾌적하고 안락한 공간에서 존 메릭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
의사가 얼굴에 심각한 기형을 가진 사람을 구출해 왕립 병원에서 보호 중이라는 소식은 영국의 사교계를 강타한다. 곧 사교계의 스타들이 그를 보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존 메릭을 만나는 건 당대 사교계의 가장 중대한 화두인 동시에 코스가 된다. 순식간에 존 메릭은 영국 사교계의 슈퍼스타로 돌변한다. 곱게 정장을 차려입은 존 메릭은 파티와 공연장을 누비며 생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사람 대접을 받는다고 느꼈던 건 착각이었다. 사실 존 메릭은 철창 안에 갇혀 있을 때나 사교계의 스타로 있을 때나 똑같은 서커스의 괴물이다. 구경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과 결코 섞일 수 없는, 남들과 너무 다른 ‘괴물’인 자신을 다시 한번 자각하며 존 메릭은 병원을 벗어나 어두운 거리로 걸어 들어간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걸어가던 존 메릭을 발견한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아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그의 뒤를 쫓는다. 발걸음을 빨리 했으나 존 메릭은 금세 사람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한 무리의 군중이 돌을 던지고 야유를 퍼부으며 여기 괴물이 있다고 소리친다. 군중에게 쫓기면서 존 메릭이 목놓아 절규한다. 나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람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존 메릭은 평생 처음으로 제대로 누워 잠을 청한다. 그렇게 잠을 자면 질식해 죽으리라는 걸 그도 알고 있다. 존 메릭은 그렇게 죽었다.
나는 사람이라고 절규하며 스크린을 향해 질주하던 존 메릭의 모습이, 이 영화를 처음 본 지 꽤 오래된 지금까지도 결코 잊히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것으로부터 공포를 느낀다. 그리고 공포를 이기기 위해 그것을 혐오하고 욕하며 ‘괴물’로 분류해낸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함께 <엘리펀트맨>은 이 분야에 있어 영원한 레퍼런스로 언급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평균의 삶에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고 또 그런 가르침을 자식에게 전수하려 애쓰는 것은 세상이 자신과 다른 것에 얼마나 끔찍하고 폭력적으로 반응하는지에 관해 평생 동안 학습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두 번째 장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는 변형된 형태로 여러 번 영화화되었다. 테리 길리엄의 <브라질>이나 워쇼스키가 제작한 <브이 포 벤데타>는 모두 <1984>의 변형된 자식들이다. 정작 원작을 그대로 영화화한 건 단 한편뿐이다. 1984년 공개된 마이클 래드퍼드의 <1984>는 <브라질>이나 <브이 포 벤데타>만큼 널리 사랑받지는 못했으나 <1984>를 원전으로 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성실하고 아름다운 버전임에 틀림없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가상의 국가 오세아니아의 기록국 직원이다. 그가 하는 일은 모든 기록물을 당의 입장에 따라 수정하는 것이다. 오세아니아는 어제까지 유라시아와 전쟁 중이었다. 그러나 당의 입장이 바뀌자 이제껏 싸웠던 건 유라시아가 아니라 동아시아가 되었다. 유라시아는 언제나 우방이었고 동아시아야말로 적국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당의 입장이 바뀔 때마다 주인공은 모든 종류의 기록물로부터 관련된 문구들을 찾아 수정한다.
여기서 그토록 유명한 <1984>의 문구가 탄생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정권을 잡고 있는 자들이 역사 교과서를 바꾸려 하는 건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반복하자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조화하는 데 성공하는 정권은 영원히 권력을 누릴 수 있다.
윈스턴 스미스는 이런 자신의 일, 나아가 당에 염증을 느낀다. 물론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성과의 밀회를 통해 주인공은 조금씩 당의 지시와 철학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주인공의 일탈은 오래가지 못한다. 곧 사상경찰의 함정수사에 빠진 주인공은 체포되고 사상범 수용소에 갇혀 고문을 당한다. 연이은 고문 끝에 윈스턴 스미스는 정신줄을 놓아버린다. 머릿속의 모든 불필요한 것들을 지워버리고 당과 빅브러더를 향한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남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바람이 불면 가루가 되어 날아갈 것같이 되어버린 윈스턴 스미스가 카페에 앉아 있다. 물기 하나 없이 바삭하게 말라버린 그가 마음속 깊이 빅브러더를 향한 사랑을 고백한다. 소설의 이 유명한 마지막 독백은 영화 속 윈스턴 스미스의 모습을 통해 원전보다 강렬하고 참담하게 관객을 쥐어짠다. 이 장면은 압권이다. 대체 어떻게 연기해냈는지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다. 그의 빛을 잃은 동공과 손짓을 볼 때마다 나는 엉엉 울었다.
존 메릭이었으며 윈스턴 스미스였던 이 남자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에이리언> 그리고 <설국열차>에 이르기까지 별빛처럼 무수한 영화들에서 영원처럼 죽고 살았다. 단언컨대 우리는 다시는 이런 배우를 보지 못할 것이다. 단지 두 가지 장면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 채워진 이 때늦은 추모가 부디 그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영화 이외의 것으로 당신을 떠올리는 건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17년 1월27일, 배우 존 허트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