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봉준호×구로사와 기요시, <큐어>와 <살인의 추억>에 영향을 준 <보스턴 교살자>에 대해 대화하다
2017-02-27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최성열
<보스턴 교살자>

‘<보스턴 교살자> 완전 매진.’ 서울아트시네마 매표소 입구에 내걸린 공지문이 이날의 분위기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지난 2월20일 월요일, 폐막을 이틀 앞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는 모두가 기다려왔던 하이라이트의 순간을 드디어 공개했다. 봉준호 감독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만남이 그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올해의 영화제를 위해 추천한 리처드 플라이셔의 범죄영화 <보스턴 교살자>(1968)를 한국 관객과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한국을 찾았고, 평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에게서 많은 영화적 영감을 받는다고 얘기해온 봉준호 감독은 <옥자>의 후반작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대담자로 나섰다. 한국과 일본 혹은 할리우드와 유럽을 오가며 아시안시네마의 저변을 넓히고 있는 두 거장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 대담을 가지는 건 이번이 네 번째다(자세한 내용은 본문 참조). <보스턴 교살자>로 시작해 서로의 전작에 대한 호기심과 연출론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자유롭게 유영했던 이날의 대담은 아시아 거장들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하는 흥미로운 자리였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의 사회로 진행된 봉준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대담을 정리해 소개한다.

=김성욱 프로그래머_ 올해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위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이 다섯편의 영화를 추천해주셨는데 <보스턴 교살자>는 그중 한편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은 ‘유명한 무명감독’이라고 할 만하다. 많이 들어본 영화를 연출했지만 정작 이 감독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이셔는 <해저 2만리>(1954)와 <바라바>(1962), <도라 도라 도라>(1970) 등을 연출했고 그의 필모그래피 중엔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출연한 <코난2: 디스트로이어>(1984)와 <레드 소냐>(1985) 같은 작품도 있다. 작가로서는 뒤늦게 평가받는 감독이지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은 평소 리처드 플라이셔를 굉장히 좋아하는 연출자로 알려져 있다. 영화 <보스턴 교살자>와 더불어 한명의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리처드 플라이셔에 대해 구로사와 감독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구로사와 기요시_ 리처드 플라이셔라는 감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마도 <보스턴 교살자> 때문일 것이다.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말처럼 리처드 플라이셔는 굉장히 많은 작품을 연출한 감독이고 어린 시절 그의 영화 <해저 2만리>를 본 기억도 나지만, 고등학생 때 <보스턴 교살자>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 영화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장르영화, 오락영화가 한편에 있고 다른 편에 예술영화가 있다고 구분짓고 있었다. 이 작품을 본 뒤에서야 장르영화와 예술영화의 특징이 한 작품 속에 어우러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보스턴 교살자>는 내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된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1년에 한번씩은 꼭 보고 있고, 도쿄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영화를 보여주곤 한다. 지금 보아도 <보스턴 교살자>는 대담하고 실험적이고 재미있는 작품이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영화다.

봉준호.

범인 검거에 실패하는 형사들

=봉준호_ 나는 이 영화를 감독님처럼 어려서 본 건 아니고 감독이 된 뒤에 알게 됐다. 큰 스크린으로 관람하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유명한 무명감독’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적절한 것 같은데, 나도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작품들이 다 한 감독(리처드 플라이셔)의 작품이라는 걸 최근에서야 알게 됐다. 어린 시절 <마이크로 결사대>(1966)라고 TV에서 방영했던 SF영화가 있다. 사람을 축소시켜 인체에 투입하고, 몸속을 여행하는 독특한 영화인데 그 작품도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님의 영화였더라. 그리고 최근에 블루레이로 발매된 <소일렌트 그린>(1973)도 독특한 SF인데 이분의 작품이다. <보스턴 교살자>는 영화보다 실화를 먼저 접했다. <살인의 추억>(2003)의 시나리오를 쓰며 연쇄살인사건과 영구미제사건을 조사하던 도중 보스턴 연쇄살인사건을 알게 됐다. 사실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은 살인범이지만 그럴 수 없는 일이니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실제 사건과 더불어 연쇄살인범이 주인공인 영화를 많이 보기도 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2004)이라든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의 <큐어>(2004)가 그런 영화였다. 특히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의 <큐어>에 나오는 마미야라는 인물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고, 화성 연쇄살인범에게도 그와 같은 모습이 있지 않을까 상상하며 봤던 기억이 난다. 오늘 관객과 <보스턴 교살자>를 함께 보니 색다른 경험이고, 영화에 음악이 거의 나오지 않아 그런지 몰라도 (영화의 제목처럼) 거의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에서 관람했는데, 지금 이 대담 자리에서라도 음악을 틀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좌중 웃음)

