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중학교에서 여교사의 수업 도중 10여명의 남학생이 집단적으로 자위행위를 한 사건을 뉴스로 처음 접했을 때, 화가 나는 한편 솔직히 안도의 마음이 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 드디어 이런 끔찍한 교내 범죄가 수면 위로 떠올라 기사화되는구나. 이번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는 그런 일들이 제대로 처벌받겠지. 나름 밝은 미래를 상상하며 조금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일주일 후 관할 교육청은 “해당 교사를 대상으로 한 음란행동이 아니라 영웅 심리에 따른 사춘기 학생들의 장난”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 여교사는 수업을 중단하고 심리치료를 받으라고 권고받았지만, ‘그저 혈기왕성한 한창때’ 남학생들은 특별교육 8일과 성교육 이수 처분을 받았다. 사건은 그렇게 종결됐다.
아무렴. 그럼 그렇지. 많은 사람의 바람처럼 정당한 조사와 처벌이 이루어지는 사회였다면, 애초에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을. 문득 순진한 희망을 품고 설렌 나 자신이 한심하고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한참을 창피해하다 보니 새로운 질문들이 생겨났다. 아니, 대체 왜 내가 창피해하지. 정작 창피한 일을 한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마찬가지로, 이런 유형의 사건에서 수치심은 왜 늘 피해자의 몫인 걸까. 수치스러운 짓을 한 이들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는 게 정상이 아닌가. 도대체 이 모든 부끄러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왜 늘 무고한 사람들의 것이 되는가. 어쩌면 세상의 부끄러움에도 총량이 있는데, 혹 나 같은 사람들이 실수로 누군가의 부끄러움을 대신 겪고 있는 건 아닐까. 일말의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는 삶도 잘못이지만, 과도한 부끄러움을 껴안고 움츠러드는 삶 역시 수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복잡한 질문으로 꽉 찬 머리를 식힐 겸 폴 버호벤 감독의 <엘르>를 보러 갔다. 영화를 보고 환기는커녕 마음에 폭풍우가 몰아닥쳤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장면과 일어나 박수를 치고 싶은 장면이 뒤섞여 나를 공격했고, 전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질문들이 끝없이 솟아올랐다. 그래도 그 와중에, 극중 미셸(이자벨 위페르)의 대사 하나만큼은 온전히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수치심은 우리의 행동을 막을 만큼 강력하지 않아.” 전적으로 동의한다. 수치심은 우리 앞을 가로막을 만큼, 우리 삶을 무너뜨릴 만큼 강력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작은 결심을 하나 했다. 그런 종류의 부끄러움이 내 내면에서 우러나는 감정인지, 특정 상황에서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학습된 반응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쉽사리 부끄러워하지 말자. 남의 부끄러움을 가로채지 말자. 당당히 부끄러워하지 않을 용기를 갖자. 지극히 당연하지만 늘 실천이 어려웠던 약속을 꼭 지키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