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병원의 침상 위에 누워 있다. 이 소년의 뇌는 보통 사람의 것에 비해 지나치게 발달해 있고 그래서 작은 소리에도 고통을 느낀다는 의사의 말이 들려온다. 수술을 통해 제거하는 게 불가피한데 이 경우 후유증으로 극심한 통증을 느끼거나 감정을 아예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고 덧붙인다. 소년의 지난 일들과 수술과정이 엉킨 일련의 몽타주가 흘러간다. 의사와의 문답을 통해 시청자는 소년이 수술로 인해 결국 감정을 잃었으며 향후 후유증을 겪을 수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소년의 이름은 황시목으로 소개된다. 컷은 성년이 된 황시목이 자동차 안에서 머리를 감싸쥐고 무시무시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는 대목으로 이어진다.
드라마 <비밀의 숲>은 그렇게 시작했다. 빤하고 새로울 게 없는 도입부였다. 그게 범인의 사연이 아니라는 게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대개의 장르 서사에서 이와 같은 배경은 악당에게 적용된다. 범죄자 캐릭터를 보다 입체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흔히 사용된다. 혹은 오래전 익명의 소년이 수술로 인해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정보를 흘려놓고 시청자로 하여금 저 소년의 성장한 모습, 즉 범인이 등장인물들 가운데 과연 누구일까 추리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응용되기도 한다. 이게 흔한 쓰임새다.
장르 드라마의 네 번째 지각변동
<비밀의 숲>은 다른 길을 간다. 수술로 인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 건 다름 아닌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는 검사다. 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객관적 사실관계에 근거해 사건의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덕분에 드라마 초반에는 황시목이 범인이라는 추측들이 난무하기도 했다.
보통의 이야기에서 악당의 배경일 수 있는 인생을 짊어진 주인공 황시목은 <비밀의 숲>에서 일종의 슈퍼히어로로 기능한다. 감정이 없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기 책무를 다할 수 있는 인물이다. 황시목의 동료들이 빤하게 펼쳐진 숲을 외면하고 “여기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건 그들이 갖가지 사정과 관계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황시목은 “이건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숲인데요?”라고 반문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어떠한 외압과 인연에도 흔들리지 않고 숲의 속살을 관통할 수 있다.
이건 이 드라마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이기도 하다. 누구도 제 할 일을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가운데 오로지 인간다움의 보루라 할 만한 감정 자체가 제거된 인물만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수사기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사회이기 때문이다.
<비밀의 숲>은 그간 오랜 시행착오와 중요한 성과를 반복해왔던 한국의 장르 지향 드라마 가운데 장점만을 고루 계승한, 가장 빼어난 결과물이다. 한국의 장르 드라마는 세번의 중요한 지각변동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김은희의 <싸인>, 송재정의 <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 그리고 김은희의 <시그널>이 그것이다.
이 세 차례의 지각변동은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가 단편이 아닌 연작으로서 갖추어야 할 적정한 수준의 톤과 매너를 조금씩 다듬으며 이어졌다.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장르적 쾌감을 거스르지 않는 수준에서 과잉되지 않도록 억누를 수 있어야 한다. 빤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대중성을 겸비하기 위해 연주에 가까운 완급 조절이 필요하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당대의 가장 훌륭한 작가와 연출자란 앞선 것들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것을 골라낼 수 있는 눈을 가졌고, 그것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다듬어 계승해낼 줄 아는 지혜를 갖춘 자들이었다. <비밀의 숲>은 <싸인>과 <나인: 아홉번의 시간여행>, <시그널>을 잇는 네 번째 지각변동으로 기록되기에 손색없는 드라마다.
완벽한 역할 분담
관객은 탁자 아래 시한폭탄이 있는 걸 안다. 스크린 속의 인물들은 그걸 모른다. 그들은 탁자 주변에서 태연히 차를 마시고 있다. 시한폭탄의 초침이 흘러갈수록 관객은 초조하다. 이게 서스펜스다. 능력 없는 창작자들은 제대로 된 서스펜스를 설계하는 데 실패했을 때 등장인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지연으로 가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민폐 캐릭터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애꿎은 배우만 욕을 먹는다. <비밀의 숲>에 그런 건 없다. 작가는 설계하고 연출자는 구현하고 조율하며 배우는 그것을 수행한다. 잘 굴러가는 이야기일수록 이와 같은 분담은 또렷하다. <비밀의 숲>에서 이 세 분야는 자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낸다.
