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홍수정의 영화비평] <재심>이 변호사를 그리는 방식에 대한 의구심
2017-03-02
글 : 홍수정 (영화평론가)

약자를 감싸안는 뜨거운 가슴을 거부할 이 누구인가. <재심>은 올바르고 따끈한 영화다. 당신은 아마도 이 영화의 포근한 품에 몸을 내맡기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잠깐, 해주고픈 말이 있다. 그 포근한 품이 당신을 인도하는 곳은 어디인가? 바로 가부장제다. 다른 영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정확히 <재심>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착한 변호사가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풀어주는 그 <재심>?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재심>은 집 나간 탕아가 의붓아버지를 만나 무사히 가부장제의 품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영화다.

모순이 너무 많다

영화는 법적 세계를 가부장적 세계로 파악한다. 현우(강하늘)는 ‘아비 없는 자식’(이 단어는 가부장제하에서 가부장 없는 아들에 대한 편견 섞인 용례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됨을 미리 밝힌다)이며 다방 꼬마로 불린다. “저 아이는 학교 안 다니냐”는 형사들의 질문에 다방 주인은 “애비는 죽었고 저 양아치를 써주는 건 나밖에 없다”고 답한다. 현우의 법적 고난은 그가 아버지가 없으며 써주는 곳이 다방밖에 없기 때문에 시작된다. 현우가 수정(김연서)에 대한 초상화를 그리는 중에 다방 문이 거칠게 열리고 형사들이 들어온다. 이들은 선한 가부장과 대립하는 나쁜 남자들이다. 그들이 수정을 희롱하는 광경을 현우가 흘깃 엿본다. 그 후 현우는 수정을 구출하다가 살인 현장을 지나게 되고 살인자로 몰린다. 그는 나쁜 남자들의 세계를 침범하였기 때문에 표적이 된 것이다. “저 양아치 새끼 여기서 뭐하냐”는 형사의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의 초반, 살인 현장에 모여든 형사들은 ‘제2의 범죄와의 전쟁’을 언급하며 이참에 반장이 되어보라는 농을 한다. 이 대사는 이들 세계의 성격을 암시한다. ‘반장’으로 상징되는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전쟁’ 같은 세계. 그들은 가부장의 보호 밖에 있는 어린 소년을 희생시켜서 질서 강화의 동력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현우의 불행은 사회적 약자가 겪는 우연이 아니라 가부장 없는 아들의 필연이다. 가부장적 결핍을 가진 이는 또 있다. 이준영 변호사(정우)는 언제나 당당한 가장의 모습에 목마르다. 집단소송에서 패하고 도망치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이준영의 아내와 딸이다. 아비 없는 아들과 불완전한 가장, 이들은 사건을 매개로 만나 가까워진다. 이준영이 현우의 양복을 매만지던 순간, 그의 뒤로 현우 아버지의 초상이 겹쳐 보인다. 결핍된 아비의 자리를 준영이 메우며 이들은 비로소 안정된 합일을 이룬다.

영화의 세계가 가부장적이므로 어머니가 무력한 것은 당연하다. 현우 어머니가 시력을 잃는 시기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다. 그녀의 눈의 기능은 현우가 유죄판결을 받을 때 유지되나 항소를 포기할 때 악화되며 현우의 출소 후 완전히 소실된다. 이는 어린 소년의 법적 권리가 박탈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현우가 고문을 받을 때 감싸쥐고 괴롭게 울부짖는 부위도 눈이다. 영화는 가부장적 세계의 힘을 눈으로 표상하며 어머니를 맹인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목격자의 등장으로 현우의 권리가 회복될 조짐을 보이자, 현우와 준영의 가정도 질서를 회복한다. 준영의 아내는 남편의 정의로운 모습에 감동하며 현우는 어머니의 시각을 보조하는 장치를 만든다. 이때 현우 가정의 질서 회복이 시력을 대체하는 장치로서 표현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영화 <재심>에서 법의 세계는 가부장적 세계이자 아비 없는 자식에게 혹독한 야생의 터전이며, 약자의 권리 구제는 유사 부자 관계 형성을 통한 가부장적 질서 회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영화는 소년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자막으로 끝을 맺는다.

