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최은영의 영화비평]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보여준 홍상수 영화의 변화
2017-04-13
글 : 최은영 (영화평론가)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는 홍상수의 필모그래피에서 조금 다른 지점에 놓여야 할 영화다. 이 영화에는 기존의 홍상수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몇 가지 숏이 등장한다. 영희(김민희)가 지영(서영화)과 함께 독일에서 시간을 보내는 1부의 초반,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초록빛 언덕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영희와 지영을 찍은 익스트림 롱숏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성(박홍열)이 화면을 가로질러 언덕을 올라 그녀들에게 시간을 묻는다. 이 장면에서 그림 같은 구도와 강렬한 초록색은 인물들을 압도하며, 건조한 홍상수 영화의 화면에서 볼 수 없었던 미학적 감흥을 자아낸다. 또 다른 장면. 영희가 공원 호수에 놓인 다리에서 절하는 숏 다음 바로 등장하는 호수의 수면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보여주는 숏은 슈베르트의 낭만적인 음악과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그림 같은 정경으로 펼쳐진다. 카메라는 느리게 팬하여 벤치에 앉아 있는 영희와 지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회화적인 구도의 숏은 2부에도 등장한다. 영희의 꿈이 시작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에 배치된 동일한 형태의 두숏. 숏과 수평이 되는 자세로 등을 보이고 누운 영희의 뒷모습과 그 너머로 펼쳐지는 파도치는 바닷가의 풍경은 그 자체로 액자 속 그림처럼 안정된 구도로 보여진다. 이는 기존의 홍상수 영화들이 보여주는 실용적인 화면 구도, 풍경이 전달하는 심상을 최대한 배제하는 건조한 화면의 법칙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숏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숏은 2부에서 여러 번 영화 속 휴지부처럼 등장한다. 창문 너머로 멀리 파도치는 바다를 보여주는 숏은 친구들과 호텔을 찾은 영희가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별다른 의미 없이 짧게 등장하지만, 내러티브에 복무하지 않는 이 장면은 이상한 잔상을 남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홍상수의 전작들에 비해 감각적인 이질감을 주는 까닭은 바로 홍상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낯선 장면들 때문이다. 전례 없이 미학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이러한 숏들은 이전에 홍상수 영화들이 의도적으로 피했던 심미적인 효과를 획득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영화 속 주체의 감정, 시선의 차이와 무관하지 않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주인공 영희는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의 세계에 진입한 최초의 여성이다. 영화에서 일어난 모든 만남들은 영희의 시선 아래 해석되고, 그녀의 마음 상태에 따라 전개된다.

홍상수 영화에서 남자주인공들은 욕망이 끊임없이 발가벗겨지고 냉정한 시선으로 조롱당하는 반면,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영희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자신의 내면으로 흡수하며 이러한 내적 지향성은 영화 속 풍경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여성 내면의 풍경과 조우하는 영화의 풍경

영희는 주변 인물들과 어울리면서도 그들과 교류하는 대신 유부남과의 사랑이 가져다준 씁쓸한 감정에 몰두해 있으며, 자기 자신으로 끊임없이 침잠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이전에 없던 풍경숏들이 보여주는 감상성은 이러한 영희의 내면을 드러내는 장치이며, 영화에서 영희가 마주치는 사람들 또한 그녀의 감정적 논평에 의거하여 해석된다. 1부 지영과 영희가 지영의 지인인 폴을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영희는 지영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폴의 안색을 살피는데, 그를 처음 보자마자 폴의 얼굴빛이 빨개져 있고 아내에게 쥐여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커플을 바라보는 영희의 비판적인 시선은 2부에서 다시 반복되는데, 애인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선배 명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영희는 그의 얼굴이 까매졌고, 늙어 보인다고 한다. 영희의 눈에 두 남자는 모두 현실에 짓눌려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 인물로 보인다. 그녀라는 필터를 통과하여 굴절된 세계를 보는 것처럼, 영화 속 세계와 그녀는 서로를 향해 수렴하는 것이다. 영화의 풍경은 곧 주인공 영희의 내면의 풍경을 이루고, 영희의 마음속 혼란과 다짐은 영화에서 다른 인물들과의 만남과 대화로 투사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영희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게 되는 까닭은 그녀야말로,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세계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이자 영화 속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유일한 동인이기 때문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행위와 사건을 대체하는 심상의 주체는 영희이며, 그녀는 영화 속 사건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캐릭터가 아니라 영화 전체의 작동방식을 주조한다. 이는 기존 한국영화 캐릭터, 특히 대개 수동적으로 사건에 종속되는 여성 캐릭터에게서는 보기 힘든 것이다.

