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자>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동물권의 성립 근거에 관해) 문제는 동물들이 ‘이성적’일 수 있는가, 혹은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느끼는가’ 하는 점이다.” - 제러미 벤담(1781년)
“허먼은 동물과 물고기의 도살을 목격할 때마다 언제나 똑같은 생각을 했다. 동물에 하는 행위로 보면 모든 인간은 나치였다. 다른 종의 존재를 자기 좋을 대로 취급하는 인간의 오만은, 강한 것이 곧 옳은 것이라는 극단적 인종차별주의를 예시했다.” - 아이작 싱어 <적, 그리고 사랑 이야기>
여섯번 종이 울리고 2007년의 뉴욕에서 농화학 대기업 미란도의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된다. 대대로 이어진 회사의 새로운 총수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는 아무렇지 않게 선대의 자본을 사악하다고 지칭하며 노동자들의 피로 얼룩진 공장 벽을 가리킨다. 2007년의 신세대 사주 루시는 착취의 유적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아이로니컬한 효과를 더할 수 있는 쇼 무대로 고른 것이다. 우리는 이 아이디어를 자랑스러워하는 그녀의 얼굴을 선하게 그려볼 수 있다. 주주와 언론 앞에 애교스럽기까지한 이 자본가는 세계 식량난을 해소할 신종 돼지 프로젝트의 시작을 친환경 이미지로 범벅된 선전 영상을 통해 브리핑한다. 루시는 기괴하게도 슈퍼돼지가 적게 먹고 적게 싸며 체구가 크다는 사실 외에도 아름답고 매우 특별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야생동물과 반려동물에게는 마음 편히 우호적이지만, 인간의 이익을 위한 도살을 목표로 사육되는 농장/공장 동물은 외면하거나 분열적으로 바라보기 마련인 소비자를 마비시키는 립서비스다.
세계 곳곳에 퍼뜨린 26마리의 슈퍼 아기돼지 중 하나로 울트라 슈퍼돼지 후보인 옥자는 그렇게 남한 강원도 우수축산농 주희봉(변희봉)씨의 조실부모한 손녀 주미자(안서현)의 품에 안기고 10년이 흐르자 미자를 품에 안는 거구로 성장한다. 옥자는 처음부터 가축이 아니라 미자의 친구지만 소유주 미란도 기업에는 오래 기다린 이윤을 뽑아야 할 상품이다. 친구를 납치당한 산골 소녀는 서울로, 다시 뉴욕으로 달린다. 구르는 과정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이 추격전에서 가장 주요한 추가변수는 옥자를 통해 미란도 기업의 실체를 폭로하려는 동물해방전선(ALF)이다. <저수지의 개들>식의 작명법을 쓰는 5인조는 영화 사상 가장 온유한 표정을 지닌 테러리스트 제이(폴 다노)의 지휘 아래 활동한다. 뉴욕에서 뒤늦게 미자의 감연한 저항을 알게 된 루시는, 노이즈가 마케팅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숙지한 기업가답게 미자와 옥자의 사연을 슈퍼돼지 사업에 목가적 아우라를 입히는 액세서리로 이용할 플랜 B를 가동한다.