가부장적 관점이 문제인 것이 아니다. 정말 문제는 이러한 관점이 영화가 주장하는 바와 모순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초반과 말미의 이준영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형사들보다 나쁘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는 영화가 변호사의 사명이라 주장하는 ‘사회정의 실현과 기본적 인권 옹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기본적 인권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임료를 많이 줄 수 없는 약자라도 “의뢰인을 팔아먹지 않고” 그의 권리를 충실히 보호하는 것은 변호사의 마땅한 책무다. 그러나 가부장적 유사 부자 관계에서 아버지의 보호는 아들에 대하여 은혜적으로 베풀어진다. 수평적 계약관계에서의 직업적 의무가 수직적 혈연관계에서의 부성애로 격상되는 것이다. 거꾸로 의뢰인 현우는 내리사랑에 감사하여야 할 아랫사람으로 격하된다. 이와 같은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한번 더 반복된다. 현우가 일당으로 받은 돈을 준영에게 주자 그는 기분 좋게 이를 받아들인다. 이때 현우는 이 돈이 자신의 “전 재산”이라고 한다. 현우는 어째서 수임료를 지급하기보다 “전 재산”을 준 것일까. 우리는 이와 같은 표현을 다른 곳에서 익히 들어본 바 있다. 가난한 청춘이 누군가에게 애정을 고백할 때, 나약한 인간이 신의 은혜를 기도할 때. 그렇다. 적지만 나의 전부라는 표현은 강자와 관계 맺길 바라는 약자의 구애의 언어다. 그는 동등하게 관계 맺지 못하므로 자신을 낮추며 겸허히 허락을 구한다. 이로써 변호인은 아버지로, 구애의 상대방으로 재차 격상된다.

영화의 모순은 이뿐만이 아니다. 현우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행을 겪고 영화는 분명 이에 반대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이라면 학교에 가야 된다는 어조를 풍긴다. 결국 현우는 검정고시를 결심하고 그의 어머니는 눈물을 보인다. 이때 학교는 가부장적 세계에서 바른 질서의 상징이다. 영화는 제도 밖의 약자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하지만 그가 선 위치를 존중하는 대신 그를 새로운 체제 안으로 끌고 들어온다. 천부적 인권을 가지지만 사람답지 못하다는 묘한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이준영과 대립하는 모창환 변호사(이동휘)와 최영재 검사(김영재)는 영화의 후반부에 비열하고 악한 표정을 자주 보인다. 악함의 반대는 정당함이 아니라 선함이다. 이들의 악한 몸짓으로 이준영은 선인의 위치에 가까이 간다.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선한 것인가. 우리는 양자의 차이에 좀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우월감에 도취되다

위의 모순들은 종국적으로 영화가 은혜적 사랑의 매력을 포기하지 못함에서 비롯된다. 당연한 일이라며 이성적으로 설득하고, 은혜적 사랑으로 그림으로써 다시 감정적으로 설득한다. 그러나 양자를 모두 취하려는 선택 때문에 영화는 스스로의 괴리 사이에서 붕괴한다. 무언가의 정치적 당위성을 주장하는 영화들이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스스로의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되는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취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당위와 우월감은 함께 갈 수 없다.

변호사는 아버지가 아니다. 그는 아버지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그 이유는 자명하게도, 의뢰인은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우와 같은 상황에서 불행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는 우리 모두의 아픈 자화상이다. 현우가 정말 당연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면 그는 아버지의 포근한 품에 감사히 안기는 대신 변호사와 동등하게 관계 맺어야 한다. 의뢰인은 아비 없는 자식이 아니라 법적 조력이 필요한 한명의 시민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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