여성의 시선이 확장된 영화

1부와 2부에 걸쳐 등장하는 검은 옷의 남자는 홍상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또 하나의 낯선 요소다. 그는 현실에서 판타지로 위계를 옮겨가며 영희의 심리 상태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1부에서 영희와 지영에게 느닷없이 시간을 묻는 검은 옷의 남자는 영희와 지영이 공원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 다시 등장하고, 지영과 영희는 그를 피해 공원을 떠난다. 위협적인 방식으로 두번 등장한 남자는 1부의 마지막 해변 장면, 현실의 인물에서 영희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안감의 형상으로 변모한다. 지영이 같이 온 폴 부부를 부르러 가는 장면에서 영희는 바닷가쪽으로 사라지고, 지영과 폴 부부가 이야기를 나눈 후 카메라가 영희가 있던 바닷가를 다시 비추자 영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카메라가 화면 왼쪽으로 팬을 하면, 마치 죽은 듯 축 늘어진 영희를 검은 옷의 남자가 둘러메고 걸어가는 모습이 숏의 후경에 조그맣게 보여진다. 남자가 등장하기 직전 영희가 사라진 텅 빈 바닷가는 불길하며, 뒤이은 이 장면은 남자를 현실에서 몽상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동시에 영희의 상징적인 죽음을 암시한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무너뜨린 이 남자는 2부 강릉에서는 아예 현실 바깥에 놓이는데, 영희가 친구들과 머무는 강릉의 호텔 베란다에 다시 등장한 그는 필사적으로 유리창을 닦고 유령처럼 초현실적인 존재로 남는다. 더러운 것들을 지워내고 순수하고 깨끗한 형태로 남고 싶다는 영희의 마음은 유리창을 닦는 남자의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사랑을 잃고 공허한 영희는 자신을 다시 채워가려고 애쓴다. 영화에서 영희는 허기와 갈증을 느끼고, 배고픔과 관련된 수많은 대화들이 반복된다. 1부 폴의 집에서 밥을 먹기 전 영희는 지영이 건넨 물을 들이켜며 맛있다고 감탄하고, 식사 자리에서 파스타 접시를 깨끗이 비우며 매우 매우 배가 고팠다는 말을 반복한다. 이는 그녀의 허기가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정신적인 허기는 책에 대한 영희의 허기와도 연결된다). 파스타를 먹고, 악보를 사고, 빌려준 돈을 되찾는 여정을 통해 영희는 조금씩 스스로를 채우고 변화하려는 인물이다. 홍상수 영화의 중심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이동하면서, 여성의 시선은 점차적으로 확장되고 강화된다. 이는 전작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영수(김주혁)가 민정(이유영)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이전의 홍상수 영화의 남녀 관계가 봉착했던 불신의 영겁회귀를 넘어서는 깨달음으로 끝을 맺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는 남성의 시선이 부재한 영화 전체를 장악하며, 남녀 관계에서 벌어지는 위선의 소용돌이를 벗어나 조금씩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인물이다. 이를 영화가 보여주는 풍경이 여성을 중심에 놓았을 때 일어나는 변화로 해석한다면,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 영화뿐만 아니라 한국영화 속 여성 캐릭터가 영화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의 또 다른 지평을 여는 작품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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