그 가운데 이수연 작가의 존재감이 특별하다. <비밀의 숲>이 데뷔작이다. 그런데 극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치밀함에 남다른 구석이 있다. 흡사 가명을 사용하는 기성 작가인가 싶기도 했다. 김은희 작가가 한국 장르 드라마의 애거사 크리스티라면 이수연 작가는 앨러리 퀸 같다.
드라마에서 연출자의 역할은 자칫 폄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시청자가 보게 될 그림을 완성하는 건 연출자다. 얼마큼 보여주고 얼마큼 감추며 어디서 자르고 어디를 이어야 할지 결정하고 통제한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입과 얼굴들, 즉 배우의 연기를 조율한다. 연출자가 이를 잘 수행하지 못해 좋은 이야기와 배우들을 가지고도 극의 흐름과 무관하게 서로 전혀 다른 톤과 매너를 가진 캐릭터들의 천하제일연기무도회를 보여줄 뿐인 영화와 드라마가 숱하게 많다. 연출자의 뚜렷하고 확실한 비전 없이 좋은 드라마는 결코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안길호 PD는 <비밀의 숲>의 주목할 만한 완성도를 이끌어낸 주역이다. 후반부 ‘07’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드라마 전반의 톤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친절한 설명으로 흐름을 흔든 건 아쉽다. 하지만 다소 부진한 시청률과 중간 유입이 어렵다는 호소를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안타까운 부분이다.
진정한 주연은 황시목 특임팀
배우들에 대해서는 별 할 말이 없다. 너무 잘한다. 조승우부터 배두나, 이준혁, 유재명, 신혜선, 그 밖의 아주 작은 배역을 맡은 배우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훌륭하다. 모든 등장인물이 극의 성격에 맞추어 정돈되어 있고 저마다 빛을 발해야 하는 순간에 번쩍거리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서동재 역할의 이준혁과 이창준 역할의 유재명은 큰 발견이다. 전체 그림에서 한여진 역할의 배두나는 다소 손해보는 위치다. 황시목의 대척점에서 그의 인간다움을 메우는 한여진은 가장 수수께끼가 적고 평면적이며 전형적일 수밖에 없는 역할이다. 한여진이 캐릭터의 명백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평면적으로 비추어지지 않는다는 데서 배두나의 저력이 드러난다. 배두나는 본 적이 있는 캐릭터를 본 적이 없는 연기로 구현해내는 묘한 박력을 가진 배우다.
<비밀의 숲>은 ‘어른들의 사정’으로 흔하게 포장되는 위태로운 관계들이 서로 얽혀 거미줄처럼 펼쳐진 세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거대한 숲과 같다. 그리고 시청자에게 이 숲의 또다른 한 그루 나무가 될 것인지, 아니면 숲에 길을 내는 사람이 될 것인지 묻는다. 우리는 황시목처럼 감정을 제거해 혼자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또한 이창준처럼 어둠의 자경단이 되어 불의를 제거하기 위해 자폭할 수도 없다. 우리는 소시민이다. 숲에 길을 무슨 수로 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의 진정한 주연은 황시목이 아니라 황시목 특임팀일지 모른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언터처블>에서 우리는 유사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네스 반장은 노년의 경관 말론과 갓 경찰이 된 스톤, 키보다 큰 마음을 가진 월레스를 모아 팀을 이루고 마침내 알카포네를 잡아넣는 데 성공한다. 선의를 가진 개인의 힘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 아무리 어둡고 빼곡하게 얽힌 숲이라도 길을 낼 수 있다는 희망. 감정이 제거된 자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그만큼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사회를 상정하고 있음에도 이 드라마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상한 동기부여를 불러일으키는 열쇠는 거기 있다.
벌써 끝이라니…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아직 마지막 두편의 에피소드가 방영되기 전이다. 어떻게 결말이 나든 좋으니 황시목 밥 먹을 때 전화 좀 그만 왔으면 좋겠다. 황시목 특검팀이 매일 30분씩 대사 없이 밥 먹는 것만 틀어줘도 영원히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벌써 끝이라니 섭섭하다. 좋은 드라마와 이별하는 게 갈수록 더 힘이 드는 걸 보니 나이를 먹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