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이현경의 영화비평] <해빙>이 주는 원초적 공포
2017-03-23
글 : 이현경 (영화평론가)

이수연 감독은 <해빙>이 “앞에서 질문을 던지고 뒤에서 답을 제시하는” 구조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스릴러는 사건이 일어나고 조사 과정을 거쳐 사건이 해결되는 서사 구조를 갖고 있다. 이수연 감독은 ‘사건’이라는 말 대신 ‘질문’이라고 표현했다. <해빙>은 스타일과 스토리 모두 스릴러보다는 호러에 가깝다. 그러므로 ‘사건이 발생한다’보다는 ‘질문을 던진다’라는 문장이 어울린다.

호러는 인간과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질문하는 장르다. 스릴러가 사건의 인과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한다면, 호러는 설명되지 않는 서사의 잉여와 이성의 균열을 끌어안고 있는 장르다. <해빙>을 호러로 받아들일 때 서사의 모호함은 매력으로 작용하지만 스릴러라는 틀로 해석할 경우 사건의 설명이 미진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해빙>을 되짚어보면 감독의 말과 달리 답은 이미 처음부터 주어졌다. 연쇄살인, 시신 훼손과 유기의 범죄를 저지른 정육식당 부자는 자신들의 범행을 영화 초반에 이미 고백한다. 답지를 눈앞에 들고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진 상태, <해빙>의 원초적 공포는 거기서 비롯된다.

포정해우(庖丁解牛), 살인의 고백

정육식당 정 노인(신구)은 수면내시경 중 가수면 상태에서 자신이 저지른 살인에 대해 발설한다. “관절 아래에 칼을 넣고 싹 도려내”서 “팔다리는 한남대교에 몸통은 동호대교에 머리는 아직 냉동 창고”에 두었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내시경을 보던 의사 승훈(조진웅)은 정 노인의 실언 혹은 고백에 깜짝 놀란다. 정노인이 마취가 풀리는 과정에서 실언을 한 것인지 자신의 범죄를 고백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설령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온 말이라고 하더라도 정 노인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하다. 당황해하거나 불안한 기색이 전혀 없다. 이 장면과 정 노인의 아들 성근(김대명)의 말을 이어서 생각하면 이들 부자는 고의적으로 승훈에게 범행을 알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정 노인이 수면내시경을 한 날 저녁, 성근은 비닐봉지에 담긴 고기를 들고 승훈을 방문한다. 승훈의 원룸 식탁에서 벌어진 술자리에서 성근은 뜬금없이 ‘포정해우’라는 말을 아는지 묻는다. 성근은 승훈에게 고사성어의 의미는 알려주지 않고 <장자>의 ‘양생주편’에 나오는 말이라고만 설명한다. ‘귀신같은 솜씨’라는 뜻의 ‘포정해우’는 단어 그대로 하면 ‘요리사가 소를 해체한다’라고 풀이된다. 위나라 혜왕이 살아 있는 소를 순식간에 해체하는 요리사의 솜씨에 감탄했다는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대부분의 관객도 승훈처럼 고사성어의 뜻을 모른 채 어리둥절 지나가기 쉬운 장면인데, 실은 매우 중요한 고백이다. 성근은 아버지가 하던 정육식당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 현업에서 은퇴한 정 노인과 달리 성근은 늘 고기를 자르고 뼈를 분리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언뜻 들으면 자신의 발골 솜씨를 은근슬쩍 자랑하는 말 같지만 한 꺼풀 벗겨 생각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고백이다.

술판이 벌어지기 전 성근은 고기가 담긴 비닐을 들어 보이며 “사람 횡격막이에요”라는 농담을 건넨다. 성근은 승훈이 깜짝 놀라자 사람으로 치면 횡격막에 해당하는 소고기 안창살이라고 바로 정정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부터 거꾸로 유추하면 성근의 이 대사는 시신을 해체한 자신의 행위를 설명하는 말이 된다. 정 노인은 젊은 시절부터 살인을 해왔고 시신도 직접 처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일정 시기가 되어(아마도 성근의 첫 번째 아내가 가출한 시점) 노쇠한 정 노인 대신 아들 성근이 시신을 처리해 왔을 것이다. 정 노인은 마치 히치콕 영화 <싸이코>의 주인공 노먼 베이츠처럼 수십년간 몇명인지 가늠할 수도 없는 살인을 저지른 인물이다. 노먼 베이츠는 살인을 저지르는 엄마와 시신을 처리하는 아들이라는 분열된 자아를 한몸에 지니고 있었다. <해빙>에서 정 노인과 성근은 노먼 베이츠가 저지른 두 가지 역할을 분담해서 처리해온 것이다. 정 노인과 성근은 ‘귀신같은 솜씨’를 가진 요리사, 즉 ‘포정’이다.