피그 위스퍼러
<옥자>는 동물과 인간의 우정담이자 일종의 몬스터 무비이며 자본주의 식량 생산 시스템을 돌아보는 절충적 어드벤처영화다. <괴물>의 환경주의, 반제국주의를 이어받고, 미래의 밀폐된 슈퍼기차 안에서 벌어졌던 <설국열차>의 직진하는 계급투쟁을 한국과 미국의 세 공간으로 펼쳐 놓은 활극이다. 제작의 맥락으로 보면 <설국열차>와 마찬가지로 다국적 인물과 공간이 이야기의 필요에 의해 끌려들어오는 인터내셔널 프로젝트이며, 코믹스 원작 프랜차이즈 시대 이전에 나왔던 (할리우드 현재 기준 중저예산) 오리지널 블록버스터의 후예에 해당한다. 옥자가 베이브처럼 사랑스러운 분홍빛 돼지가 아니라 코끼리 피부의 슈퍼돼지인 까닭은 명백하다. 귀여운 반려동물과 식용 가축의 인간 중심적 구분을 회의 하려면 미자가 사랑하는 옥자는 가축이어야 하는데 슈퍼돼지는 아예 처음부터 고깃덩어리로서 창조된 동물이다. <괴물>에서 바이러스 유포 누명을 썼던 괴물이 인간의 무책임에서 파생된 돌연변이 생명체라면 <옥자>의 슈퍼돼지는 인간의 철저한 계획으로 엔지니어링된 생명체다. 그러나 괴물도 옥자도 인간이 결코 뜻한 적 없는 신경과 감각을 장착하고 태어나고 존재한다. 심지어 성격도 형성한다. 옥자는 오늘날 대부분의 돼지와 달리 인간가족과 밀착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개성을 성숙시킨 개체다. 강원도에서 옥자와 미자가 사는 정경을 보여주는 목가적 생활의 초반 가운데, 절벽에서 실족한 미자를 옥자가 구하는 에피소드는 옥자의 지력 수준과 행동 경향, 옥자가 미자에게 헌신하는 정도를 요약하는 ‘일러두기’다. 힘이 세지도 날렵하지도 않은 옥자는 체중과 저돌성밖에 무기가 없다. 살집이 두껍고 피부가 단단해 충격을 받아도 치명상을 입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옥자가 이 특징이 미치는 효과를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후 관객은 과도한 의인화 없이 옥자를 의지와 판단력을 갖춘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한편 몸을 던져 미자를 구한 다음 추락한 숲속에 시무룩하게 퍼져 있는 옥자의 행동은 토라진 감정을 표현해, 둘의 관계가 상하 없이 동등함을 암시한다. 미자가 사과하자 게으름 피우기 좋아하고 너그러운 옥자는 튕기듯 뜸들이더니 한번 옆으로 굴렀다 몸을 일으킨다.
봉준호 감독이 예고했던 옥자와 미자의 멜로드라마는, 원형적 애착과 우정의 선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할아버지 희봉의 “이제 너도 나이가 있는데 옥자랑만 붙어 있지 말고 읍내 나가서 남자친구도 사귀어라”라는 대사가 10대 초반 소녀의 생활에서 옥자가 차지하는 자리를 암시하는 정도다. 하지만 말과 생각이 복잡하지 않은 돼지와 어린 소녀의 스킨십은 영화 내내 커뮤니케이션 방법으로 결정적이다. 대화도 입과 귀를 마주대는 지근거리를 요한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미자는 베개와 효자손을 안고 돼지우리로 가고 옥자도 반사적으로 품을 연다. 강아지나 고양이라면 보호자의 잠자리로 파고들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미자가 간다. 둘은 같은 효자손으로 등을 긁는다. 미자 역시 슈퍼 소녀다. 배두나와 고아성을 잇는 분위기를 몸에 두른 배우 안서현은 피그 위스퍼러 미자를 순진무구한 산골 소녀가 아니라 물정에 훤하고 의지가 강한 인물로 표현한다. 아무래도 죽은 엄마 옷을 물려입은 듯한 차림의 미자는 밥상머리에선 큼직한 안경을 끼고 할아버지에게 잔소리를 풀어놓는다.