구로사와 기요시_ 나도 <큐어>를 찍을 때 <보스턴 교살자>를 많이 참고했다. 이 작품은 연쇄살인마에 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범죄 수사물이기도 하다. 관객 여러분은 놀라지 않았나? 주연배우인 헨리 폰다와 토니 커티스가 영화의 전반부가 훨씬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 말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경찰들이 용의자 검거에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 그 점이 나는 굉장히 놀라웠다. 토니 커티스가 연기하는 범인 드살보가 이후에 검거되는 까닭도 전혀 다른 사건 때문이었다. 만약 바텀리 수사관을 연기하는 헨리 폰다가 범인의 손에 난 상처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범인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사소한 우연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검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보스턴 교살자>의 구성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범죄 수사물과는 완전히 다른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범인을 잡는다는 건 이런 과정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계속적으로 허탕을 치는 수사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 굉장히 리얼하게 다가왔다.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 영화에서도 형사들은 살인범을 잡는 데 계속 실패하지 않나.

봉준호_ <보스턴 교살자>를 보면 범인을 잡기 위해 초능력자까지 동원하잖나. 이건 영화적인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에피소드라고 한다. <살인의 추억>에도 박두만 형사(송강호)가 수사를 하다가 점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 역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형사들이 수사를 하다하다 안 되니 점집에 찾아간 거다. 점쟁이가 ‘경찰서 대문 방향이 잘못됐다. 그래서 7년째 범인을 못 잡는 거다’라고 말해서 경찰서 대문을 실제로 몇 미터 옮겼다고도 한다. (웃음) 한국 시골이나 보스턴이나, 거기에 살아가는 인간의 본성은 똑같은 것 같다. 사람이 코너에 몰리고 다급해지고 힘들어지면 과학에만 의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보스턴 교살자>를 보며 웃기면서도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큐어>에서 마미야를 연기한 하기와라 마사토 배우에게 <보스턴 교살자>를 보길 권했는지 궁금하다. 혹은 그가 연쇄살인범 역을 맡은 토니 커티스의 연기를 참고한 부분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실 당시의 토니 커티스는 청춘스타였다. 한국으로 치면 정우성씨가 연쇄살인범을 연기하는 거라고 해야 할까. 물론 그는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였지만 로맨틱하고 달콤한 연기를 하던 사람이 영화의 후반부 하얀 벽 앞에서 놀라운 롱테이크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구로사와 기요시_ 하기와라 마사토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거나, 참고해서 연기해달라고 주문한 적은 없었다. 다만 <큐어>에서 최면 암시에 걸린 사람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며 인격이 바뀌어가는 장면이 있는데, 이처럼 결정적인 장면을 촬영할 때 컷을 나누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보스턴 교살자>로부터 힌트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봉준호 감독님에게 질문이 있다. 범죄 수사를 다룬 영화에는 보통 범죄를 저지르거나 수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런데 범행 장면도 아니고 수사 장면도 아닌 신들은 도대체 어떻게 찍은 건가? (웃음) <보스턴 교살자>에도 두 장면 정도 그런 사례가 있다. 한 장면은 연쇄살인범 드살보가 집에서 TV를 보고 그의 아내가 음식을 만들며 아이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일상 장면을 리처드 플라이셔는 원신 원컷으로 촬영했다. 두 번째 장면은 수사관 바텀리가 밤에 자택에서 자신의 아내와 대화하는 장면이다. 자신은 이 수사가 게임처럼 너무나 즐겁다며 그런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는 장면이었다. 연쇄살인범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있는 장면. 다른 한편에서는 형사가 전혀 수사를 하지 않는 장면. 이렇게 다른 두 종류의 일상적인 장면이 영화에 포함되어 있는데 풍요롭고도 황홀한 균형감각을 느낄 수 있는 구성이었다. 이런 장면을 봉준호 감독님은 <살인의 추억>에서 어떻게 찍었나.

