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팔자에서 벗어나기
2017-07-20
글 : 문강형준 (영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 정원교 (일러스트레이션)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에서 미자가 슈퍼돼지 옥자를 구하러 당장 서울로 간다고 하자 할아버지 희봉은 달력 속 옥자 사진 위에 빨간 크레용으로 선을 그은 후 말한다. “목살, 등심, 삼겹살, 사태. 알겄어? 이번에 가면 이렇게 되는 거여. 이게 이놈이 타고난 팔자여. 팔자!” 옥자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바로 등을 돌려 집 밖으로 나간다. 산에서 도시로, 강원도에서 서울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궁극적으로는 아이에서 소녀로 떠나는 모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 <옥자>에는 여러 층위의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하나의 주요한 테마는 ‘팔자에서 벗어나기’다. 슈퍼돼지 옥자는 값싼 햄과 소시지로 만들어지기 위해 ‘개발’되었고, 그것이 돼지의 팔자다. 우리는 개나 고양이에서는 보지 못하는 고기의 팔자를 돼지에게서는 본다. 미자의 힘은 이 팔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미자는 다른 모두가 보는 돼지의 그 팔자를 인정하지 않고, 옥자를 가족의 하나로, 여성의 하나로 바라본다. 그렇게 바라보는 순간 돼지는 고기가 아니라 고유한 이름을 가진 개체가 된다. 동물해방전선 멤버들이 옥자를 이용해 슈퍼돼지 ‘전체’를 구원하고자 할 때도 미자는 고민 없이 “옥자와 함께 산으로 가겠다”고 단호히 말한다. 이미 미자에게 옥자는 돼지 중 하나가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팔자에서 벗어나기’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이야기’에 담겨 있는 핵심적 서사요소이기도 하다. 신화 속 영웅들은 자신에게 정해진 팔자를 그저 따르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그러다가 비극을 맞이했지만, 오디세우스는 결국 고향땅에 당도한다. 근대 이후의 서사에서는 이 테마가 더욱 확연하다. 햄릿은 어긋난 시간을 바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자신에게 맡겨진 팔자라고 스스로 규정하고, 마담 보바리와 레이디 채털리와 에드나 폰텔리에는 한 남자의 부인으로 살아야 하는 팔자를 거부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주드는 고아 출신 석공이라는 자기 팔자에 맞지 않게 크라이스트민스터 대학을 꿈꾸며, 개츠비는 빈농의 아들이라는 팔자 대신 아예 정체성 자체를 새로 구성하면서 과거마저도 자기 의도대로 반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옥자>가 이런 이야기들에 비해 신선한 점은 미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팔자를 거부하기 위해 자신을 내던진다는 데 있다. <괴물> <마더> <설국열차>에서도 반복되는 이 테마는 근대적 개인주의 서사에 공동체적 연대와 희생이라는 요소를 추가한다. 그러나 사실 미자는 옥자만을 구한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팔자에서 벗어난다. ‘시집갈 때 딸에게 주는’ 금돼지를 거침없이 내던지는 장면은 미자가 한국 여성에게 요구되는 팔자 역시 앞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미자는 동물해방전선과는 다른 방식으로 동물을, 나아가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돼지가 고기 부위로 평가되듯 사람이 스펙과 연봉으로 평가되는 한국 사회이기에(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옥자’다) 이 영화는 더욱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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