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당신이 주목해야 할 9명의 해외 여성감독과 그들의 대표작
2017-03-22
글 : 이예지

왜 여성 영화감독은 찾아보기 어려운 걸까? 비단 한국의 영화산업 현실에서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2016년 할리우드 흥행영화 250편 중 여성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7%에 불과하다. 메릴 스트립이 여성 시나리오작가 지원 펀드를 만들고 제니퍼 로렌스, 퍼트리샤 아퀘트 등이 할리우드 내 임금 성차별 등을 정면으로 비판해 공정임금법을 제정하는 등 여성 영화인들이 활약하고 있음에도, 실제 영화에 참여하는 여성 스탭들의 수치는 턱없이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빛나고 있는 여성감독들이 있다. 지난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아이튠즈는 주목해야 할 여성 영화인 10인을 발표했지만, 이들이 연출한 작품은 <무스탕: 랄리의 여름>을 제외하면 국내 미개봉작으로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아이튠즈에서 추천한 5명의 여성감독과 <씨네21>이 추천하는 4명의 여성감독을 더해 총 9명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감독들과 그들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남성 중심의 기성 영화와는 다른 시각의 신선한 재미를 지닌 작품을 만든다는 것, 여성뿐 아니라 인종과 젠더, 소수자성과 관계성에 넓고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벨>

편견의 벽을 부수다

<벨> 에마 아산테

18세기, 영국 귀족 중 흑인 여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벨>(2013)은 실존했던 인물, 디도 엘리자베스 벨의 이야기다. 영국이 노예무역을 하던 시대에 해군 제독 존 린지(매튜 구드)는 흑인 여성 사이에서 낳은 디도(구구 바샤로)를 그녀의 삼촌이자 대법원장인 맨즈필드 백작(톰 윌킨슨)에게 맡긴다. 맨즈필드 집안의 양녀가 된 벨은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사랑을 찾아나가며, 맨즈필드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판결을 내린다. 놀라울 정도로 드라마틱하며 근사한 이 여성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은 에마 아산테 감독이다. 가나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나 런던에서 자란 그는 백인 사회로 들어간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낸 <벨>에 이어, 세 번째 작품 <어 유나이티드 킹덤>에서는 흑인 사회로 들어간 백인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이 또한 실화다. 아프리카 보츠와나의 왕자 세레체 카마(데이비드 오예로워)는 영국 유학 중 백인 여성 루스 윌리엄스(로저먼드 파이크)를 만나 결혼을 약속하고, 인종과 직위를 가로지른 그들의 사랑은 외교적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편견을 뒤집는 실화들을 영화화해온 에마 아산테. 차기작은 독일 혼혈 여성과 독일 장교의 사랑을 그린 멜로드라마 <웨어 핸즈 터치>로, 인종과 여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무스탕: 랄리의 여름>

생생하고 자유롭게

<무스탕: 랄리의 여름> 데니스 감제 에르구벤

억압에 저항하는 소녀, 랄리(구네스 센소이)는 어떤 편견과 타박에도 굴하지 않는다. <무스탕: 랄리의 여름>(2015)은 전근대적 악습이 남아 있는 터키 한 지방의 이야기다. 랄리와 네 자매는 소년들과 어울려 놀았다는 이유만으로 집 창문에 창살이 쳐지고 결혼을 강제당한다. 그러나 랄리는 꺾이지 않고 빛바래지 않으며, 화면을 가득 채우는 터키의 햇빛만큼이나 생생하고 자유롭다. 이 인상적인 영화는 터키계 프랑스인 감독 데니스 감제 에르구벤의 데뷔작이다. 프랑스 국립영화학교 라 페미스를 졸업한 그는 이 영화로 2015년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돼 레이블 유로파 시네마상을 수상하고 2016년 오스카와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는 영예로운 데뷔를 했다.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다. 할리우드 데뷔작이 될 에르구벤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은 백인 경찰들에 구타당한 로드니 킹의 재판 판결 후 벌어진 LA 시위 사태를 그려낸 <킹스>로, 할리 베리와 대니얼 크레이그가 출연한다. 이후의 차기작은 앤 해서웨이가 주인공을 맡은 <더 라이프 보트>이며, 많은 사람들을 태운 구조보트에서 살아남은 그레이스 윈터가 재판에 회부되는 이야기를 그릴 예정이다.