봉준호_ 방금 말씀하신 두 가지 신은 나도 굉장히 인상적으로 보았다. 특히 TV를 보는 드살보를 비추다가 그의 아내와 아이들을 차례차례 소개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이자 명장면이다. 토니 커티스가 TV로 존 F. 케네디의 장례 행렬을 보고 있다. <보스턴 교살자>의 오프닝 신에도 뉴스 화면이 등장하는데, 이런 구성이 다시 한번 되풀이되면서 마치 영화가 다시 시작하는 느낌을 준다.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선언하는 느낌이랄까. 카메라워크라든가 토니 커티스를 소개하는 방식이라든가, 직업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봤을 때 몸에 전류가 흐르는 느낌을 받게 하는 장면이다. 우선 토니 커티스가 앉아 있는 위치를 선정하는 방식 자체가 인상적이다. 감독은 어떤 현장에 갔을 때 세트건 실제 로케이션이건 간에 배우와 카메라의 위치를 정한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들이 시작되기 마련인데 <보스턴 교살자>에서 토니 커티스가 앉아 있는 위치가 매우 절묘하다. 홀로 고독하게 TV를 보고 있는 커티스의 모습을 비춘 다음 그의 아내를 보여주고 곧이어 아이들이 커티스에게 뛰어든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뽀뽀를 하는 순간이 두번 있다. 그 자체로 영화는 섬뜩한 긴장감을 준다. 그리고 커티스의 얼굴에 떨어지는 빛이 부엌으로부터 오게 되어 있는데 섀도(음영)가 무척 어둡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지며 원신 원 테이크로 촬영한 장면은 굉장히 숨막히는 리듬으로 커티스를 소개하기 때문에 관객은 이 인물에 대해 떨칠 수 없는 첫인상을 가지게 된다. 플라이셔 감독이 토니 커티스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그 흐름만 따로 떼어 짚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감독의 숨겨진 내공과 역량이 여기에 다 집결되어 있는 것 같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이 범죄를 저지르거나 수사를 하지 않는 장면에 대해 질문했는데, 나는 그런 풍성한 경지를 구사한 적 없는 것 같다. (좌중 웃음) <살인의 추억>을 보면 송강호씨의 사적인 순간들이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수사 얘기만 한다. 무모증인 사람을 찾기 위해 사우나탕에서 고생하는 식의 맥락이다. 심지어 영화의 에필로그, 2003년이 되어 퇴직한 두만이 평범하게 가정을 이루고 사는 모습을 보여줄 때도 그는 형사에 가까운 모습이다. “너 밤새워 게임했지? 아빠 얼굴 똑바로 봐” 하면서 아이에게 취조에 가까운 말을 한다. 내 경우에는 모든 화살표가 하나의 스토리나 주제를 향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스스로를 채근하는 타입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의 <큐어>를 보면 주인공 형사인 타카베(야쿠쇼 고지)가 집에 왔을 때 아내의 상태가 좋지 않다. 빈 세탁기를 돌리고 있거나 날고기를 접시에 담아 가져오는데 굉장히 섬뜩한 장면이다. 그의 가정에서 느껴지는, 극복하기 힘든 신경증적인 상태 같은 요소들이 영화가 더욱 강력하게 관객을 옥죄는 데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마미야가 살짝만 건드려주면 형사 역시 자신의 아내를 살해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면도날 위를 걷는 것 같은 연출이 있는데 그런 부분을 야쿠쇼 고지가 어떻게 연기했으면 했나. 형사의 아내를 그런 인물로 설정한 이유도 궁금하다.

구로사와 기요시.

