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듀나의 영화비평] <에이리언: 커버넌트>에 노출된 장르적 단점들
2017-05-23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내년 말에 노쇠한 허블 망원경의 뒤를 잇는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이 발사된다. 이 망원경엔 여러 기능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근적외선 영역에서 외계 행성의 대기를 관측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관측 영역에 지구의 것과 비슷한 생명체를 품은 행성이 있다면 관측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무슨 의미일까. 리들리 스콧의 신작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일어난 일, 그러니까 머나먼 개척 행성에 가려던 초광속 우주선이 중간에 갑자기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해 방향을 트는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이다. 만약에 A 태양계에 식민 우주선을 보낼 정도로 인류의 과학이 발달했다면 제임스 웹 망원경을 넘어서는 관측기구가 오래전에 만들어졌을 것이고, 지구를 중심으로 하고 지구와 A 태양계 사이의 거리를 반지름으로 하는 구 안에 있는 태양계의 행성들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확보한 상태일 것이다. 인간이 숨쉴 수 있는 행성이라면 놓쳤을 리가 없다. 그 행성 근처를 지나치다가 ‘중성미자 폭풍(!)’을 맞아 우주선이 손상되는 일은 더욱더 있을 수 없다(중성미자 폭풍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린가. 닐 더그래스 타이슨의 트위터 항의를 받고 싶었나?).

장르적 한계 안에서 이뤄져야 할 최소한의 노력

있을 수 없는 일은 계속 이어진다. 분명 엄청난 돈과 수년의 연구가 들어갔을 프로젝트인데, 선장은 몇년 더 동면하기 싫다고 미지의 행성에 멋대로 착륙한다. 그리고 밖에 미지의 생명체들이 있을 게 뻔한데도 탐험가들은 우주복을 입지 않고 맨몸으로 우주선 밖에 나간다. 전편인 <프로메테우스>(2012)에서도 저랬는데, 도대체 저 인간들은 배운 게 없다. 프로메테우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구에서 어떻게 아느냐는 말을 하지 마시길. 애당초 경험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니지 않은가? 과학을 넘어서 생각해도 커버넌트호의 승무원들은 어떻게 최초의 외계식민단 멤버로 뽑혔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지능이 낮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남자, 여자 모두에게 공평해서 초반 몇 장면에서 여성혐오의 가능성을 의심했던 게 미안해질 지경이다. 처음부터 외계 행성에 맨몸으로 기어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게 아니긴 했지만 이들은 생존 능력이 너무나도 부족해서 행성에 착륙한 뒤로는 한 무더기의 시체 더미처럼 보인다. <스크림>(1996)의 영화광들은 현관으로 나가도 될 텐데, 굳이 2층으로 달아나는 연쇄살인마의 희생자들을 놀려댔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주인공들이 딱 그 수준이다.

애초에 오리지널 <에이리언>(1979)도 말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유니버설 번역기도 없는 화물선 승무원들이 어떻게 외계어가 조난신호인지 경고신호인지 판단할 수 있을까? 제노모프는 숨어 있는 동안 무엇을 어떻게 먹었기에 그렇게 커졌을까? 아무리 정체불명의 외계 생물이 무섭다고 해도 멀쩡한 우주선을 파괴하고 조난선으로 탈출하는 게 말이 되는가? SF작가 앨런 딘 포스터가 당시 이 영화의 노벨라이제이션을 썼는데 읽고 있노라면 구멍들을 채우느라 애를 먹는 전문작가의 짜증이 느껴질 정도다(“항성 간 화물선에 뭐가 실려 있었냐고요? 20세기의 독자들은 비웃겠지만 석유가 실려 있었지요! 플라스틱은 만들어야 하니까!” “외계 괴물은 뭘 먹고 그렇게 커졌냐고요? 영화엔 안 나오지만 식량 창고를 털었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리언>의 승무원들은 외계 행성에 나갈 때 우주복은 챙겨 입었고 커버넌트호 승무원들보다 말이 되게 행동했다. 그리고 시대를 생각하라. 1970년대 영화에서 우주선 승무원들이 사칙에 밀려 억지로 미지의 행성을 탐사하는 것과 2010년대에 나온 영화에서 멋대로 임무를 중단하고 미지의 행성에 맨몸으로 나가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대부분 SF는 미래의 그림을 통해 현재를 반영한다. 현대 독자나 관객이 과거의 SF를 통해 보는 것도 사실은 과거다. 과거의 과학. 과거의 세계관. 과거의 편견. 과거의 습관. 아무리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도 한계는 있다. 이 한계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일단 과학의 한계. 모르는 걸 쓸 수는 없으니까. 상식 오류의 한계. 수많은 사람들이 사실이 아닌 걸 사실로 믿으며 이건 SF 글쟁이도 다르지는 않다. 장르 습관의 한계.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장르 습관이라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설정을 허용한다(‘벌컨 지구인 혼혈 미스터 스포크’). 매체의 한계. 평균적으로 영화가 책보다 훨씬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오히려 옛날 SF를 다시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의 SF작가들은 <화성 연대기>나 <우주전쟁> 같은 소설을 쓰지 않으니까. 지나간 시대의 사랑스러운 유물인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작품에서 시작한 시리즈를 현대에서 계속 이어가려면 그때의 미래와 지금의 미래를 말이 되게 잇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학과 장르를 진지하게 다루었더라면

