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김소희의 영화비평] <투 러버스 앤 베어>와 함께한 특별한 북극 탐험기
2017-04-18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영화를 관람하기 전 참고한 <투 러버스 앤 베어> 후기들은 유독 곰에 관해서만은 할 말이 많지만 애써 줄인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관람 후에야 이런 반응의 이유를 즉각 이해했다. <투 러버스 앤 베어>의 난감함은 곰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데서 비롯된다. 영화 정보에 곰 목소리 담당 배우 정보가 버젓이 나와 있으니 딱히 스포일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실사영화에 말하는 곰이 등장했대도 놀랄 일은 아니다. <패딩턴>(2014)에서 인간처럼 옷 입고 말하는 곰을 만난 바 있으며,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라이프 오브 파이>(2012)처럼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결합해 인간과 가림막 없이 자리한 맹수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화된 동물이 등장할 때 영화 자체의 성격이나 장르가 그에 맞춰 판타지나 애니메이션, 아동물 등으로 조종되거나 분류된다면 <투 러버스 앤 베어>는 이와 달리 장르 특정이 불가능한 리얼리즘 영화로 굳건히 남는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것은 매한가지인데 왜 어떤 영화는 판타지가 되고, 다른 영화는 리얼리즘 영화로 남을까. 단순히 정도의 차이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말하는 곰보다 더 큰 판타지가 어디에 있을까.

위라세타쿤의 정글이 북극으로 변한다면…

<투 러버스 앤 베어>는 큰 사건이랄 것이 거의 없고 장면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그저 장면과 장면, 숏과 숏의 관계를 상상하며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숏을 따라가다 보면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숏을 만나게 된다. 때로 이것은 앞선 숏이 준 느낌을 전복하거나 보충한다. 북극곰이 등장하는 장면을 복기해보자. 북극곰은 로만(데인 드한)에게 나타나기 이전에 단독자로 처음 등장한다. 북극곰 인서트는 로만이 탄약을 구매하는 숏과 맞붙어 등장하는 탓에 관객에게 불안감을 일으킨다. 곰이 몸을 털고 일어나 마을쪽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가 곧 마을로 내려오리란 걸 예고하는 것 같다.

이후 마을에 총성이 울렸다는 제보가 도는데 알고 보니 로만은 버려진 고철 더미를 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곰이 로만에게 말을 건네며 어둠 속에서 어슬렁어슬렁 등장하는 순간, 그간의 긴장은 일시에 해소된다. 그러나 이후 둘만의 여행을 떠나게 된 로만과 루시(타티아나 마슬라니) 앞에 곰이 등장해, 곰과 루시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불안의 감정은 다시 복기된다. 말하는 곰이라는 설정은 비현실적일지라도 곰이 등장하는 방식은 극적 강세를 찍는 것과는 무관하고, 곰을 대하는 인물들의 반응 역시 현실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판타지를 동반할지라도 여전히 리얼리즘에 기반을 둔 영화라 여겨지는 이유다.

그런데 곰의 음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우리가 판타지라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현실과 맞닿아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곰의 음성은 인간의 목소리가 그렇듯 곰의 내부에서 울려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로만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인지 모호하게 처리된다. 곰과 로만의 대화가 끝난 직후 그때까지 시야에 가려졌던 마을의 소년이 등장해 “곰이랑 말해요?”라고 로만에게 묻는데, 소년의 반응만으로는 소년에게 곰의 음성이 들렸는지 알 수 없다. 오직 곰과 대화하는 듯한 로만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어 로만이 루시와 문자를 주고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는 이것을 보이스오버로 처리해 마치 연인들이 실제 음성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문자 텍스트를 화면에 보여주는 대신 음성으로 대체하는 기법은 영화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장면이 보이스오버로 처리됐을 곰의 음성과 맞붙어 있기에 낯선 느낌을 불러온다. 문자를 보며 보낸 사람의 말투를 느끼는 일상적인 행위가 곰의 음성을 듣는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행위와 멀지 않을 수 있음이 그 순간 드러난다. 이 작품이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구분 자체에 질문을 던지는 영화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기왕 기시감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하나의 기시감을 덧붙이는 것이 허용되리라 믿는다. 일상에 틈입한 비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존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경험을 한 것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에서였다. 위라세타쿤의 <열대병>(2004)에서 유령은 동물이나 인간의 형상을 띤 채 출몰한다. 무전기, 엑스레이 등 기술 문명 장치들은 유령을 형상화하는 영화 장치와 긴밀한 관련하에 등장한다. 원시적인 것과 기술 문명, 나아가 비존재와 존재가 뒤섞이며 소요하는 그의 영화를 마주하고 있으면 우리가 기술 문명으로 인해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된 행위의 낯선 측면을, 다른 시공간의 순수한 시지각으로 투명하게 바라보게 된다. <투 러버스 앤 베어>를 가만히 떠올리다가, 어쩌면 위라세타쿤의 정글이 북극으로 변한다면 이런 영화가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플라톤도 울고 갈 기막힌 동굴의 우화

