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액션배우도, 아시아 배우도, 여배우도 아닌 그냥 배우입니다.” 2007년 출연작 <북극>으로 양자경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 인터뷰를 한 적 있다. <북극>에서 그녀는 툰드라 지역에서 사람을 피해 도망다니며 힘겹게 살아가는 주인공이었다. 양자경을 여전히 <예스마담>이나 <와호장룡>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적잖이 당황할 수도 있는 영화였다. 물론 오래전에 출연한 <송가황조>(1997)를 시작으로 <게이샤의 추억>(2005) 등에 출연하며 이른바 (개인적으로 몰아내야 할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정극 연기’라는 것을 보여주긴 했다. 하지만 나로서도 <북극>에 대해 “보다 현실적이고 잔인한 역할에 끌렸다”고 말하는 그 모습이 당시로선 낯설었다. 여전히 양자경은 많은 팬들에게 ‘액션배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 이후 <선샤인>(2007), <황시>(2008)를 비롯해 아웅산 수치를 연기한 <더 레이디>(2011)에 이르기까지, 액션영화가 아닌 영화들에서 그녀를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냥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는 바람처럼 양자경은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돌파해왔다. 당시로선 모험적인 캐스팅이었던 장완정의 <송가황조>에서 ‘돈을 사랑한’ 첫째 딸 애령으로 등장하여, 부호와 결혼해 은행업으로 중국의 경제력을 장악하는 신여성을 멋지게 소화해냈다. <성월동화>(1999)에서는 주인공 장국영의 죽은 아내의 언니로 나와, 장국영의 새 애인을 보고서 가슴이 먹먹해져서 혼자 주크박스의 음악에 기대 바다를 쓸쓸히 응시할 때 <클린>(2004)의 장만옥만큼 멋졌다. 당시 인터뷰에서 자신의 전환점이라고 말했던 작품은 허안화의 <스턴트우먼>(원제 ‘아금적고사’, 1996)이었다. 중국의 군인이었던 그녀는 홍콩에서 스턴트 배우로 일하는데, 사귀던 남자에게 딴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하나뿐인 아들과 새 인생을 시작한다. 홍콩영화계에서 오래도록 남자배우들과 부대끼며 버텨온 양자경을 향한 허안화 감독의 헌사 같은 영화로, 마지막에 양자경이 부상당하는 장면을 (마치 성룡 영화의 마지막처럼) NG컷으로 보여주며 “이 영화를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한 양자경에게 바친다”라는 자막을 삽입했다. 홍콩영화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버텨온 감독 허안화와 배우 양자경이 여성 영화인으로서 두손을 맞잡은 가슴 뭉클한 순간이었다. 혜영홍은 2009년 역시 정극 연기를 선보인 <새벽의 끝>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 인터뷰를 가졌는데, 그녀도 자신이 영화계에서 오래도록 버틸 수 있는 힘을 준 사람이 바로 허안화 감독이라고 말했다. 양자경처럼 작품을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무협영화가 그 시효를 다하면서 자신의 영화인생이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허안화의 영화를 보며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내게 정극 연기를 기대하지 않겠지만 허안화 감독의 영화들인 <객도추한>(1990)의 장만옥, <극도추종>(1991)의 종초홍, <여인사십>(1994)의 소방방, <스턴트우먼>의 양자경, <천수위의 낮과 밤>(2008)의 포기정을 보면서 나도 껍질을 깨고 싶었다”며 드디어 <새벽의 끝>에 출연하게 된 소감(이 작품으로 홍콩 금상장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에 살짝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내가 가장 좋아한 배우들인 양자경과 혜영홍은 각각 <영춘권>(1994)과 <무협>(2011)을 통해 견자단을 제압하고도 남았던 여배우로 기억한다. 그런 그들이 허안화 감독을 경유해 액션배우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그리하여 결국 그 바람을 이룬 모습은 그들의 오랜 팬으로서 실로 감동적이다. 이번호 특집에 등장한 50인의 배우 모두 그러하다. 그리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