사실 <에이리언>은 시리즈 잇기가 비교적 편한 편이었다. 적어도 <스타트렉>이나 <스타워즈>보다는 쉬웠다. 오리지널 <에이리언>은 제노모프의 정체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정보도 주지 않았다. 정보를 주지 않는 건 제노모프의 알이 발견되었던 고대 외계우주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이야기의 융통성있는 확장이 가능했고 장르의 습관이 유행에 따라 바뀌어도 그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제임스 카메론의 2편 이후 괜찮은 영화가 나온 적은 없었지만 리들리 스콧이 거대한 야심을 품고 다시 이 시리즈를 찾기 전까지 시리즈는 이 혜택을 많이 봤다. 왜 스콧이 뒤늦게 나서서 굳이 에일리언의 기원을 탐구하려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만든 이야기도 아닌데.

미지의 상태로 남겨두면 좋았을 텐데 괜히 건드려서 일을 망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프로메테우스>를 이야기할 때 한 번 했다.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는 이 문제점들이 더 심각해진다. 아무리 멋대가리 없는 엔지니어를 등장시켜 신비감을 날려버렸어도 <프로메테우스>의 결말은 미지의 문명을 향해 열려 있었다. 하지만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그 가능성마저도 파괴해버린다. <에이리언: 커버넌트>가 그리는 엔지니어의 도시는 아무리 퍼시 셸리의 시구로 장식하려 해도 한심하기 그지없다. 엔지니어의 우주선도 폐허로 남아 있을 때가 실제로 하늘을 날 때보다 훨씬 아름답다. 스콧이 몇 억년에 걸친 대역사를 열었지만 어찌된 게 그건 버려진 우주선 한척보다 빈약하다.

SF로서 그나마 재미있는 부분은 로봇 데이비드의 이야기다. 하지만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여기서도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는다. 데이비드는 현대 SF의 인공지능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다. 인공지능의 욕망과 동기와 행동에 대한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해석은 지극히 19세기적이라 데이비드의 몸을 뜯어보면 진공관과 톱니바퀴가 튀어나올 것 같다. 과학이 들어가야 마땅한 자리에 영화는 끝도 없이 구약 상징을 집어넣는데, 종교 상징으로 이야기에 무게감을 넣는 습관은 보기만큼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말해두고 싶다. 퇴행적이기도 하지만 일단 다들 너무 많이 했다.

<에이리언: 커버넌트>가 나쁜 영화이거나 재미없는 영화라는 말을 하려고 이 이야기를 시작한 건 아니다. 적어도 이 영화는 3, 4편보다는 낫고 매력적인 액션 장면도 많이 갖추고 있으며 호러영화로서의 기능도 괜찮다. 하지만 SF 애호가로서 이 영화의 노출된 장르적 단점들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이 단점들은 과학과 장르를 진지하게 다루고 쓸데없이 과대망상에 빠지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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