위라세타쿤에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와 파열 자체가 중요했다면 킴 누옌에게는 외부와 내부의 소통과 연결이 더 중요해 보인다. 말하는 곰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숏은 눈 덮인 땅이 일어나는 원경 숏이다. 이 숏은 로만이 루시와 다툰 뒤 권총 자살을 기도하는 장면 사이에 인서트로 삽입된다. 일단 이 인서트가 실재인지 환영인지, 환영이라면 누구의 환영인지 모호하기만 한데, 비슷한 장면이 후에 등장하면서 이에 관한 단초를 얻게 된다. 눈보라를 피해 얼음 구멍에 겨우 몸을 숨긴 로만과 루시가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잠시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 루시의 숨소리에 맞춰 오르내리는 눈밭의 상하운동을 얼마간 보여준다. 이 순간 외부의 모든 풍경은 그저 이 두 사람과 함께 호흡하는 내부의 물질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로만이 루시를 위해 아버지의 환영이 출몰한 군사기지를 태워버린 행위에도 이같은 설명을 붙일 수 있다. 군사기지는 루시의 머릿속에 자리하는 어두운 기억이 외화된 하나의 물질과도 같다.

마지막에는 영화가 이제까지 보여준 공간이 실재하는 것인지를 의심하게 할 만한 장면이 등장한다. 꽁꽁 얼어붙은 로만과 루시가 한 덩이의 얼음이 되어 헬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바다를 횡단한다. 이때 두 사람의 얼어붙은 형태가 마치 곰의 형상처럼 보인다는 점은 이미 여러 번 지적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장면에서 영화의 처음, 두 사람이 얼음을 뚫어 낚시하던 때를 불현듯 떠올렸다. 얼음 밖에서 물고기를 낚던 루시와 로만이 이제는 얼음 속 물고기가 되어 밖으로 건져진 것만 같았다. 로만과 루시가 얼어붙은 마지막 모습이 죽음의 비극성과 멀어 보였던 이유는 그들이 이제 막 세상 밖으로 건져진 탄생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마음이 반영된 그날의 날씨와 풍경이 유난히도 쨍하게 느껴지기에 그 순간 천국을 상상한대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제 우리가 세상 밖으로 나갈 차례다. 돌이켜보면 우리를 안내한 카메라 역시 하나의 외화된 물질처럼 루시와 로만을 위해 구축되어 있었다. 크레바스에 발이 낀 로만이 루시에 의해 구출되는 순간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어떤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곧 그 노래는 외화면 삽입곡으로 전환되어 관객의 귀에 들린다. 그런데 화면 속에서 루시의 스노모빌 뒤에 탄 로만이 마치 관객의 귀에 들리는 음악을 자신도 듣고 있는 듯이 고개를 까딱이고 손으로 다리를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는 것이 원경으로 보인다. 그 순간 우리 귀에 들리는 음악이 어디에서 흘러나오고 있는지 혼란스러워진다. 어쩌면 카메라 역시 로만과 루시의 내부에서 만들어낸 물질이었으며 관객인 우리는 오직 그들이 만든 세상 속에서 그들이 만들어낸 심상을 보았을 따름이었는지도 모른다. 플라톤도 울고 갈 기막힌 동굴의 우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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