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진짜 배우 안성기
2017-04-12
글 : 이지윤 (비디오칼럼니스트)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展
<얄개전>
<바람불어 좋은 날>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매년 그해 주목할 한국 영화인을 집중 조명하는 특별전을 개최한다. 그동안 영화감독 김수용, 김기덕, 이만희와 영화배우 최은희, 윤정희 등이 영상자료원의 한국 영화인 특별전으로 관객을 만났다. 올해는 데뷔 60년을 맞은 영화배우 김지미와 안성기 특별전을 준비중이다. 그리고 이중 2017년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4월 13일(목)부터 28일(금)까지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展’이 열린다.

흔히 특정 감독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출연하며 그 감독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배우를 누구누구의 페르소나라고 말한다. 그래서 특정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는 배우는 곧 그 감독의 분신이기도 하다. 배우의 이미지는 감독과 겹치고, 이내 작품과 겹친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배우 장 피에르 레오는 유년기부터 장년기까지 긴 세월을 프랑수아 트뤼포의 작품들에 출연하며 그의 분신이 되었고 그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레오의 연기에서 트뤼포를 발견하고, 트뤼포에게서 또다시 그를 발견한다.

그런데 영화배우 안성기에게는 특정 누군가의 페르소나보다는 ‘한국영화의 페르소나’라는 수식어가 더욱 적절해 보인다. 그는 1950년대와 60년대, 19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를 관통하여 현재에 이르는 한국영화와 함께 성장한 배우이고, 그래서 그의 필모그래피는 거대한 한국영화사와 같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영화가 막 활기를 띠기 시작한 1950년대 후반에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를 통해 연기를 시작했고, 한국영화의 황금기라 불리는 1960년대를 함께 보냈으며, 1980년대의 ‘코리안 뉴웨이브 시네마’, 1990년대의 기획영화 시대와 함께 성장했다. 이 같은 영화적 성장이 자양분이 되어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가 대중적 폭발력을 지니게 되었듯, 영화배우 안성기가 이 기간 동안 쌓은 연륜은 2000년대를 지난 지금에 이르러 그의 연기 뿌리를 더욱 공고히 했다.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늘 변화무쌍했다. 때로는 소시민의 일상을 대변하고 때로는 역사의 무게에 고뇌하며, 때로는 예측 불허의 독특한 캐릭터를 창조했다. 그러나 그의 연기에서 과잉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캐릭터들을 ‘진짜’ 안성기인 양 덤덤하게 연기한다. 그리고 그 덤덤함 속에는 시대의 고민과 비애, 웃음과 해학이 넘쳐난다.

<축제>

그래서 130여편의 필모그래피에서 특별히 몇몇 작품만을 추리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기도 했다. 안성기라는 배우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별한 끝에 아역 시절의 연기가 빛나는 <모정>(감독 양주남, 1958)과 <하녀>(감독 김기영, 1960)를 비롯해 <바람불어 좋은 날>(감독 이장호, 1980), <고래사냥>(감독 배창호, 1984), <개그맨>(감독 이명세, 1988), <하얀 전쟁>(감독 정지영, 1992), <축제>(감독 임권택, 1996), <라디오 스타>(감독 이준익, 2006), <페어러브>(감독 신연식, 2009) 등 27편이 상영작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극히 일부의 작품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비교적 최근의 모습까지 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될 27편에는 그의 인생이 살아 있고, 나아가 한국영화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최고의 영화는 언제나 다음”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영상자료원이 그의 데뷔 60년을 축하하며 개최하는 ‘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展’은 그의 연기 인생 1막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여전히 그의 필모그래피는 2막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안성기의 연기 인생 1막을 들여다보자.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상영되는 모든 작품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것으로도 부족하지만 여기에서는 (조금의 사심을 담아) 상영작 중 일부를 소개한다.

