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송형국의 영화비평] 고독과 소외의 시대에 <어느날>이 보여주는 구원의 방식
2017-04-25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어느날>과 <싱글라이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혼자들의 시대다. 1인 가구가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4분의 1을 넘은 지 오래고(2015년 1인 가구 비중 27.2%), 2045년에는 36%로 늘어난다는 게 최근 정부 추계다. 한발 앞서 나 홀로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 일본은 1인 가구 비중이 이미 3분의 1을 넘겼다. 고독사는 날로 증가하고 있는데(2011년 대비 2015년 증가율 179%), 눈에 띄는 건 고독사하는 연령과 소득층 분포가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시복지재단 조사에 따르면 무연고 사망자 중 69%가 60살 미만이고 무연고 의심 사망자가 가장 많은 지역은 강남구였다. 더이상 고독사가 저소득 독거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김정연의 만화 <혼자를 기르는 법>에 나오는 한 독거 여성은 자신이 키우는 거북이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제가 죽으면 얘가 상주예요.”

연결이 개인을 가두는 현대의 고독

혼자들의 이야기가 잇따른다. 기러기 아빠이자 증권사 지점장(이병헌)의 고독사를 설정 삼은 <싱글라이더>(2016)에 이어 <어느날>(2016)은 아내를 잃은 보험사 과장 강수(김남길)가 무연고 뇌사환자 미소(천우희)의 사고 경위를 조사하는 데서 출발한다.

두 영화 사이에 공통점이 여럿이다. 극 전면에 영혼을 등장시켜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인물의 속을 들여다보고, 주인공들의 직업을 금융자본의 맨 앞줄에 세우며, 낯선 타인으로 만난 남녀 주역 사이에 로맨스를 끼워넣지 않았다.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스스로 고장났음을 고백한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자국이기주의, 신자유주의와 신보호주의의 모순된 공존, 그 틈바구니에서 각자도생이 대세가 된 시절에 고독과 소외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고도로 개방되고 연결된 세상에 우리는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이들 영화는 묻고 있다. <피로사회>를 쓴 한병철 교수는 최근 저서 <타자의 추방>에서 이렇게 답한다. “과잉소통이 ‘너’뿐 아니라 ‘가까움’도 파괴한다. 관계가 연결로 대체된다. 침묵은 언어지만, 과잉소통은 그렇지 않다.” 조금 쉬운 어휘로 고쳐 다듬으면 <싱글라이더>나 <어느날>의 홍보문구로 삼아도 될 법한 이 말은, 세계적으로 넘쳐나는 ‘연결’이 개인을 가두고 있음을 적시하고 있다. 이것이 두 영화의 출생 배경이다.

고가도로 교각과 차량들로 강수를 포위하듯 첫 장면을 시작한 <어느날>은 드넓은 보험사 사무실 소음에 그를 가두며 고립을지속시킨다. 연기처럼 세상을 뜬 아내의 빈자리에 술잔 대신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댕겨 올려보지만 아픔을 공유할 사람은 없다. 얼핏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감독 케네스 로너건, 2016)가 떠오르는 강수의 이같은 고립은, 차마 대면할 수 없는 그의 기억 속에서 강요가 아닌 자의에 의해 이뤄진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돈을 끌어모으는 보험사의 속성처럼 그의 마음은 공허하다. 실적만을 강요하는 회사 팀장은 어려운 일을 시킬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마초적이고 대기업스럽게 ‘사랑’이란 말을 오염시킨다. 이처럼 강수가 처한 상황과 환경을 묘사하는 영화의 초반부는 현대인의 고독에 대한 이윤기 감독의 영화적 정의이기도 하다.

