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장병원의 영화비평] 서사 구조와 서술 주체로 살펴본 <사일런스>
2017-03-16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엔도 슈샤쿠의 소설 <침묵>을 읽지 않았지만 이 소설의 어떤 점이 마틴 스코시즈를 매혹하였는가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인 스코시즈가 엄격한 가톨릭 환경 아래 성장했고, 영화학교에 들어가기 전 신부가 될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을 만큼 신앙심이 두터웠으며, 죄의식과 구제라는 종교적 세계관을 바탕에 깐 영화들을 만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일런스>(2016)에서 스코시즈는 흥미로운 서사의 구축과 가공할 만한 영화적 테크닉을 동원하여 믿음의 본질에 접근한다.

흡사 미조구치 겐지의 재래(再來)를 보는 것 같은 오프닝을 통해, 그리고 존 포드의 <수색자>(1956)처럼 이단적 세계로부터 자아를 지키려는 순혈주의의 여정을 통해 <사일런스>는 가혹한 힘에 대항하는 종교적 항거의 양식을 묘사한다. 이 영화에서 스코시즈는 종교적 믿음과 철학적 탐색 사이에서 씨름한다. 17세기 가톨릭 교회의 노선 안에는 신앙의 제국을 연상시키는 식민주의적 발상이 엿보이지만 외견상 <사일런스>는 이단을 교화시키려다 그곳의 문화와 정신에 동화된 배교자들의 수난기(이 대목에서 <수색자>와의 친연성이 다시금 확인된다)처럼 보인다. 믿음의 근원으로 파고들어가는 드라마의 심도는 주인공 로드리게스(앤드루 가필드)의 무의식에서 일어나고 있는 치열한 투쟁의 궤적을 따르고 있다.

배교의 순환과 서술 주체의 변화

<사일런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서사의 중요한 국면마다 바뀌는 서술 주체의 내레이션이다. 영화 안에서 시간과 공간을 해설하고 사건을 기술하는 화자가 교체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서술 주체의 교체는 소설 <침묵>과 영화 <사일런스>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는데, 그 자신이 각본을 쓴 스코시즈의 독창적인 플로팅은 문학적 수사를 영화로 번역하는 하나의 전범을 예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사일런스>의 서사는 ‘배교의 순환 주기’를 중심에 두고 짜인다. 포르투갈 예수회의 파견 선교사로 일본에 온 성직자 페레이라(리암 니슨)와 로드리게스로 이어지는 배교의 주기가 서사의 몸통을 이룬다. 서술 주체가 바뀌면서 이야기도 새로운 국면으로 미끄러지는데, 화자의 전환은 서술 주체의 시점뿐 아니라 내레이션의 형식도 바꾸어놓는다.

<사일런스>의 플롯은 ‘회귀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몇 가지 서사의 카테고리들이 유형화되어 배열되면서 내레이션은 순환하는 세계의 원리를 형상화한다. 플롯은 보이스오버의 주체와 그들의 서술 방식에 따라 넷으로 쪼개진다. 4개의 챕터로 갈라진 조각들이 어떤 논리로 배치되었는가를 살펴보자. 먼저, 서간체로 진행되는 처음 두 챕터. 1633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자행된 기독교인들의 십자가 박해와 핍박에 대한 묘사로 열리는 첫 번째 챕터는 배교자로 낙인찍힌 신부 페레이라가 쓴 편지글이다. ‘지옥’을 형상화한 영화의 오프닝은 ‘믿음의 강인함’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네덜란드 상인의 손에 의해 예수회에 전해진 페레이라의 글은 ‘먼 곳의 관찰자’들에게 전해진다.

두 번째 챕터는 발리그나노 신부(시아란 힌즈)로부터 그들의 멘토였던 페레이라의 스캔들을 들은 두명의 수사 로드리게스와 가루페(애덤 드라이버)가 페레이라의 행방을 좇아 일본으로 건너간 1640년 시점에서 기술된다. 두 번째 챕터의 서술 주체는 로드리게스이며 이 역시 발리그나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챕터에서 로드리게스는 ‘카타콤의 신자들처럼’ 은밀하게 믿음을 키워가는 이들에 감화받아 그 자신의 신앙을 쇄신하게 된다.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시험을 목격하는 이 챕터는 일본의 ‘도모기촌’에서 처음 만난 신실한 신자 모키치(쓰카모토 신야)가 십자가 박해로 죽은 뒤 끝난다.

