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시노다 마사히로의 <침묵>과 마틴 스코시즈의 <사일런스>
2017-03-16
글 : 박수민 (영화감독)
<침묵>

엔도 슈사쿠의 원작 소설 <침묵>(1966)을 읽은 것은 2013년 1월의 겨울이다. 당시 나는 당인리 발전소 담벼락을 따라 들어가는 외진 골목길, ‘합정 슬럼’이라 부르던 동네에 살았다. 내가 기거하던 판잣집(농담이 아니다), ‘Southern Tears’로 이름을 붙인 무허가 건물에서 보내는 혹한은 괴로웠다. 월세가 싼 대신, 지독하게 추웠다.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침낭 속에 몸을 파묻은 채 책만 읽으며 소일하는 삶은 어느 흑백사진 속 젊은 콜린 윌슨(<아웃사이더>(1956)의 작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지만 결코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영화를 선택한 죄, 아니 첫 영화를 잘못 만든 죄로 그에 대한 오랜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일러에 기름을 넣고 그날의 끼니로 찐빵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근처의 홍성사에 들러 이 책을 샀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메모장에다 적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 나의 교회입니다.”

이 땅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 박해받던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믿음을 이어온 가정에서 자란 나는 내 영화 <간증>(2010)을 통해 ‘Losing My Religion’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러나 신앙심은 잃을 수 있을지라도 신앙 자체를 저버리기는 불가능했다. 스스로를 배교자로 규정하는 나는 세속의 교회를 멀리하는 대신, 혼자서 나름대로 추구하는 신앙의 길을 책 속에서 찾았다. 욥의 시와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1943)이 오랫동안 나의 교회였고, 여기에 <침묵>과 발터 옌스의 <유다의 재판>(1975) 같은 책들이 더해졌다. 신유박해(1801)를 배경으로 정약전과 황사영의 상반된 삶을 다룬 김훈의 <흑산>(2011)도 큰 울림을 주었다. 종교가 약속하는 저세상에서의 새로운 삶은 사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미 지옥일지라도, 삶은 현실의 이 세상에만 있다. 그리고 한낱 나약한 인간의 삶이란, 때로는 배교와 배반과 배신으로서만 가능하다.

자신들에게 신앙을 가르쳤던 스승이 선교를 떠난 일본에서 배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포르투갈 예수회의 두 젊은 신부가 진위를 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그러나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의 천주교 탄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박해가 아니라 절멸이었다. 도에이의 엽기 고문영화 <쇼군 사디즘>(원제: <도쿠가와 여자형벌 두루마리-거열형>)(1976)의 내용도 기리시탄(크리스천) 박해였다. 섬나라의 지배계층은 피지배층이 다른 세상의 존재 가능성을 희망하길 원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신분 사회의 철저한 지배 아래 이 땅에서 태어나고 노동하다 죽어야 했다. 새로운 신과 저세상에 대한 헛된 믿음은 필요치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은 인간을 공포와 폭력으로 길들인다. 사교의 탄압을 위해 온갖 방식의 잔인한 고문과 형벌이 고안되었다. 천황(덴노)의 나라에서 감히 천주를 영접했던 민초들은 오로지 배교하는 것만이 목숨을 지키는 길이었다. 성물(聖物)을 발로 밟거나 그 위에 침을 뱉고 천주와 성모와 그 아들의 존재를 모욕하고 부정하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죽으면 천당으로 갈 거라 믿고 있는 가련한 백성들에게 죽음은 비참한 삶에 마침내 주어지는 안식이었다. 도리어 그들의 믿음만 굳건해지는 것을 보고 지배자들은 곧 신자들을 배교시키는 것보다 복음을 전파하러 온 신부들부터 배교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침묵>의 주인공 로드리게스 신부는 천주교 박해의 주축인 나가사키의 수령 이노우에에게 붙잡혀 배교의 위기에 처한다. 이노우에는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떳떳하게 죽을 기회, 즉 순교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대신 같이 잡힌 신자들을 거꾸로 매달아 고문하며 그 고통의 소리를 듣게 만들고 신부가 배교하면 즉시 그들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한다. 로드리게스의 발 앞에 그리스도의 성화가 새겨진 동판을 내려놓고 통역은 “형식으로만 밟으면 되는 것”이라 말한다. 이미 배교하여 아내를 얻고 일본식 이름까지 지은 스승 페레이라는 그리스도 역시 똑같은 상황이라면 저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했을 거라며 “가장 괴로운 사랑의 행위”를 역설한다. 배교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구원과 배교하여 타인을 고통에서 구원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며 몸부림치던 로드리게스는 고뇌의 끝에, 동판에 새겨진 그분이 전하는 말을 듣는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태어났고, 너희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졌다.