<디 엣지 오브 세븐틴>

웃픈 삶을 사랑하라

<디 엣지 오브 세븐틴> 켈리 프레몬

17살, 세상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자기 자신조차도 미지의 존재인 나이. <디 엣지 오브 세븐틴>은 사춘기 소녀의 삶을 ‘웃프게’ 그려낸 성장 드라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너드 소녀 나딘(헤일리 스테인필드)은 베스트 프렌드인 크리스타가 자신의 오빠 다리안과 동침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과 소외감을 느낀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과 성욕에 솔직한 그는 선생님(우디 해럴슨)의 코치를 받아 한 소년에게 접근한다. 사춘기 소녀의 이야기를 통통 튀면서도 사려 깊게 풀어낸 이 작품은 켈리 프레몬 감독의 데뷔작이다. UC어바인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켈리 프레몬은 임모탈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 영화 각본을 쓰기 시작한다. 각본과 연출, 제작까지 참여한 데뷔작으로 2017년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헤일리 스테인필드)에 노미네이트되고, 2016년 뉴욕비평가협회에서 최고의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굵직한 성과를 거둔 빛나는 신예다. <버라이어티>는 켈리 프레몬을 주목해야 할 10명의 작가로 선정하며 차세대 노라 에프런이 될 것이라는 평을 내린 바 있다.

<더 피츠>

인물의 내면 들여다보기

<더 피츠> 안나 로즈 홀머

공이 튀어오르고, 현악기의 위태로운 음률이 고조된다. 감각적인 사운드와 편집의 리듬감이 기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더 피츠>(2015)는 독특한 개성의 작품이다. 11살 흑인 소녀 토니(로열티 하이타워)는 무용극단에 들어가고, 자신을 맞춰가기 위해 분투하지만 그와 극단은 뜻밖의 위기에 처한다. 영화는 소녀들의 커뮤니티 안에 편입되고자 하는 토니의 내면을 기민하게 그려낸다. <더 피츠>로 장편 극영화 데뷔를 한 안나 로즈 홀머 감독은 촬영팀 출신 감독이다. <트와일라잇>(2009) 등 영화 촬영팀에서 일한 그는 첫 장편 극영화 <더 피츠>로 2015년 베니스국제영화제의 비엔날레 칼리지 부문에 초청되었다. 그는 이후 조디 리 라이퍼스의 다큐멘터리 <발레 422> 등을 프로듀싱하며 전방위에서 활동을 펼쳐나가는 중이다.

<에쿼티>

비정상으로 보지 않는 시선

<에쿼티> 미라 메논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의 여성 버전이라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장르에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에쿼티>는 세계에서 가장 큰 투자은행에서 일하는 출세지향적 인물인 나오미 비숍(안나 건)의 야망과 위기를 그려내는 작품이다. ‘나는 돈을 사랑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그는 남자들이 전유했던 경제 부서에서 승승장구한다. 고압적인 고객, 딴마음을 품은 남자친구, 사건을 파헤치는 검찰과 믿었던 동료의 배신 등 복잡하게 꼬여가는 상황을 나오미 비숍은 체스말 ‘비숍’처럼 고고하게 처리해나간다. 이 세련된 영화는 인도계 미국인 미라 메논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2016년 선댄스필름페스티벌에서 극영화 부문 대상에 노미네이트됐다. 그는 처녀성을 잃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파라의 이야기를 다룬 첫 작품 <파라 고즈 뱅>(2013)으로 2013년 트라이베카필름페스티벌에서 노라 에프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늦게 성에 대한 고민에 빠지는 여성들을 비정상으로 보지 않는 시선을 그려내고자 이 영화를 기획하게 됐음을 밝혔다. 여성에 대한 관심사를 꾸준히 투영해나가고 있는 그는 TV드라마 <스노폴> 등을 연출하며 브라운관에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퓨어>

여성감독과 여성배우의 든든한 파트너십

<퓨어> 리사 랑세트

할리우드의 스타,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세상에 소개한 이는 리사 랑세트 감독이다. <퓨어>(2009)에서 음악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한 소녀 카타리나를 연기한 비칸데르는 달 뜬 열기와 기묘한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도시 외곽에서 가난하게 살던 소녀는 유튜브에서 모차르트를 접한 뒤 예술의 세계로 발돋움하고 싶어 하고, 지휘자와의 위험한 관계를 시작한다. 소녀의 욕망을 섬세하면서도 집요하게 그려낸 <퓨어>는 랑세트 감독과 비칸데르에게 스웨덴의 아카데미상인 굴드바게영화제 각본상과 여우주연상,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 플래시 포워드상 등을 안겼다. 리사 랑세트 감독은 비칸데르와 마찬가지로 스웨덴인으로, 극본가와 극장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2004년엔 누미 라파스가 출연한 연극 <비러브드>를 쓰기도 했다. 두 번째 작품 <호텔>(2013)은 자신의 삶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에리카(알리시아 비칸데르)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살 수 있는 호텔’로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로 2013년 마라케시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리사 랑세트의 첫 영어영화가 될 세 번째 작품 <유포리아>도 비칸데르와 함께다. 비칸데르는 자신의 제작사 비카리어스 프로덕션의 첫 영화로 <유포리아>를 선택했고, 에바 그린과 샬롯 램플링이라는 쟁쟁한 여성배우들과 호흡을 맞춘다. 가상의 안락사 클리닉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될 전망이다. 여성감독과 여성배우와의 든든한 파트너십이 앞으로도 쭉 지속되길 응원한다.