Green is New Red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봉준호 감독은 운전 도중 본 도로 가운데에 있는 이상한 동물의 비전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옥자>의 ‘태몽’을 회고했다. 어느 날 부여된 절체절명의 목표를 향해 가진 것을 총 동원해 질주하는 기층 서민 인물을 영화 한복판에 두어온 봉준호 감독은 <옥자>에서 자본주의 시스템 피라미드의 최하층을 떠받치고 있는 동물에 눈을 돌렸다. <괴물>의 박씨 가족 매점 벽에 박제로 걸려 있던 돼지가 쿵쿵거리며 돌아온 셈이다(이 멧돼지 박제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라지고 없다). 뉴욕에 도착한 옥자의 눈에 보이는 풍경이 대변하듯 지구상 대다수 동물들에게 세상은 공동묘지다. <옥자>의 주제는 봉준호의 필모그래피에서 생뚱맞은 변덕이 아니다. <설국열차>는 의식과 감정을 가진 존재- 꼬리칸 성인 승객과 아이들- 를 자원으로 취하는 설정을 갖고 있다. 타자를 고통과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용할 자원으로 물화하는 행태는, 살아 있는 피착취자로부터 원하는 부분을 뽑아내는 상황에서 극대화된다. 불평등한 식량 배급이 꼬리칸 승객들끼리의 다툼을 야기하자 길리엄(존 허트)은 자신의 팔을 식량으로 내놓아 소요를 진정시켰고 체구가 작은 어린이들은 기차 밑바닥에 갇혀 동력원이 됐다. <옥자>에는 산 돼지의 부위별 육질을 채취하는 기계가 등장한다. 살아 있는 곰의 쓸개에 빨대를 꽂아 뽑아 담즙을 판다는 보도가 어른대는 대목이다. 동물에 인간이 가하는 불필요한 고문은 어떻게 도살하느냐보다 도살까지 어떻게 살게 하느냐에서 현저히 드러난다. 돼지의 머리에 한번의 충격을 가해 숨을 끊는 <옥자>의 도살장은 현실에 비해 차라리 인도적인 편이다. 우리를 한결 몸서리치게 하는 이미지는 검고 축축한 땅에 철조망을 두르고 발디딜 틈 없이 돼지들을 가둬놓은 나치 수용소를 연상시키는 <옥자>의 축사다. 지난 3월 30일 <가디언>은 “Dairy is Scary”라는 기사로 공장제 축산의 그늘과 대안을 꾸준히 다루는 보도를 이어갔다. 이 기사에 따르면 영국 젖소의 경우 암소는 생후 15개월부터 젖을 내기 위해 끝없이 강제 인공수정을 당하고 출산 36시간 이내 송아지를 빼앗긴다. 수송아지는 바로 죽임을 당하거나 몇달의 말미 후 송아지 고기가 되고 암송아지는 어미소와 같은 순환지옥에 들어간다. 이들의 삶은 자연수명의 1/5이다. 옥자 역시 인간으로 치면 강간에 해당하는 폭력적 강제교미를 당하고 <모노노케 히메>에서 총에 맞은 멧돼지 신이 그랬듯 포악해진다. <옥자>는 동물권 운동의 여러 이슈를 조금 벅차리만큼 이야기 안에 쓸어담는다. 공장제 축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역시 정신적 피해자다. 제이크 질렌홀이 분한 수의학자 조니 윌콕스는 “난 동물을 사랑한단 말이야!”라고 신음하며 본인이 하는 일의 엽기성을 잊고 가학성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술에 의존한다. 자본의 요구에 따라 어떻게 빨리 살을 찌우고 알을 낳고 번식하게 만들지에만 집중하게 된 관련 분야 학자들의 자괴를 대표하는 목소리로 들린다.
통역과 4대 보험은 신성하다
다국적 대기업에 맞서는 <옥자>의 인물들의 투쟁 방식은 다분히 봉준호스럽다. 옥자와 미자의 공통점은 가진 것이라곤 제 한몸의 중량과 저돌성뿐이라는 데에 있다. 미자는 몸을 짱돌 삼아 미란도 코리아 지사의 유리문을 돌파하고 옥자와 재회하기 위해 어떤 탈것의 도움도 받지 않고 두발로 달리며 <집으로 가는 길>의 장쯔이 이후 가장 애절한 스크린 뜀박질을 보여준다. 그녀는 지구력과 속도가 좋은 주자일 뿐 아니라 지리 파악에 능해 질러가기에 능하다. 극중 옥자와 미자의 질주는 헛디딤과 미끄러짐도 결국 전진임을 자못 감동적으로 증명한다. 실존하는 동물해방전선과 달리 투쟁 과정에서 사람도 동물도 다치지 않는 비폭력주의를 내세운 극중 ALF(Animal Liberation Front)의 멤버들도 가해를 배제하기에 물건을 쓰러뜨리거나 몸을 던져 적을 막는 수밖에 없다. 1980, 90년대 한국의 구사대와 백골단을 정확히 연상시키는 복장과 진압 매너를 시전하는 대기업 사병 블랙 초크단 앞에서 해방전선은 무력하다. 내부자끼리는 폭력을 쓰고 거짓말도 하면서 이상주의 원칙을 견지하는 그들은 때때로 소위 386 운동권의 희화화된 예처럼 보인다. 그래도 감독은 ALF 단원들을 ‘머리에 꽃 단 이상주의자’로 손쉽게 비웃음으로써 양비론에 발목을 내주지 않는다. 짧지만 인상적인 역할을 하는 계약직 청년(최우식)은 봉준호 감독 이후 세대가 운동에 합류하는 방식을 스케치한다.