세 번째 챕터는 로드리게스의 ‘기도’이다. 이 챕터에서는 가루페와 헤어지고 홀로 된 로드리게스가 일본인 안내자 기치지로(구보즈카 료스케)의 밀고로 관졸에게 포로로 잡혀서 겪는 수난이 묘사된다. 흡사 우리에 갇힌 동물과 같은 상태로 형상화되는 로드리게스는 나무 빗장 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본다. 이 장면의 시각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무력하게 포박당한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처럼 로드리게스의 억류된 몸은 고립과 무기력함을 가중시킨다. 타인의 고통에 눈을 감고 자아를 지킬 것인가, 배교를 통해 고통을 멈추게 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로드리게스는 신에게 묻는다. 밤낮으로 간구하는 성직자의 ‘기도’는 일종의 신과의 대화인데, 이 챕터에서는 신을 대면하려는 로드리게스의 내면의 목소리가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세 번째 챕터는 로드리게스가 성화를 밟고 배교를 행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네 번째 챕터는 1641년 네덜란드 대상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간 디터 알브레히트라는 연대기 작가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3인칭으로 기술되는 이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작가 알브레히트는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 알게 된 로드리게스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기록한다. 그의 기록은 벽안(碧眼)의 배교자 신부 로드리게스의 기이한 말년을 증언한다. 1682년 네덜란드 상인의 마지막 항해 때 마지막 신부 로드리게스는 신을 부정하고 배교자로 죽는다. ‘오카다 산에몬’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까지 하고 철저하게 그곳의 문화와 풍습, 종교에 동화하여 살아가는 로드리게스의 미스터리한 삶은 문자 그대로 ‘침묵’을 형상화한다. 에필로그를 주재하는 네덜란드 상인의 기록은 프롤로그에서 네덜란드 상인의 손에 의해 전해진 페레이라의 편지와 대구를 이룬다.

<사일런스>의 뛰어나게 흥미로운 부분은 이처럼 지난(至難)한 신앙을 사는 주인공의 정신적 여정이 ‘화자의 교체’라는 방식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서간체 편지에서 1인칭 독백 형식의 기도로, 마지막에는 3인칭 화자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이행하는 내레이터의 변이는 신앙의 정수라는 이 영화의 테마와 연결된다.

놀랍게도 마틴 스코시즈는 ‘편지’와 ‘기도’ 그리고 ‘기록’이 갖는 차이를 신앙의 본질에 다가가는 여정으로 절묘하게 치환하고 있다. ‘보고’라는 편지의 형식, ‘대화’라는 기도의 형식, 관찰이라는 ‘기록’의 형식은 서사의 짜임새를 완전하게 만든다. 이는 신앙의 성장과 시험, 완성이라는 로드리게스의 진화하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배신과 믿음의 역설

성직자로서 로드리게스가 처한 시험은 범상한 인간이 숱하게 겪게 되는 질문과 상통한다. 신의 은총으로부터 소외된 타인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배신자들은 성직자와 주변인들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인물은 성서상의 ‘유다’처럼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기치지로이다. 로드리게스는 “저 같은 놈도 구하실까요?”라고 묻는 기치지로의 믿음을 의심했고 경멸했지만 끝내 그를 거둔다. 나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 죄인에 대한 연민, 죽어가는 자들에 대한 연민. 그러나 용서를 구하고 돌아와 또 다른 죄를 저지른다면? 스코시즈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면서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개념에 관한 이야기로 깊게 들어간다.