이 대목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이 장면에서 사실 ‘말’이란 정말로 침묵을 뚫고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라기보다 신부의 내면에서 자기 발화(發話)한 것에 가깝다고 느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침묵하는 신이 인간에게 답을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말은 물론 나 자신의 말이지만, 동시에 신이 나를 통해 전하는 말이 아닐까?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고통 끝에 자신이 내뱉은 목소리를 들었던 게 아닐까? 거짓이면서 동시에 진실인 사실. 의심과 맹신이 도달하는 같은 결론. 내 영화에서 고민했던 질문과 대답에 대한 갈구가 이 책에서 더 선명한 답을 찾은 느낌이었다. 내가 <간증>을 만들기 전에 <침묵>을 읽었다면, 영화는 더욱 모호할지언정 그 이면의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일런스>

<침묵>을 영화로 만든다면, 대체 이 장면을 어떻게 찍을지, 이 말(밑줄 친 문장)을 어떻게 표현할지가 궁금했다. 원작 소설에서는 처음에 문장으로만 구현되었고, 로드리게스가(엔도 슈사쿠가) 문장에 작은따옴표(‘생각’)와 나아가 큰따옴표(“대사”)를 붙이는 것은 배교한 다음이다. 내가 <침묵>을 영화로 만든다면 이 문장은 로드리게스 자신의 목소리로 관객에게 들려져야 했다. 물론 이것은 나의 오독에 따른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다. 1971년에 시노다 마사히로가 만든 첫 번째로 영화화한 <침묵>에서 문장은 말해지지 않는다. 어떤 소리로도 관객에게 들리지 않는다. 객관을 위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나는 아쉬웠다. 영화는 이교도인 감독이 사실을 기초로 건조하게 찍은 것처럼 느껴졌다. 각본에 참여했던 엔도 슈사쿠가 싫어했다고 전해지는 영화의 결말은 지극히 단순하게 절망적이다. 다만 흥미로운 부분은 기치지로의 묘사다. 스스로 칭하길 ‘나약한 인간’인 기치지로는 배교를 밥 먹듯 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매번 로드리게스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청한다. 성물에 침을 뱉고 도망쳤던 기치지로는 유곽의 여인에게 돈을 줄 테니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어달라고 한다. 여인은 아무 거리낌 없이 곧장 기치지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영화로 만들기까지 스스로 수십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마틴 스코시즈의 <사일런스>(2016)에서, 문장은 마침내 실재하는 목소리로 관객에게 들린다. 그러나 로드리게스의 목소리는 아니다. 감독은 정말로 저편 누군가의 목소리-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로드리게스에게(관객에게) 들리도록 표현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감독이 선택한 답은 영화 나름의 답이고, 결국 해석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선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원작과 거의 똑같이, 그 내용을 오롯이 담은 영화는 마틴 스코시즈 버전이다. 1971년 작품도 내용은 거의 같지만 2016년의 작품이 훨씬 엔도 슈사쿠의 의도에 가깝게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모키치를 연기한 쓰카모토 신야를 비롯한 일본 배우진의 열연은 믿음의 고통을 절절히 전한다. 책에서처럼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관객 자신을 온전히 이입할 수 있는 영화도 이것이다. 원작이 드디어 합당한 영화화를 만난 것 같다. 남은 건 젊은 마틴 스코시즈가 부족하게 영화화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누가 제대로 영화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다.

신앙의 문제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종교에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 있는 인간 때문이다. 신은 앞으로도 계속 침묵할 것이고, 세상의 고통에 답해야 하는 이는 오직 인간이다. <침묵>을 읽고 어느 훗날 써갈겼던 필자의 시(?!)로 글을 맺어볼까 한다. 그렇다(지면 상단의 필자 소개에 ‘연애가 망하면 시를 쓴다’는 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내 주는 맨땅이시니/ 차디찬 벽이시니/ 머리 박고 울며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결코 대답하진 않으시니/ 그 침묵이 내 가슴 두드려/ 스스로 답을 토하게 하시니/ 주여 내게서 내 말 들을 이/ 모두 떠나게 하신 지금/ 지극히 고요한 축복/ 그래서 내가 내 외침 듣게 하시니/ 내 주는 차디찬 벽/ 내 주는 맨땅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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