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가스파르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과 필립 그랑드리외의 <새로운 삶>
2017-04-13
글 : 박수민 (영화감독)
<돌이킬 수 없는>

오래전 영화학교에서 장률 감독의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자연스러움’을 좋아하지 않아요.” 감독은 서사의 관습으로 조작한 진실에 거부감을 가지고 내러티브를 감각으로 포장하는 것을 의심했다. 연출자로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민하던 나는 “나의 스타일은 나의 호흡, 이것이 진정성”이라는 감독의 말에 고무되었다. 영화는 자신의 감정, 곧 관객에게 전하는 연출가의 감정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영화는 허구”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허구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까지 반복적인 현실을 만들지 못해 안달한다. 관객은 극장에서 두 시간의 기승전결 말고 다른 스타일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영화가 서사 드라마가 아닌 하나의 순수 예술품으로 보였던 개인적 경험. 20세기 후반에 태어나 21세기를 사는 내게 처음으로 각인된 작품은 훗날에 본 고전들 이전에 가스파르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2002)이었다. 극장에서 관객이 욕설을 내뱉으며 영화 중간에 자리를 떴다. 섹스와 폭력을 보러왔고 그래서 영화가 그것을 철저히 보여주고 있음에도 관객은 거부하고 도망쳤다. 처음 악명 높은 소화기 장면에서 두서너명이 나갔고, 이후 지독한 강간 장면에서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나머지도 나가버렸다. 극장에 남은 관객은 나뿐이었다. 내가 사는 시대에, 그냥 평범한 극장에서, 영화를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관객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혼자 남은 나만 마지막을 보았다. 영화는 작위적으로 시간을 거꾸로 배열해놓고선 당차게도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멋대로 선언해버렸다. 그것은 내게, 21세기에 처음 본 예술이었다. 영화보다는 현대미술 같았다.

노에의 전작 <난 혼자다>(1998)와 <카르네>(1991)에서 영화 중간에 사이렌과 카운트다운으로 경고하고, 곧바로 소의 목을 자르는 감독의 스타일은 확실히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관객을 끊임없이 고문하고 괴롭힌다. 관객을 불편하게 해서 얻는 것이 뭘까? 영화의 폭거, 예술 테러의 명분이 무엇인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극약처방. 말문이 막히므로, 굳이 떠들 필요 없는 진실로의 의지.

<돌이킬 수 없는>은 영화의 서사에 대해 실험하지만 필립 그랑드리외의 <새로운 삶>(2002)은 서사를 배반한다. 아니, 무시한다. 관객은 이 영화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주인공으로 보이는 미국인 청년이 있고, 섹스와 폭력이 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어떤 이유로 일어났고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알 수 없다. 누군가가 개에게 뜯어먹히는데 명확한 이유와 논리를 알 수 없다. 주류영화의 오랜 이분법인 착한 놈과 나쁜 놈, 기본적인 피아 식별도할 수 없다. 기승전결의 세계는 완전히 엿 먹는다. 관객은 하나의 서사를 보지 못하는 대신 뭔가를 경험한다. 감독의 의지를 체험한다.

<새로운 삶>

극장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토해내는 관객의 기분 나쁨, 기분 더러움. 감독이 그의 주관과 의지로 해체하고 변형하고 재구축한 세계의 시청각적인 괴롭힘 때문이다. 관객이 보는 것은 감독이 선택한 그림들이고, 그가 정보를 주지 않기에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오직 주관만이, 감정만이 가득하다. 지글거리고 윙윙거리는, 극도의 불안감을 일으키기 위해 철저히 의도된 사운드 디자인속에서 카메라는 바이브레이터처럼 주인공이 광란하는 만큼 떨린다.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섹스와 폭력 앞에서 관객은 플롯이나 내러티브나 주인공, 그 어디에도 자신을 두고 맡길 곳이 없다. 궁금증과, 그 의문이 끝내 해소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 관객은 길을 잃는다. 영화는 점점 영화가 아닌 무언가가 되어간다. 그것은 일종의 앰비언트 테크노의 이상한 뮤직비디오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 영화가 영화를 초월하자 동영상이 된다.