<큐어>와 <살인의 추억>의 영감이 된 작품

구로사와 기요시_ <큐어>에 중요한 영감을 준 작품이 <보스턴 교살자>였기 때문에, 나도 플라이셔의 영화 속 헨리 폰다 부부가 그렇게 묘사되었듯, 단 하나의 신으로 부부 관계를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게 어려워 여러 장면을 통해 표현했다. 화제를 바꿔도 괜찮겠나. 내가 <보스턴 교살자>에서 정말로 좋아하는 장면은 토니 커티스가 잡히는 순간이다. 그가 어느 여성의 집에 침입하려다 실패해서 도망치고, 넓은 도로를 달리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차에 부딪히고, 경찰에 체포되는 장면인데 이 과정을 원신 원컷으로 촬영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컷을 나눴다면 훨씬 안전하고 간단하고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대의 청춘스타 토니 커티스를 실제로 차에 부딪히게 하면서까지 컷을 나누지 않은 선택은- 물론 제대로 된 안전장치나 협의가 있었겠지만-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감독으로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되면 이쯤에서 컷을 자르겠지 하는 순간이 있는데 <보스턴 교살자>는 그런 예상을 깬 작품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어떻게 생각하나.

봉준호_ 나도 어떤 상황과 어떤 순간에서만큼은 숏을 절대 나눠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있어 꼭 그렇게 찍어야겠다고 집착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살인의 추억>을 촬영하며 논두렁에서 사체가 발견되는 과정을 보여줄 때 하루 종일 연습해서 3분짜리 롱테이크 장면을 찍기도 했다. 1980년대 살인사건 현장으로 관객을 데려다놓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보스턴 교살자>에서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이 방금 얘기한 장면이나, 토니 커티스가 자기 자신의 얼굴을 통해 다중인격을 거의 생중계하듯 보여주는 순백의 취조실 장면을 보면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은 그런 순간을 찍을 때 숏을 나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 얘기만 하실 게 아니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도 마찬가지다. (웃음) <회로>(2001)라는 공포영화를 보면 한 여자가 공장 굴뚝에 올라가 뛰어내리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투신자살 과정을 한 테이크로 보여준다. 시각적으로 굉장히 쇼킹한 장면이었다. 보통 투신자살 장면을 찍을 때 뛰어내리는 장면만 보여준다거나 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른다거나(웃음) 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잖나. <절규>(2006)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남녀가 4층짜리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다. 그런 대목을 생각해보면 감독님의 말씀대로 적당히 쉬운 몇 가지 숏의 구성으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피해감으로써 관객이 받는 거대한 영화적 충격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장면을 연출할 때에는 어떤 변태적인 동기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좌중 웃음)

구로사와 기요시_ (웃음) 먼저 <회로>의 그 장면을 기억해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스탭들과 의논을 많이 했는데 그 장면만큼은 절대로 컷을 나누면 안 된다고 고집을 피웠다. 당시에는 CG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기에 간단히 말하면 배우가 번지점프를 해야 했다. 배우에게 끈을 매달아 크레인을 이용해 굴뚝에서 뛰어내리게 했는데 실제로 보면 굉장히 무섭다. 이런 과정을 몇번 반복해 촬영했다. (좌중 놀람) 리처드 플라이셔가 정말 천재적인 감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컷을 나누지 않고 이어서 보여주는데도 긴 시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컷을 나누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장면이 길어지곤 하는데 플라이셔 영화에서 그런 장면들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곤 한다. 이처럼 편집이 없는 장면을 무척이나 효율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감독 리처드 플라이셔의 강렬한 개성과 뛰어난 재능이 느껴진다. 또 봉준호 감독에게 묻고 싶은 게, 나는 <보스턴 교살자>를 보며 연쇄살인범이 왜 이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별다른 사연이나 과거를 소개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상쾌했다. 봉 감독님의 생각은 어떤가. 살인범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정보를 줘야 하고 어떻게 그 인물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봉준호_ 사실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가장 큰 근원은 타인에 대해 모른다는 점이다. 저 사람이 천사인지 악마인지, 또는 결백한 자인지 죄인인지를 알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공포. 이 공포의 감정은 영화적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관객에게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큐어>의 마미야나 타카베 부부의 이상한 관계처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의 영화에는 알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진정한 공포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영화가 전달할 수 있는 궁극의 공포라고 생각한다. <보스턴 교살자>도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왜 그렇게 연쇄살인이 반복되는 데에도 여인들은 현관문을 열어주는가. 살인범의 범행 동기는 무엇인가? 설명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부분이 우리의 머릿속에 의문을 남기며 벗어날 수 없는 공포감을 준다. 그 알 수 없다는 공포에 대항해 나타난 직군이 프로파일러다. <양들의 침묵>(1991)의 조디 포스터나 국회의원 표창원씨 같은. 표면상으로는 동기가 보이지 않지만 이래서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 프로파일링인 것 같다.