모정 (감독 양주남, 1958)

아이는 없지만 의사인 남편(이민)과 단란한 가정을 꾸린 혜옥(조미령). 남편이 출장간 사이, 남편조차 존재를 몰랐던 그의 숨겨진 아들 신호(안성기)가 찾아온다. 혜옥은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끼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신호에게 점점 마음이 쓰인다. 어린 안성기는 <돼지꿈>(감독 한형모, 1961)에서 고무신 날리기 놀이를 하다 집 유리창을 깨먹기 일쑤인 개구쟁이였고, <언니는 말괄량이>(감독 한형모, 1961)에서는 왈가닥 큰누나(문정숙)의 신랑감 면접에 누구보다 신나하며 적극 동참하는 장난기 가득한 막내 동생이었으며, <월급쟁이>(감독 이봉래, 1962)에서는 가족들이 지켜야 할 일과표까지 만들어 벽에 붙이는 아버지(김승호)에게 볼멘소리를 할 줄 아는 거침없는 막둥이였다. 그런데 그의 아역 시절 작품 중 ‘안성기展’에서 상영하는 <모정>은 조금 특별한 위치에 놓인 작품이다. 엄마 품을 떠나 생전 처음 보는 아버지, 새엄마와 함께 살아야 어린 신호가 느끼는 두려운 감정이 어린 나이에 움츠러든 어깨와 깊기만 한 눈망울을 통해 배어난다. 성인이 된 후에 안성기가 다양한 영화들에서 보여준 수많은 역할들과 그 속에서 어떤 대사보다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그의 표정들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가 <모정>에서 보여준 그것의 연장이기도 하다.

고래사냥 (감독 배창호, 1984)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차인 후 좌절감에 가출한 병태(김수철)는 우연히 비렁뱅이 민우(안성기)를 만나 자유로운 듯 보이는 그를 따라 길을 나선다. 이곳저곳 유랑하던 그들은 한 윤락가에서 손님 받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구타당하는 벙어리 여인 춘자(이미숙)를 만나고, 그녀의 잃어버린 말과 고향을 찾아주기 위해 함께 귀향길에 오른다. 1980년대, 암울했고 그래서 조금은 답답했던 시기에 안성기가 연기한 민우는 소탈하고 자유로운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연기는 출구 없어 보이는 꽉 막힌 현실에 청량한 해방감을 전달한다.

개그맨 (감독 이명세, 1988)

스스로를 천재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하는 삼류 카바레 개그맨 이종세(안성기), 영화배우가 꿈이라는 변두리 이발소 주인 문도석(배창호), 건달들을 피해 극장에 들어와 혼자 영화를 보던 종세에게 느닷없이 키스를 하는 오선영(황신혜). 종세는 우연히 실탄과 총을 얻게 되는데, 선영은 진짜 걸작을 위해 은행을 털자고 제안하고, 평소 어리바리한 도석은 영화 작업이라는 종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동참한다. 감독과 배우의 관계로 만나 돈독한 우정을 쌓아가던 배창호 감독과 배우 안성기가 이 영화에서는 주연배우로 만났다. 그런데 영화 속 영화(로 위장한 은행털이)에서 이들의 관계는 전복된다. 안성기가 연출가로, 배창호가 배우로 바뀌면서 현실과 허구는 미묘하게 뒤틀린다.

하얀 전쟁 (감독 정지영, 1992)

안성기의 덤덤한 표정으로 재창조된 영화 속 소설가 한기주는 역사의 무게에 고뇌하는 지식인이다. 베트남전 참전의 후유증을 앓으며 살아가는 소설가 한기주. 박정희 정권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한기주는 한 시사잡지에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기고하면서 점점 10년 전의 악몽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남성적이고 용맹스러운 전쟁을 상상했는데, 파병 초기에는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나 점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며 그는 현재의 베트남에서 어릴 적 그가 목격한 한국전쟁을 떠올린다.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양민들이 학살되고 부대원들은 총알받이가 되어가는 등 전쟁의 악몽에 시달리는 안성기의 얼굴에서, 미소는 점점 사라지고 초점 잃은 시선과 무표정만이 남는다. 이번 ‘안성기展’의 개막작이기도 한 이 영화는 안성기가 직접 추천한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이번 특별전에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최근 4K로 디지털 복원한 버전이 첫 상영된다. 필름 위에 쌓였던 오래된 먼지를 벗어내고 4K 디지털로 재단장한 <하얀 전쟁>을 스크린으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다.