<더 다이어리 오브 어 틴에이지 걸>

감각적인 연출력

<더 다이어리 오브 어 틴에이지 걸> 마리엘 헬러

욕망의 활화산 상태의 사춘기 소녀들을 말릴 길은 어디에도 없다. 사랑을 갈망하는 소녀 미니(벨 파울리)는 엄마의 남자친구와 밀회를 갖고 성장의 고비를 넘기며 자의식을 형성해나간다. 2002년 출판된 푀베 글뢱크너의 동명의 그래픽노블을 원작으로 한 <더 다이어리 오브 어 틴에이지 걸>은 팬시한 그래픽을 풍성하게 활용한다. 첫 데뷔작으로 감각적인 연출력을 선보인 마리엘 헬러 감독은 이 영화로 상영 전 오프브로드웨이 연극으로 상연됐으며 2015년 선댄스영화제 촬영상,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14플러스 대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후반작업 중인 두 번째 작품은 멜리사 매카시가 주인공을 맡은 <캔 유 에버 포기브 미?>로, 전기 작가이자 편지 위조범인 리 이즈라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또한 그는 캘리포니아의 동성결혼 합법화 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더 케이스 어겐스트 8>(2014)를 극화해 영화화하며, J. J. 에이브럼스 감독이 제작을 맡으며 데이지 리들리가 주인공인 스릴러 <콜마>의 메가폰 역시 잡았다. 블록버스터부터 소수자 이야기까지 폭넓게 그려낼 그의 차기작들이 기다려진다.

<걸스 로스트>

경계를 넘어

<걸스 로스트> 알렉산드라 테레세 카이닝

소녀가 마법의 약을 먹으면 소년이 된다? 이성애자들의 야릇한 호기심을 동하게 하는 판타지물이 아니니 오해 말자.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레즈비언 소녀들은 소년으로 변신해 여성의 신체를 갖고 있던 때와 달리 자신들에게 활짝 열려 있는 자유로운 세상을 누빈다. 정체성을 깨달아가며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하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걸스 로스트>(2015)는 2016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매진 행렬을 기록한 화제작으로, 퀴어 소재에 깊은 이해와 관심을 보여온 알렉산드라 테레세 카이닝 감독의 세번째 작품이다. 그는 의붓자매들이 사랑에 빠지는 퀴어 드라마 <키스 미>를 선보여 AFI페스티벌 관객상을 받기도 했다. 캐스팅 디렉터로 활동해온 그는 현재 미인대회에 출전하게 된 에디(안나 소피아 롭)에 대한 블랙코미디를 그린 <저스트 라이크 뷰티>의 프리 프로덕션 중이다. 젠더 정체성과 여성의 삶에 대해 꾸준히 탐구하는 그는 퀴어영화들마저 남성감독들이 전유하고 있는 이 시점에 주목해야 할 여성 퀴어영화 감독이다.

<걸 후드>

소수자들의 성장담

<걸 후드> 셀린 시아마

흑인 소녀들로만 구성된, 혹은 어린 톰보이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본 기억이 있는가? 좀처럼 그런 기억이 없다면, 셀린 시아마 감독의 <걸 후드>와 <톰보이>를 보자. <걸 후드>는 흑인소녀 마리엠(카리자 투레)과 세 친구들의 성장담을 그려낸 영화다. 가족, 학교, 모든 것이 어둡고 불행하기만 한 마리엠은 자유로운 세 친구를 만나 새 삶을 시작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갱단에 들어가 이름과 스타일을 바꾸며 주체성을 찾아나간다. <톰보이>는 소녀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남자라고 생각하는 10살 로레(조 에랑)에 대한 이야기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톰보이>로 2011년 베를린국제영화제 테디 어워드를 수상했고, <걸 후드>로는 2014년 칸국제영화제 퀴어 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소수자성과 관계성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 국립영화학교 라 페미스에서 시나리오를 전공했으며, 소년과 소녀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그린 <워터릴리즈>(2007)로 데뷔했다. 최근 센세이셔널했던 애니메이션 <내 이름은 꾸제트>(2016)의 각본을 써 2017년 세자르상 각본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젠더와 인종, 여성에 대해 그가 보여줄 새로운 세계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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