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미희, "내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 그런 나 자신을 좋아해요"
2017-07-27
글 : 김성훈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조직위원장

“어머나,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꽃 안 가져왔으면 나 삐칠 뻔했어. 호호호.”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 이틀 전인 지난 7월 11일, 호텔 그랜드 힐튼 서울에서 장미희와 인터뷰를 하는데, 최용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이 꽃을 들고 나타나자 장미희는 소녀마냥 쑥스러워했다. 순간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70, 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이끌던 ‘청순가련 비운의 여인’ 장미희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다. 한때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심의위원, 영화진흥위원회부위원장, 서울영상위원회 부위원장 등 여러 ‘봉사직’을 맡은 뒤, 언제부터인가 교수와 배우로만 활동하던 그다. 그런 장미희가 7월 23일 막을 내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조직위원장이라는 감투를 기꺼이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일까.

-방학인데도 학교에 나가시나 봐요.

=선생들은 방학이라도 나가야죠. 1989년 교직생활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한번도 쉬지 않고 교수와 배우를 병행해왔어요. 지난 6월 촬영에 들어가기로 한 영화가 대작이라 그거 준비하느라 안식년을 가졌다가 촬영이 약간 늦춰져 간만에 몸을 관리하면서 좀 쉬고 있어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조직위원장은 왜 맡게 됐습니까.

=사실 연기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가장 행복해요. 서류 가방 들고 여러 회의를 돌아다니는 건 (내가 해왔던 일들과) 전혀 달라요, 봉사직이라고들 하지 않나요.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영화진흥위원회와 고양국제어린이영화제 일까지 하면서 충분히 되돌려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꼬드겼나요.

=정지영 조직위원장님.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는데 민간 조직위원장인 그가 영화제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니 되게 뿌듯했어요. ‘(봉사직은) 더이상 안 해요’ 했는데 지난 1월 제안이 들어와서 주요 업무만 맡는 조건으로 합류하기로 했죠.

-배우를 하게 된 것도 친언니한테 떠밀려서가 아닌가요. 친언니가 <성춘향전>(감독 박태원, 1976)에 오디션 지원서를 내줘서 오디션 보러 갔다가 춘향에 발탁된 일화는 유명하잖아요.

=그때도 떠밀렸었지. (웃음) 어른이 하라면 하고, 꾀를 못 부리는 성격이라. 그 성격대로 자란 데다가 허세도, 욕심도 전혀 없어요. 내면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 연기에 맞는 성격인가 봐요.

-올해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됐던 홍상수 감독의 <클레어의 카메라>에 출연한 게 놀라웠어요. 홍상수 감독과 알던 사이인가요.

=알긴 했죠, 그의 어머니도 잘 알고. 지난해 홍 감독님이 독일에서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신작에 출연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배역이 뭔가’라고 물었더니 배급사 대표라고. 해외 촬영이라 ‘왜 해야 하는가’ 이틀을 생각하고 출연을 결정했어요.

-<비몽>(감독 김기덕, 2008)에 특별 출연한 뒤로 스크린 출연작은 거의 10년 만이 아닌가요. 왜 출연했나요.

=학생들에게 감독들의 연출 스타일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는데 홍상수 감독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인데도 그의 현장을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어 교수로서, 배우로서 그의 현장을 경험해보고 싶었어요.

-촬영 당일 아침에 대본이 나오는 홍 감독의 작업 방식을 경험해보니 어땠나요.

=그의 방식에서 장점을 많이 드러낼 수 있는 배우가 있는 반면,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야 캐릭터를 여러 각도로 펼칠 수 있는 배우가 있어요. 나는 후자에 속하는 배우죠. 캐릭터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그 시간 안에서 리서치를 한 뒤 인물의 미묘한 감정을 여러 가지로 해석해 몇 가지 대안을 갖춘 뒤 촬영에 들어가는 걸 선호해요. 지금까지 그 방식으로 작업을 해왔고.

-그래서 홍상수 감독의 현장이 생소했겠어요.

=그러니까… 서울에서 촬영했더라면 하루나 이틀 정도 쉬고 찍을 수 있었을 텐데 외국 촬영이라 스탭들이 준비하는 동안 감독님이 대본을 쓰고 있거나 초안이 나오는 거예요.

-낯설었나요.

=부족한 거지, 내가. 그의 영화에 참여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부족하다고 느꼈을 때 스스로 부끄러웠나요.