이노우에(이세이 오가타)의 포로가 된 이후 문초를 당하는 것은 로드리게스의 몸이 아니라 그 주변인들이다. 로드리게스는 묶인 채 그것을 보고 기도할 뿐이다. 비극을 멈출 수 있는 힘은 오직 그에게만 있으며 스스로 배교하여야 그것이 가능하다. 로드리게스가 배교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진정한 신앙을 획득하기 위해 진실을 부인하기로 한다. 그는 기독교와 예수의 가장 깊은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연민’을 긍정하기 위해서 진실을 부인한다. 순교자로 죽는 것은 영예로운 전리품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속화된 인간의 욕망이다. 이를 먼저 깨달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악명 높은 종교 재판관 이노우에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졸들에게 붙들린 로드리게스와 이노우에의 독대 시퀀스는 특별한 잔상을 남긴다. 누군가를 벌하려거든 나만 벌하라고 하는 로드리게스에게 이노우에는 “이런 무지한 인간. 선한 신부인 양 떠들지 마시오. 당신이 진정으로 선한 신부라면 기리시탄(기독교인)들을 불쌍히 여겨야지”라고 말한다. “당신의 영광의 대가는 타인의 고통”이라고 일갈하는 이노우에는 성직자의 신념을 무너뜨리기 위해 강압이 무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노회한 재판장이며, 신앙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그 정수를 꿰뚫게 된 현자(賢者)로 보인다.

신의 응답을 구하던 로드리게스가 배교로서 완전한 신앙에 도달하기까지 중요한 기점이 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챕터의 이행, 서술 주체의 변화와 조응하는 것은 ‘신의 등장’이다. 로드리게스의 시점으로, 총 4번 나오는 신의 이미지는 서사의 규율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등장한다. 마카오에서 로드리게스가 기치지로를 처음 만난 후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관졸에게 잡히기 전 시냇물에 얼굴을 비출 때, 수감된 직후 감옥 바닥에서, 그리고 성화를 밟고 배교하기 전에 신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이 이미지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로드리게스에게 은밀하게 임하는 신의 존재를 보여준다. 최종적으로 그 자신의 신념을 억누르고 타인에 대한 연민을 행한 이에게 신은 나타난다.

따라서 <사일런스>가 묘사하는 것은 ‘신의 침묵’이 아니다. 배교자 신부라며 만류하는 로드리게스에게 극구 고해를 청하는 기치지로를 앞에 두고 그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침묵과 싸우느라 괴로웠다”는 로드리게스에게 신은 “침묵한 적이 없다”고 답한다.

‘신의 침묵’이라는 딜레마는 이 순간 사라진다. 여기서 ‘음성’과 ‘이미지’(행위) 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아름다운 결론이 도출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 신의 목소리를 듣고자 했던 성직자는 더이상 침묵을 의심하지 않는다. 배교 의식을 앞둔 로드리게스가 신의 음성을 듣는 순간, 신은 자신의 얼굴을 밟으라고 말한다. 배신의 순간 완성되는 믿음의 역설.

엔딩 숏이 보여주는 시네마의 힘

<사일런스>에서 마틴 스코시즈는 마음의 경전을 창조했다. 십자가에 달린 채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한 예수의 원망 또한 배교의 언술이 아닌가? 그러나 로드리게스의 말처럼 예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니라 추한 사람들을 위해, 어린 양들을 위해, 악마로 불린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죽었다. 그것은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을 견디면서 세계를 보는 방식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치이다. 그러니 마틴 스코시즈의 영화 세계에 항상 적용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고통은 진실을 측정할 수 있는 계측기라는 것이다. 한 맥락으로 로드리게스는 시종일관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갇힌 상태로 묘사된다. 일본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에는 카타콤과 같은 움막에, 포로로 잡힌 뒤에는 독방에, 불교식 장례로 영면하는 마지막 순간에는 한 뙈기도 되지 않는 관 속에 웅크린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감옥과 같은 밀실에, 깊은 신념 안에 봉인되어 있다. 이 안장된 신앙은 견고하며 영원한 침묵으로 남는다.

<사일런스>의 결론은 박해자들이 어둠 속에 가두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여준다. 여기서 스코시즈는 내레이터가 인식하는 앎의 범위를 초월하여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보기에 따라서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의 엔딩은 이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단 하나의 이미지가 가진 힘을 응축해 보여준다. 로베르 브레송의 숏을 연상시키는 그것은 장장 160분에 이르는 영화가 이 한숏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느껴질 만큼 압도적이다. 맹목적으로 순수한 믿음의 증거자였던 모키치로부터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신앙의 징표, 은밀하게 임하는 신의 존재를 보여주듯 이 마지막 숏은 ‘침묵’의 의미를 다시 정의한다. 모든 관객을 목격자로 만드는 이 숏은 긍정과 부정의 전망을 초월하여, 지나치게 많은 숏이 낭비되는 미학의 곤궁함을 초월하여 여전히 시네마의 위력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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