우리는 에이펙스 트윈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의 음악은 기승전결도 없고 제목은 곡의 내용과 별로 연관이 없다. 그저 미칠 듯 쿵쾅거리는 루프나 이상하게 윙윙거리기만 하는 노이즈만 있다. 멜로디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 어쩌다 가사가 붙어도 “아빠에게 오너라, 네 영혼이 필요하단다”라고 반복할 뿐 의미 불명이다. 우리가 트랜스 음악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몸을 흔들기 위한 루프의 반복과 그 결과인 무아지경이 필요할 뿐, 그것은 논리와 이성의 세계가 아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미치기 시작하고, 관객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을 경험한다. ‘시네트랜스’ (Cine-Trance)에 도달한다.

영화란 환각이다. 극장의 어둠은 무의식을 위한 공간이고, 영화를 보는 것은 일종의 제례(ritual)다. 정지화면이 연속하여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건 눈의 착각, 환상이다. 이미지는 권력과 공포와 전율이 실재하는 형상이고, 자발적으로 굴복할 준비를 하고 극장에 들어온 관객은 눈을 감거나 떠나지 않는 한 저항할 수 없다. 이미지에 자극받은 무의식은 작품 저편의 의미를 모르는 사이에 흡수한다. 영화를 경험하는 것은 고립당하는 것이다. 수면과 각성 사이에 있는 관객은 저항할 수 없다. <새로운 삶>에서 메시지나 의미를 묻는 일은 무의미하다. 우리는 불안과 공포와 미칠 듯 교란되는 기분과, 이도저도 아니라면 불편함을 경험했으니 되었다. 이 영화는 일종의 ‘해프닝 아트’ 같은 것이고, 경험하는 순간 목적을 달성한다. 백남준에게 피아노를 왜 때려 부수었는지 물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음악을 들었고, 연주는 끝났다.

나는 의미 대신 <새로운 삶>에서 인간이 더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경지와 그 경지에서 오는 공포를 생각한다. 인간을 가축처럼 사고 팔고 일방적인 섹스와 폭력으로, 하나의 살덩어리처럼 취급하던 인간들은, 영화에서 어느 순간 이미지적으로 개와 별반 다르지 않게 된다. 개가 인간을 뜯어먹었듯이, 인간 또한 인간을 뜯어먹고 입에 피를 묻히고 포효한다. 인간의 격, 인격은 완전히 거절당한다. 매력적인 외모의 여성이 나오지만 로맨스는 기대할 수 없다. 칼로 머리칼을 잘린 여자는 괴물 같은 남자들에게 차례로 일방적인 폭력을 당할 뿐이다. 그 얼굴에 미성년의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던 미국 청년도 인간의 세계를 거의 떠난 듯이 보이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는 그가 강간하듯 섹스하는 매춘부의 인간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다만 “닥쳐!”라고 끝없이 외친다. 관객도 “그만둬, 미친 새끼야!”라고 소리치고 싶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라예보의 풍경, 밀집한 회색 아파트의 기계적인, 비인간적인 차가움은 그런 공포를 극대화한다. 공간의 역사적인 의미까지 생각한다면 오버일지 모르지만, 사라예보는 제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곳이다.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인간성을 잃었다. 대량학살 이후에도 우리는 시를 쓸 수 있는가? 20세기에 어쩌면 인간의 문명은 이미 끝났고, 21세기는 그저 종말을 향한 길목에 불과할지 모른다. 21세기에 시를 쓴다고? 우리는 그저 기계가 만들어내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의 전자음악을 틀어놓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섹스하거나 춤을 추어야 할 뿐이다. 내겐 어쩐지 웨인 왕의 괴작 <센터 오브 월드>(2001)의 진짜 하드코어 버전으로 보이기도 하는 <새로운 삶>. 이 영화가 전하려는 공포와 불안은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새로운 삶’이라니, 그런 것은 우리에게는 있을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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