<옥자>의 세트 피스는 명동역 지하상가에서도 뉴욕 번화가에서도 잘 설계된 한국적 난장판이다. 특히 족발천국에서 다이소 매장에 이르는 세 팀이 뒤엉킨 지하상가 추격전은 결과와 무관한 카니발적 순간을 연출한다. 화면이 느려지고 익숙한 팝송이 흐르는 봉준호식 ‘퀵실버 모먼트’에서 핵심은 여유로운 제압이 아니라 각기 사건을 판이하게 파악하고 있는 세 의지의 우스꽝스러운 충돌이며, 파편을 경건하게 빼주는 제이를 향해 “얘는 뭐야?”라고 던지는 옥자의 눈빛이다.
제이크 질렌홀과 셜리 헨더슨(<해리 포터> 시리즈의 모우닝 머틀, <에브리데이>의 주연이었던 바로 그 배우)에게 문화 충격을 경험하게 만들고 틸다 스윈튼에게 한국식 부잣집 사모님 패션과 비슷한 퀼티드 재킷, 버버리 셔츠와 스카프, 구두를 착용시킨 봉준호 감독을 보며 할리우드 배우들에게 매우 한국적인 상황을 부여하고 악동처럼 즐거워하고 있나보다 짐작하는 관객도 있을 법하다. <괴물>의 “노 바이러스”를 추억하게 만드는 <옥자>의 가장 중요한 농담은 “통역은 신성하다” 이다. 타자의 범위를 말 못하는 동물에게까지 확장한 영화에서 당연한 경구이기도 하고 멀티내셔널 프로덕션 영화의 내부자 조크 같기도 하다. 옥자와 미자를 제외하고 가장 성공적인 연기자는 틸다 스윈튼과 폴 다노다. 스윈튼의 루시는 자존감을 형성하는 성장기에 인물이 겪었던 문제를 또박또박 투명하게 전달한다. 앞으로 본인이 꺼낼 말의 효과에 미리 도취돼 감당하지 못하는 그녀의 연기는 자못 유쾌하다. 스윈튼의 1인2역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공포스러운데, 오바마 정권에서 트럼프 정권으로의 이행에 대한 은유로 해석하는 미국 관객이 있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옥자>의 폴 다노는 마치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 빌려온 캐릭터 같은데 언제나 가지런한 몸가짐과 복장으로 자기만의 리듬을 보존한다.
돼지들의 침묵
발상의 옆구리 찢기로 해결되는 <옥자>의 마지막 담판은 액션 어드벤처의 결말로선 실망스러울지 몰라도, 주제에 관한 사색을 매듭짓고 요점을 확인하는 장치로는 족하다. 요컨대 <설국열차>의 기관실 앞 대화와 유사하다. 옥자와 미자가 예정에 없던 일을 감행하는 애틋한 서브플롯은 <괴물>을 향한 셀프 오마주라기보다 시민 봉준호의 신념이라고 여겨야 옳을 것이다. 봉준호 영화가 늘 그랬듯이 전면적 승리 따위는 없으며 세상은 돌아가던 대로 돌아간다. 그 와중에 인간과 동물은 할 수 있는 것을 구한다. 꿈속에 들려오는 도살장 양들의 울음을 멈추기 위해 세상에 만연한 악의 한 조각에 불과한 버팔로 빌을 죽도록 추격한 <양들의 침묵>의 클라리스처럼, 미자는 때때로 가위에 눌리며 잠을 청할 것이다. 그리고 싸움의 추억은 남아서 세상 속을 흘러다닐 것이다. 툇마루와 퇴창이 구획한 아름다운 라스트 숏은 몇개의 질문을 보류하게 만든다. <옥자>는 아마도 올해 우리가 만나게 될 가장 조심스럽고 엄격한 현실도피 엔터테인먼트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