투캅스 (감독 강우석, 1993)

한국형 버디무비의 대표작품이라 할 수 있는 <투캅스>는 안성기와 박중훈의 조합이 가장 빛나는 영화이다. <칠수와 만수>(감독 박광수, 1998) 후 5년 만에 영화에서 재회한 안성기와 박중훈은 코믹한 터치로 한국 사회의 현실을 풍자한다. 불법을 적당히 눈감아주며 능청스럽게 세상사에 적응해 살아가는 형사(안성기)와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새로 부임한 강직한 신참 형사(박중훈) 사이에는 시종일관 마찰이 끊이지 않는데, 이들 사이에 폭발하는 ‘케미’는 안성기와 박중훈의 연기 덕에 더욱 빛을 발한다. 더욱이 현대인들의 지질함을 대변하는 부패경찰 조 형사는 안성기가 창조해내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통해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로 재탄생했다.

박봉곤 가출사건 (감독 김태균, 1996)

가부장적이고 다혈질적인 남편과 늘 다투던 박봉곤(심혜진)은 결국 가출을 단행한다. 그러나 봉곤의 가출이 이웃까지 소문나자, 남편은 ‘집 나간 마누라를 찾는 전문가’ X(안성기)를 고용한다. X는 봉곤의 집에 머물며 치밀한 추적 끝에 봉곤의 일기장을 입수하는데,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다 그녀의 천진난만한 감수성에 빠져든다. 안성기가 연기하는 X는 좋게 표현해 ‘전문가’지, 사실상 흥신소 사람에 가깝다. 그러나 안성기는 X라는 캐릭터에서 ‘흥신소 사람’의 전형성을 깨어버렸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과묵한 표정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X의 선글라스 너머에는 어리석을 정도로 순수한 눈빛이 숨겨져 있다. 그의 선글라스는 흥신소 사람이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착안한 위장술 같다. 안성기에 의해 탄생한 X는 배우의 서글서글한 눈빛과 함께 감수성 충만한 인물이 되었다.

라디오 스타 (감독 이준익, 2006)

말 많고 탈 많은 왕년의 스타 최곤(박중훈)을 묵묵히 지켜주는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자기 스타’를 위해 한없이 헌신하는 <라디오 스타>의 민수가 짓는 표정은, 딱 배우 안성기의 것이기도 하다. 주름과 함께 얼굴에 퍼지는 민수의 미소는 자기 스타의 남모를 슬픔을 달래고 아픔을 위로하고,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었다. 또 그의 미소에는 자기 스타보다는 좀더 많이 살았고 그래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조금 더 알기에, 상대방의 아픔을 말없이 포용하고 위로할 수 있는 넉넉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지 <라디오 스타>에서 그가 보여주는 민수의 표정은 한국영화의 희로애락을 몸소 경험한 배우 안성기의 진짜 표정 같다.

페어러브 (감독 신연식, 2009)

20대 젊은 여성과 50대 중년 남성의 사랑이란 어떤 모습일까. 50살이 넘도록 연애 한번 못해본 노총각 형만(안성기)과 그에게 사기 친 친구의 딸 남은(이하나)의 사랑은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시작한다. 형만은 친구의 사기 때문에 모아둔 돈을 모두 날리고 사진 작업실에서 생활하는 현재가 가끔 짜증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친구가 죽으며 유언처럼 남긴 말, 자기의 하나뿐인 딸을 가끔씩 들여다봐달라는 말이 괘씸하다. 그렇지만 형만은 젊은 친구들과는 사뭇 다른 남은에게 점점 마음이 가고, 아빠의 절친한 친구인 형만에게 의지하게 된 남은 역시 다른 아저씨들과는 다른 형만에게 관심이 생겨간다. 조금 다르게 시작한 이들의 관계지만, 연애 과정은 남들과 다르지 않다. 알콩달콩하다가도 남은이 다른 남자와 있는 걸 보면 형만은 질투심에 사로잡히고, 둘이 사소한 의견 충돌로 말다툼을 하고, 상대방이 떠날까봐 가슴 졸이는 평범하지만 ‘어려운’ 연애. 영화 속 안성기는 무난하고 덤덤하게 형만을 연기하지만, 그의 연기에는 50살이 넘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설레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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