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앙꼬의 <꽃섬> 순간순간이 완벽한
2017-05-24
글 : 앙꼬 (만화가)

감독 송일곤 / 출연 김혜나, 서주희, 임유진, 손병호 / 제작연도 2001년

일어나자마자 벌써 수십번 본 영화를 틀어놓는다. 영화가 끝나면 다른 영화를 틀어놓는다. 영화가 끝나면 또 다른 영화를 틀어놓는다. 나는 만화가다. 대부분 밖에 나가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이것저것을 한다. 이것저것을 하며 잠이 들 때까지 영화를 틀어놓는다. 어떤 것은 10년 전에 50번을 봤을 때까지 세어봤는데 지금은 얼마나 봤는지 모르겠다. 나의 이야기를 한 것만 같아서 펑펑 울어버린 영화, 인생의 모든 것을 말한 것 같은 영화, 너무 사실적이라 두려웠던 영화. 그 감동들을 다 잃어버렸다.

그 영화가 하는 얘기가 좋아서 보기 시작하다가, 너무 많이 보게 되면 그 영화가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하나의 이야기였던 영화가 30번을 넘어가는 순간 모두 해체되고 대신 순간순간으로 변한다. 28분25초, 주인공이 노래를 부르며 옆을 흘기다가 살짝 감았다 뜨는 눈, 영화 속 정신지체 아이가 순간 연기를 잘못해서 걸린 똑똑한 눈빛, 잠깐 고양이 같은 모습이 됐던 캐서린 제타 존스, 이제 내가 사랑하는 영화들의 내용과 감동은 잃어버렸지만 순간순간의 감각들을 얻었다.

최근에 본 <인터스텔라>(2014)만 해도 몹시 감명받아 참을 수 없이 반복 재생을 시작했는데, 그 내용이 뭐였는지 이젠 모르겠다. 그냥 블랙홀 옆에 떠 있는 행성이 너무 좋고 토성이 너무 커서 좋아죽겠다. 어쨌든 그런 면에서 내 인생의 영화를 뽑아보았다. 소개하려는 이 영화 역시 이젠 무슨 내용인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15년 동안 그 순간의 감각들과 함께 살았다. 그 영화는 송일곤 감독의 <꽃섬>이다. 나는 애를 낳아본 적이 없는데, 분명히 어느 오래된 화장실에서 애를 낳아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고는 새벽에 시외버스를 타고 바다를 가려 했는데, 버스 기사 아저씨가 나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왜 여길 가냐고 물어보니까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했던 아저씨의 말에 ‘정말 인생은 이렇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나에게 이 장면은 여러 차례나 겪었던 인생의 어떤 사건들을 가장 짤막하게 단축해서 말해줬다. 또 좋아하는 부분은 게이 아저씨 밴드를 만나 괴상한 술집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이다. 남해 어느 마을, 작은 술집에 그렇게 훌륭한 가수가 있다는 게 좀 이상하지만, 거기에 있던 웨이터를 좋아했다. 그 웨이터가 조용히 턱을 괸 채 그들의 술주정을 듣고 있던 모습에 오랫동안 반했다. 이전 작업 <나쁜 친구>에서 단란 주점 웨이터로 그 아저씨를 그렸는데, 그 아저씨의 담담한 모습 뒤에,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고 사람들이랑 있을때 말을 많이 하진 않지만 너희를 이해하고 있고 속으로도 너희를 욕하지 않아’라고 하는 그 웨이터의 모습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그만큼 잘 나오진 않은 것 같지만.

게다가 정말 멋진 부분은 남해 여인숙에서 깜깜한 새벽에 문을 두드리며 아저씨가 그들을 깨우는 장면이다. 긴장하며 잠들다 작은 소리에 잠에서 깬 것이 분명한 목소리로 ‘누구세요?’라고 하는 그 아줌마의 목소리가 정말 좋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더 얘기하고 싶지만 원고지가 없으니 이쯤에서 줄여야겠다. 글쎄, 처음에는 이 영화가 뭘 얘기하는지 알았을 것도 같다. 하지만 거의 15년 전 일이고 영화를 계속 보던 중에 영화의 내용이 모두 해체됐다. 아마 영화는, 아이를 낳은 10대 아이와 몸을 팔다 도망나온 아줌마와 암에 걸린 여자, 이 셋의 여행의 목적이 뭐였는지, 뭘 바랐는지 그런 줄거리였겠지만,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순간이 완벽했던 영화, 그 후에 내 삶의 부분부분이 이 영화의 장면들로 채워졌던 영화, <꽃섬>이 내 인생의 영화다.

앙꼬 만화가. 2003년 <딴지일보>에 <앙꼬의 그림일기>를 연재하며 데뷔. <앙꼬의 그림일기1>(2004), <열아홉>(2007), <앙꼬의 그림일기2>(2008), <삼십 살>(2013) 등을 펴냈다. 세계 최대 만화축제인 앙굴렘국제만화축제에서 <나쁜 친구>(2012)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새로운 발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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