=그렇지. 시간에 쫓기듯 작업했고, 배역을 준비하기 위한 어떤 정보도 없었어요. 내 역할이 배급사 대표라는 것만 알 뿐이에요. 대본이라도 있으면 아, 이런 이야기니까 내가 얘(김민희)를 해고시키는구나라고 이해할 텐데. “네가 정직하지 않기 때문에 해고시킨다”는 대사가 있긴 했지만 왜 해고를 시켜야 하는지 확실히 잘 모르겠고. (웃음)

-감독한테 따지지 그랬어요.

=다들 그렇게 찍는다는데 어떻게 따지나. (웃음) 최선을 다해 그가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게 내 목표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방식은 나한테 맞지 않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말씀을 들어보니 이제껏 보여준 장미희의 연기와 다른 색깔이 나올 것 같아 기대가 되네요.

=주변의 제작자들이 내가 오랜만에 출연한 작품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라고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어요. 이자벨 위페르, 김민희, 정진영과 포지션도 비슷하고.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참 뭐라고 할까, 현장에서 기다리는 시간에 언제 촬영할까, 무슨 얘기할까 생각하지 않고, 도 닦듯이 가만히 있었더라면 감독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었을 텐데 싶어요. 스킬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깜짝 출연했던 <비몽>을 제외하면, 영화 출연작은 <보리울의 여름>(2003) 이후 거의 15년 만인데. 그간 드라마에는 많이 출연했던 반면 영화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가 있나요.

=1990년대 민주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간 억눌렸던 욕구들이 영화계에 한꺼번에 분출됐어요. 소재도 다양해졌고. 그러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들어간 영화들이 많이 생겨났고 1970년대에 비해 여성이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이 점점 줄었어요. 맡을 수 있는 캐릭터가 TV쪽에 많아서 자연스럽게 TV를 더 많이 하게 됐죠.

-과거 출연작 얘기도 듣고 싶습니다. 김기영 감독의 1979년작 <느미>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됐나요. 주인공 느미는 벙어리 벽돌공장 노무자인데, 강인했던 이미지와 달라 인상적이었죠.

=김기영 감독은 행동, 걸음걸이, 눈빛, 말투 모든 게 보통 사람과 달랐어요. 그분이 연출했던 <화녀>(1971), <충녀>(1972) 시리즈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어요. 김기영 감독님이 자신의 영화사에서 염재만 작가의 원작을 각색해 직접 연출하신다고 해서 당연히 출연했죠. 되돌아보면 두 순간이 떠올라요. 감독이 이렇다, 저렇다 디렉션을 줄 때 배우로서 쾌감이나 자극을 많이 느끼는 편이에요. 느미가 모든 걸 빼앗기고 밥통 하나 든 채 (애절한 상황을) 연기하는 장면을 찍을 때 땀을 흘리면서 하니까 김기영 감독님이 아무 말 없다가 내게 다가와 몸짓으로 “조금 더 절실하게, 조금 더 절실하게” 표현해달라고 주문하시더라고요. 대감독한테 디렉션을 받는구나 싶어 놀라면서 굉장히 노력했던 기억이 나요. 또 하나는 느미가 공중전화 앞에서 애를 안고 있는 장면을 찍을 때였는데 벙어리라 말을 할 수가 없잖아요. 감독님이 동물 같은 기괴한 느낌을 좀더 살려달라고 주문하면서 직접 연기해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게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요.

-<느미>에 출연하기 전에 <화녀>와 <충녀>의 윤여정 선생님을 보고 배우로서 질투를 하진 않았나요.

=질투심 같은 건 없어요. 나는 나한테 질투해요.

-질투심이 없다니, 가능한가요.

=나는 누구도 질투하지 않아요. 남에게 질투할 게 있나, 내 일을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오히려 스스로에 대해 강박적일만큼 엄격한 것 때문에 미치지. (웃음)

-당시 정윤희, 유지인과 ‘1970년대 트로이카’로 불렸잖아요. 부잣집 외동딸 정윤희, 발랄한 여대생 유지인과 달리 장미희 하면 청순가련한 비운의 여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여성보다 진취적으로 뚫고 헤쳐 나가려는 여성들을 주로 선택했어요. <성춘향전>을 찍고 TBC 드라마 <해녀 당실이>(1976)에 출연해 해녀를 연기한 적이 있어요. 깊은 바닷물에 뛰어드는 장면이 있어 당시 여배우들이 다 고사를 했다는 거야. 나한테 (제안이) 왔기에 하겠다고 했지. 그날부터 수영장에 가서 해녀 다이빙을 연습했어요. 촬영지인 경북 포항시 구룡포 앞바다에 갔는데 파고가 무려 5미터에 이르고, 풍랑주의보 때문에 배가 못 나가고 있더라고. 스턴트맨 없이 5미터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바다에 빠진 남자를 구해 오는 장면이었는데 카메라가 돌아가니 ‘에라, 모르겠다’ 하고 뛰어들었지 뭐야. (웃음) 그 다음해 출연했던 <겨울여자>(감독 김호선, 1977) 때도 ‘나는 안 죽어’하면서 14층 건물 옥상에서 옆 건물 옥상으로 건너갔고. (웃음)