환(幻)과 진(眞)의 자리바꿈

<해빙>에는 범인이 밝혀진 두개의 살인사건이 있다. 하나는 승훈이 50대 명동 사채업자 배 사장을 살해하고 한강에 유기한 사건이고, 하나는 정 노인이 승훈의 전처를 살해하고 성근이 시신을 처리한(했을) 사건이다. 화면에 제시된 살해 장면은 승훈의 전처를 우발적으로 살해하는 정 노인의 모습을 담은 블랙박스 영상 뿐이다. 정육식당 부자의 범행은 승훈의 악몽과 환각 속에서만 등장한다. <해빙>이 진짜 호러인 이유는 승훈의 환각이 사실은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승훈이 본 것 자체는 환각이었을 수 있지만 진실은 그 환각 속에 담겨 있다. 갈고리에 걸린 목 없는 여성의 시신 앞에서 발골용 칼을 가는 정 노인과 성근의 모습은 진실이다. 정육식당 냉동 창고 검은 비닐봉지 속에는 사람의 머리가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밤중 은밀한 장소에서 성근이 만들고 있는 다짐육의 정체도 미심쩍다. 정 노인이 말하는 “육회”라는 것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승훈은 정육식당 부자의 범죄를 확신하고 물증을 찾기 위해 애쓰면서도 경찰에 고발하지는 못한다. 자신이 저지른 한번의 살인과 프로포폴 불법투약 사실이 그의 발목을 옥죄고 있다. “답이 있는 것”이 좋아서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승훈은 막상 진실의 일면을 발견하고도 용기를 내지 못한다. 현실을 회피하고 진실을 억압하기 위해 승훈이 마련한 장치는 조 경사라는 허구의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조 경사는 승훈의 양심, 변명, 죄책감, 자기 합리화를 대변하는 내면의 자아이자 프로포폴 주사에 중독된 승훈이 보는 환각이다. 승훈은 자신의 정신과 상담의였던 남인수박사와 즐겨보던 추리소설 작가의 이름을 합성해 조 경사라는 허상을 만들어냈다. 현실을 망각하고 싶다는 욕망이 커지면 환각은 현실에 똬리를 틀게 되고 욕망이 극대화될수록 환각은 현실을 잠식한다. 처음에는 간간이 출몰하던 조 경사가 본격적으로 승훈의 일상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것은 승훈 주변에 심각한 위험이 발생하면서부터다. 전처와 아들이 위협에 처하자 승훈의 내적 갈등은 극에 달하고 승훈의 내적 자아인 조 경사의 목소리도 커진다.

승훈과 조 경사가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미장센만 으로도 조 경사가 허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조 경사는 화면에 뒷모습만 보이고 그의 정면 얼굴은 거울 안에 비친다. 붉은색 노끈으로 묶인 거울은 승훈의 내면이고 조 경사는 그 안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전처가 실종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승훈 앞에 나타난 조 경사는 “아내는 왜 죽였어?”라고 묻는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승훈은 강하게 부인하고 범인으로 정육식당 부자를 지목한다. 승훈은 경찰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함 때문에 주저한다. 결국 승훈은 아들이 위험해지자 조 경사에게 구조를 요청하는데 승훈이 실제로 전화한 사람은 바로 남인수다. 아들을 구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 승훈은 조 경사라는 허상이 아닌 현실의 존재를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마치 얼음이 녹아수면 아래 있던 시체가 떠오르듯이 현실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승훈이라는 개인의 진실은 밝혀졌지만 거대한 비밀과 음모는 여전히 결빙 상태인 채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