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권해봄의 <곡성> 최고의 로맨스영화
2017-06-14
글 : 권해봄 (MBC 방송 PD)

감독 나홍진 / 출연 곽도원, 황정민, 구니무라 준, 천우희 / 제작연도 2016년

내 인생 영화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한참 고민했다. <쇼생크 탈출> <포세이돈 어드벤처> <올드보이> <비포 미드나잇> 등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영화가 있었지만, 인생에 다시 없을 혹은 인생을 바꿔놓은 영화라고 할 만한 작품은 역시 하나뿐. 바로 <곡성>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경이로웠고, 관객과 놀이하듯 대담하게 미끼를 던지고 현혹하는 감독의 연출도 더할 나위 없이 새로웠지만 <곡성>이 나의 인생 영화인 이유는 따로 있다.

<곡성>이 개봉할 무렵 회사 같은 팀에 좋아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회사에서는 밥도 자주 같이 먹고 회식도 종종 하는 좋은 동료 사이였지만 사적으로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혹여 그런 말을 건넸다가 어색해질까 무서워 만나자고 청하기는커녕 커피 한잔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느 날 둘이 함께 밥을 먹다가 <곡성> 얘기가 나왔다. 그녀는 영화에 반전이 있으니 스포일러를 접하기 전에 후딱 봐야 한다고 했다. 그때 같이 보러 가자는 말만 꺼냈어도 데이트 신청이 좀 자연스러웠을 텐데 나는 우물쭈물하다 물어볼 기회를 놓쳐버렸다. 나중에 <곡성>을 함께 보러 가자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말할 기회가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어떻게 어색하지 않게 얘기를 꺼낼까 고민하다가 주차장 그녀의 차 옆에 내 차를 대놨다. 그녀가 퇴근할 때 우연인 척 차로 같이 향하면서 문득 생각난 것처럼 얘기를 꺼내면 좀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었다. 토요일 밤, 방송 준비를 마치고 집에 가려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녀 옆에 타이밍을 맞춰 같이 걸어갔다. “이번주도 참 힘들었다. 그렇지?” “그러게 말이야.” 이제 영화 얘기를 꺼낼 타이밍인데… 그녀가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이번주는 선배들 때문에 힘들었고, 이렇게 편집을 했으면 방송이 더 재밌었을 텐데 하며, 자동차로 향하는 시간을 일 얘기로 채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화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차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어? 네 차 내 차 옆에 있네!” “응, 그… 그러게.” “이번주도 수고했어. 잘 가.” 아…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차로 걸어갔고 나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모든 타이밍을 놓쳤다. 아, 이렇게 기회가 날아가나.

“야, 저기….” “응?” “저기… 주말에 나랑 <곡성> 볼래?” “어? 왜?” 왜? 왜냐니, 뭐라고 말하지? 왜 나는 그녀에게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일을 함께 보내자고 하는 거지? 굳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어… 나… 무서운 영화 혼자 못 보거든.” “뭐야. 무서운 영화 못 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어. 가자” 와! 성공이다. 그런데 무서운 영화를 못 본다는 얘기는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인지. 그날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발이 오글거린다. <곡성> 같은 대작을 가벼운 호러영화나 데이트 무비로 만든 것 같아 죄송합니다, 나홍진 감독님.

내가 던진 성긴 미끼를 그녀는 모른 척 물어버린 것일까? 그렇게 주말에 그녀와 영화를 보러 갔고 공포영화를 일부러 찾아다닐 만큼 좋아하는 나지만 괴이한 장면엔 얼굴을 돌려가며 겁이 나는 척 연기했다. 우리는 영화가 끝난 후 스크롤이 다 올라가고 모든 관객이 나갈 때까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자리를 뜨지 못했다. 영화가 끝나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는 나에게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곡성>은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하고 이야깃거리도 풍부해 심지어 헤어지고 난 후에도 영화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영화를 본 지 꼭 1년 후, 우리는 결혼을 했고 부부가 되었다. 그래서 <곡성>은 적어도 내게는, 아니 우리 부부에게는 최고의 로맨스영화다. 캬, 이게 바로 인생 영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여러분, 마음에 드는 이와 함께 영화를 볼 때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영화를 보는 게 좋습디다.

권해봄 MBC 방송 PD. 예능 프로그램 <렛츠고 시간탐험대> <헬로! 이방인> <동네 한 바퀴>등에 조연출로 참여했으며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모르모트 PD’라는 별명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