-‘감독이 고 하면 나도 고’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래, 그냥 고야. 그렇게 뛰어내려서 NG가 나면 또다시 올라가 뛰어내리고, 그냥 뛰어들었어. (웃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제작진에게 요구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되 감독이 위험한 상황이라도 찍어야 한다고 하면 해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이죠.

-홍콩 유가휘와 함께 한·홍 합작 쿵후영화 <취팔권광팔권>(1981)에도 출연한 이유가 뭔가요. 그 영화에서 유가휘가 복수를 꿈꾸는 악당의 딸을 연기했는데.

=당시 액션영화를 되게 찍고 싶었어요. 홍콩 무협영화, 특히 쇼브러더스의 전설적인 배우 왕우가 출연한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감독 장철, 1967) 시리즈를 되게 좋아했어요. 유가휘는 그 뒤를 잇는 쇼브러더스의 스타 중 한명이었는데, 그가 어떻게 연기를 하나 궁금해 출연하기로 했었죠. 배역은 되게 실망했지만 말이죠. (웃음) 유가휘의 몸을 보니 군살이 없고 진한 갈색이었어요. 매일 항아리 스무개 정도를 둥글게 놓고 그 위에 올라가 가볍게 옮겨 다니는 단련을 하더라고. 다리도 머리 위까지 올리고, (호텔의 기둥을 가리키며)저 위 높이까지 뛰어넘는 훈련도 하고. 일반 음식 대신 직접 재배한 약초를 가져와 먹지 뭐야. 그때 유가휘가 데려온 어린 시절의 이연걸도 봤어요. (웃음)

-배역은 왜 마음에 안 들었나요.

=뭐, 악당 딸이라 두손이 꽁꽁 묶여 있고, 물속에 빠트리기도 하고. 그 영화를 찍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유가휘의 몸관리가 보통 배우들과 달랐다는 것이에요. 배우의 몸관리가 건강이나 미용관리가 아니에요. 배우로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사의 찬미>(감독 김호선, 1991)로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아름다운 밤이에요”라는 소감을 얘기해 화제가 됐었잖아요. 어떤 배경에서 나온 수상소감인가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아름답다’는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말이었어요. 아름답다가 식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예쁘다’를 주로 썼죠. 당시 대종상영화제에서 김지미 선생님의 <명자 아끼꼬 쏘냐>(감독 이장호, 1992)와 붙었어요. 그 영화는 1970년대 이후 임권택 감독님을 만나면서 배우로서 매우 좋은 길을 걸어오신 김지미 선생님이 직접 제작사를 차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어요. <사의 찬미> 또한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이 만든 작품으로, 일본 로케이션 촬영을 다녀오고, 내 개인 디자이너가 영화 의상 전부를 제작할 만큼 열정을 쏟았어요. 게다가 내가 교수가 된 첫해에 출연한 작품인데 연기 교과서에 나온 내용에 따라 자그마한 자기 합리화 없이 철저하게 연기했었어요. 경쟁자가 김지미였으니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얼마나 희열이 컸겠어. 그래서 ‘아, 나는 이 밤이 너무 아름답다’고 얘기한 거지. 그런데 그 말이 생경스러웠는지 한두주가 지난 뒤 한 개그우먼이 희화화를 했고, 그 뒤로 지금까지 아주 클래식한 멘트가 됐지. 아주 행복하다 싶으면 다들 그 말을 하지 않나. (웃음)

-오랜만의 인터뷰라 전날부터 긴장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어요.

=인터뷰라는 게 좋은 점, 긍정적인 면만 보여주려고 자신을 포장하지 않나요. 그게 진실이라도 그렇게 보일 수 있어 되게 싫은 거예요. 내게 주어진 책무를 진솔하게 다하는 나 자신을 좋아할 뿐이지, 그런데도 오랜만에 하기로 한 건 영화제를 알려야 하니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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