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마틴 스코시즈 / 출연 로버트 드니로, 시빌 셰퍼드, 조디 포스터 / 제작연도 1976년
1995년, 도서관에서 D&K 출판사의 <크로니클 오브 더 시네마>라는 책을 빌린 적 있다. 영화역사상 중요한 책들이 연도별로 정리된 책이었는데, 1976년 섹션의 타이틀 페이지 전면을 장식한 <택시 드라이버> 포스터가 유독 눈길을 사로잡았다. 어두운 도시를 배경으로 길을 잃은 듯한 표정을 하고 어색한 자세로 서 있던 로버트 드니로는, 감성이 풍부한 10대 중반의 소년이었던 내게 <MTV>나 잡지에서 자주 접했던 그런지 히어로들의 모습과 닮아 보였다. 그즈음 학교에서 보여줬던 <디어 헌터>에서의 그의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택시 드라이버>를 꼭 찾아 보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당시 주변에 이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를 갖고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었고, 결국 1996년 샌프란시스코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버진 메가스토어에서 꿈에 그리던 <택시 드라이버> VHS를 구입해 집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약 1년간 머릿 속으로만 상상해왔던 영화를 처음 보던 1996년 여름의 어느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석양이 지고 있던 무렵, 부모님은 직장에서 돌아오지 않아 텅 빈 집에서 혼자 도미노피자를 먹으며 감상했다. 원래 소장용으로 구입한 비디오테이프나 레이저디스크는 아까운 마음에 절반씩 끊어 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몰입감이 심해 멈출 수 없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에는 다 먹지 못한 피자 대신 복잡한 여운으로 포만감이 들었다. <택시 드라이버>는 그렇게 청소년기의 내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20대 초, 마음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영화를 몇번이나 보았다. 랭스턴 휴스의 시처럼 물리적, 정신적 폭력과 억압된 감정이 끓어넘치는 이 영화는 볼 때마다 상처받은 마음을 쓰다듬어주고 분노를 달래주는 마력이 있다. 10대 시절 존경해 마지않던 트렌트 레즈너는 이 영화를 27번 넘게 봤다고 하는데, 충분히 공감한다.
<택시 드라이버>는 반복적인 관람에도 질리지 않는 여러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강렬한 코러스나 멜로디라인이 있는 노래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듯이, 매번 볼 때마다 만족감을 선사한다. 콘트라스트가 강한 색감의 화면은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보고 또 봐도 아름답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1970년대 미국의 풍경은 아련하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질투심에 불타는 택시 승객으로 등장해 중얼대는 장면이나 주인공이 모텔에서 무기 밀매상에게 총기를 구입하는 장면은 볼 때마다 입가에 음흉한 웃음을 띠게 한다. 응축된 소외감과 좌절감을 절제되지 않은 폭발적 폭력으로 승화시키는 대단원의 장면도 볼 때마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가 벳시(시빌 셰퍼드)와 마지막으로 택시에서 나누는 대화 장면에서는 좋아하는 여자아이한테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나의 모습이 그대로 투사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한번도 가보지도 않았던 뉴욕 밤거리에 대한 향수에 한동안 시달렸고 버나드 허먼의 스코어를 연주하고 싶어서 색소폰을 배울 생각도 했다. 각본을 쓴 폴 슈레이더의 영화들을 찾아 보았고, 2014년 파리에 출장 갔을 때는 서점에서 초고가의 거대한 하드커버 사진집을 발견하고 20분간 구입을 망설인 즐거운 추억도 있다. 문득 걱정이 들기도 한다. 나는 20년이 지나는 동안 하나도 성장하지 못한 것인가? 청년기의 불안감과 갈등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마존의 <택시 드라이버> 40주년 기념 블루레이 구매 후기에서, 유튜브 동영상 코멘트에서, 그리고 각종 블로그에서 무수히 많은 개인적인 감상평과 경험담을 다룬 글들을 보면서 연대감과 안도감을 느낀다. 모두 비슷한 고민과 불안감으로 룸 미러를 계속 쳐다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최원서 그래픽노블 번역가. 본업은 국제나은병원 신경외과 원장. ‘씨네플레이’ 공식 블로그에 <히어로 월드>를 연재 중이며, 10여권의 미국 그래픽노블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