구로사와 기요시_ <양들의 침묵> 얘기가 나와서 보태자면, 나도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특히 소리가 굉장히 무섭다. 뭔가가 숨어들었는데 정체를 알 수 없고,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의 사운드다. 나도 공포영화를 계속 찍어왔고 많이 봐왔지만 무서운 일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영화는 사실 쉽다. 무서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영화를 잘 만들었을 때, 그건 정말로 무서운 영화가 된다. <보스턴 교살자>의 경우 음산한 효과음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피아노 소음, (살인범이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 정도다. 이렇게 평범한 소리로도 긴장감을 유발하는 영화가 내가 보기엔 최상급의 공포영화다.

<보스턴 교살자>

사운드의 중요성에 대하여 - 무음도 다 다르다

봉준호_ <양들의 침묵>을 보면 초반부에 유명한 장면이 있다. 스털링 요원(조디 포스터)이 한니발(앤서니 홉킨스)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그녀는 계속 지하로 내려가서 복도 가장 끝방에 있는 한니발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의 사운드 디자인을 보면 압도적이다. <보스턴 교살자>도 소리를 비워버림으로써 진공 상태의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을 준다. 오늘 이 영화 얘기는 감독님이 많이 하셨으니 나는 <보스턴 교살자>를 얘기하는 척하면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의 영화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수가 없다. (웃음) <큐어>나 <회로> 같은 영화를- 내가 워낙 반복해서 본 영화들이다- 화면을 꺼놓고 오디오만 켜놓고 한번 들어보라. 더 무섭다. 그런데 그 소리들이 요란하고 시끄러우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감독님의 영화는 놀라게 하는 사운드라든가 전형적인 사운드 이펙트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나도 최근 <옥자>의 후반작업을 하고 있어서 사운드에 신경을 많이 쓰는데, 감독님은 앰비언스(특정 공간에 존재하는 음향) 자체만으로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이상한 공포감을 만들어내더라. 나는 그 사운드 디자인이 감독님만의 스타일인지 궁금하다. 어떻게 그런 디자인을 하게 되었나?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도 궁금하고. 정말 너무 무섭다. (웃음)

구로사와 기요시_ 봉준호 감독님께서 이미 답을 하신 것 같다. 실제로 내가 <큐어>나 <회로>를 찍을 때 <양들의 침묵>을 많이 참고했다. 스털링 요원이 한니발을 만나기 위해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의 소리를 스탭들에게 들려주고 이렇게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봉준호_ (일본어로) 소오데스네~. (좌중 폭소)

구로사와 기요시_ 실은 오늘 내 작품 얘기를 많이 해서 굉장히 당황스럽다. (웃음)

봉준호_ 죄송하다. (웃음)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사운드 디자인을 굉장히 날카롭게 하시는 분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과 데이비드 린치 감독님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웃음)

구로사와 기요시_ (한국어로) 감사합니다. (좌중 웃음) <양들의 침묵>과 <보스턴 교살자> 같은 영화의 잘 만들어진 소리를 듣고 영감을 받은 것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봉준호 감독님은 고요하고 소리가 없는 장면에 어떤 소리를 넣어야 할지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계시다고 생각한다. 최근에 프랑스영화(<은판 위의 여인>)를 찍었는데 고요하고 정적이 흐르는 소리만 수십 종류를 쓸 수 있었다. 일본에서 작업할 때는 소리를 몇 종류밖에 쓸 수 없었다. ‘소리가 없는’ 소리를 넣을 때 무음1, 무음2, 무음3. 이런 식으로 변화를 주는 게 가능하더라.