시각장애인인 미소는 4살 때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지만 복지시설에서 결코 외롭지 않게 살아왔다. 불의의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 미소는 영혼이 되어 떠도는데,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대신 세상이 자신을 볼 수 없게 됐다. ‘타인이 보지 못하는 나’의처지는 사무실에서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환경미화원이나 정규직들의 안전(眼前)에 없는 비정규직처럼, 시스템이 만들어낸 소외의 표상(presentation)이다. 영혼 상태의 미소가 복지관 절친의 결혼식을 찾아가는 대목은 극 흐름상 밝은 어조로 연출됐지만, 결혼하는 친구에게 축복을 전하지 못하는 더없이 쓸쓸한 장면이다. 그래서 미소는 강수의 손을 빌려서라도 자신이 왔음을 알리고 싶었다. 알고 보면 미소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수소문해 잘 살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 찾아갔다가 거듭 버림받은 다음 변을 당했다.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나는 타인과 마주함으로써 내가 된다”고 했듯 자아는 타인과 시선을 주고받는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 미소는 육체뿐 아니라 ‘나’를 잃은 존재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소가 강수의 눈에만 보인다는 설정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강수 아내가 미소와 비슷한 경위로 숨졌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스스로를 가둔 강수가 타의에 의해 갇힌 미소를 ‘본다’. <타자의 추방>의 말을 좀더 빌려보자.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소외가 생기고 있다. 그것은 더이상 세계나 노동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 파괴적인 자기소외, 즉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다. 이 자기소외는 다름 아닌 자기최적화 및 자기실현과 더불어 생겨난다. 이 자기소외는 의식되지도 않은 채 진행된다.” 처절하게 자신을 고립시킨 강수는 생에 대해 한점의 의욕이 없고, 미소는 줄곧 생글거리며 기운을 불어넣는 쪽이다. 즉 치유의 대상은 구천을 떠도는 미소가 아니라 스스로 갇힌 강수다. 강수는 이렇게 ‘추방되지 않은 타자’로부터 치유의 길을 얻는데 그 길은 미소의 손과 발이 돼주는 것이다. 이제 이 영화의 발걸음은 ‘혼자들의 연대’를 향해 나아간다.

연애가 아닌 연대

두 사람의 관계가 멜로로 번지지 않는 이유도 이 영화가 연애가 아닌 연대를 말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윤기 감독은 “성별이 바뀌어도 별 상관없는 이야기”(<씨네21> 1100호 인터뷰)라고 했다. <싱글라이더>와 마찬가지로, 교감을 나누던 남과 여는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운 뒤 이별한다. 극중 ‘나이롱 환자’(윤제문)가 난치병 아들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강수가 아빠 역할을 대신해준 것처럼, 주는 사람 입장에선 대단할 것 없어도 받는 사람은 끔찍이도 고마운 연대의 풍경이 이 영화엔 있다. 느슨해서 부담 없는 연대, 그래서 쉽게 해낼 수 있는 연대다. 누군가는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상대방 처지에선 그렇지 못할 때, 전달되는 재화의 가치가 극대화되면서 연대는 의미를 갖는다. 극 종반부 미소의 영혼이 할 수 없는 일을 강수가 끝내 마무리짓기로 결심하면서 그는 비로소 아내의 기억으로부터 헤어나와 스스로를 감옥에서 꺼낸다. 구원은 혼자들끼리의 연대로부터 온다.

이윤기 감독이 인터뷰에서 에둘러 말했듯이 <어느날>에는 상업영화로 개봉하기 위해 타협한 흔적(병원 옥상에서의 설명적인 대사나 지나치게 친절한 플래시백 등)이 곳곳에 어른거리기도 한다. 명백하게 사족이지만, 나는 여기에 헛된 가정 하나를 덧붙이고 싶다. 강수 캐릭터 대신 남편을 잃은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미소와 자매애를 나누는 이야기였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여자 사람과 여자 영혼이 만나 이성끼리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은 곳까지 들어가 우정을 나누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면. 젊은 여성에게 다짜고짜 반말부터 하는 아저씨 캐릭터를 보지 않아도 됐다면. <여자, 정혜>(2004)나 <멋진 하루>(2008)처럼 감독의 전작에서 돋보였던 여성의 시점으로 세상의 창살 너머를 바라봤다면. 그리하여 시선을 흐리지 않고 보다 명쾌하게 연대를 보여줬다면…. 그랬다면 이전에 우리가 보지 못했던, 한결 여성적이고 생태주의적이어서 이 시대에 걸맞은 연대와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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