봉준호_ 방금 무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사실 시각적인 것 이상으로 관객의 신경을 강타하거나 지배하는 큰 요소가 사운드 같다. 그래서 소리가 완전히 블랭크(무음)일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많이 고민되더라. 사운드를 조금만 잘못 써도 영화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어떤 순간이 너무 뻔하고 천박한 이펙트의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마더>(2009)를 찍을 때, 물론 촬영할 때에는 그런 생각을 못했지만, 영화 말미에 김혜자 선생님이 자기 허벅지에 침을 딱 찌르고 일어나 춤을 출 때까지 모든 앰비언스 음향 효과가 완벽하게 비어 있다. 그 몇초간 극장에서 옆에 앉은 누군가가 침을 삼키면 들릴 정도의 정적이 되는데, 그 장면의 사운드 디자인을 정할 때 몇 가지를 고민하면서 결정했던 기억이 난다. <보스턴 교살자>에서도 보면 토니 커티스가 하얀 방에서 취조를 받을 때, 침묵과 진공상태의 느낌을 엄청 과감하고 길게 밀어붙이더라.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이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늘 일해왔으면서도 정말 과감하고 독한 면이 있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구로사와 기요시_ 아까 말씀드렸듯 무음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다. 작업을 할 때마다 다양하고 복잡하게 바꿨다 넣었다 하고 있지만 가장 좋은 건 아무것도 가공하지 않은 생생함이 돌연히 들어왔을 때라고 생각한다. <보스턴 교살자>에서 토니 커티스가 하얀 방에 있는 장면. 이 장면에서 잘 귀기울여보면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도 들린다. 감독이 의식적으로 넣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할리우드 기술로는 잡음을 지우는 게 아마 가능했을 텐데 감독은 이런 노이즈가 들릴 정도의 무음상태, 진공상태를 이룬 것이다.

김성욱 프로그래머_ 두분을 붙잡고 매일 한편씩 영화를 상영하고, 이렇게 계속 이야기를 나누면 정말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을 듣고 마무리하겠다.

봉준호_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과는 네 번째 대담이자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두 번째 대담이다. 2007년 시네마테크에서 처음 뵈었고 2008~9년경에 일본 <키네마준보>와의 대담, 이후 파리에서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대담을 함께한 적이 있고 이번이 네 번째 만남이다. 감독님과 만담 콤비가 되려던 것은 아닌데(웃음), 내가 가장 존경하는 감독님과 여러 차례 뵐 수 있어 기쁘고 다섯 번째 대담을 기대한다.

구로사와 기요시_ 굉장히 감격스럽다. 내가 ‘살아 있는 감독’ 중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봉준호 감독님, 그리고 세상을 떠난 감독 중 가장 좋아하는 연출자인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에 대해 얘기할 수 있어서 기뻤다.

봉준호, 구로사와 기요시가 말하는 스티븐 스필버그

봉준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대화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또 다른 상영작인 <우주전쟁>(2005)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이야기로 흘러갔다. 21세기 영화에 대한 자신의 저서에서 <우주전쟁>과 (봉준호 감독의)<괴물>(2006)을 동시에 언급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우주전쟁>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베스트3” 중 한편이라 말하고 싶다는 봉준호 감독은 <우주전쟁>에 대해서라면 몇 시간이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데 동의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우주전쟁>과 <괴물>의 주요 배경인 강에 대해 언급하며 “시체가 차례차례 흘러내려오는 <우주전쟁> 속 강의 이미지, 레이(톰 크루즈)의 가족이 탄 페리호가 전복될 때 물의 공포”와 공포의 근원적인 장소가 되는 <괴물>의 강은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괴물>을 연출할 당시 스필버그의 <죠스>(1975)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봉준호 감독은 <우주전쟁>에서 “불이 붙은 기차가 화면을 가로지르는 장면의 서늘한 정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빔을 맞아 순식간에 옷과 몸이 재로 변하는 장면의 공포”를 이 영화의 매혹적인 순간으로 언급한다. “그런데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의 <회로>에도 여자가 아파트에서 검은 재처럼 변하는 순간이 있다. <회로>가 <우주전쟁>보다 먼저 만들어졌는데 스필버그가 <회로>로부터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이에 대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답. “봉준호 감독님이 나보다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직접 만날 기회가 더 많을 것 같으니 미국에 가시면 꼭 한번 물어봐달라.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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