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40년 프랑스. 40만의 연합군이 고립된 덩케르크 해안은 수심이 얕아 구축함이 접근 할 수 없었다. 작은 배들이 철수 군인들을 깊은 물의 군함으로 실어 나르거나, 수평선을 향해 길게 벋은 잔교 위에 병사들이 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희박한 귀향의 확률이라도 얻으려면 적군 폭격기 앞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다닥다닥 붙어선 군인들로 잔교는 가려지고 마치 인간들로 이뤄진 오작교를 보는 듯하다. <군함도>에서도 극중 생매장 위기에 당면한 조선인 노동자들이 탈출을 위해 석탄 운반로를 줄줄이 타고 오른다. 둘 다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을 형상화한, 어깨가 빠지도록 뻗은 손같은 구조물이다.
07/18
<덩케르크>를 좋아하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론조사라도 반영했나 싶을 정도로, 그동안 내 눈에 크리스토퍼 놀란 영화의 약점으로 비친 요소를 죄다 걷어내고 놀란이 잘하는 것에 집중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놀란의 영화는 감정과 캐릭터 조형에 서투르고 많은 경우 여성 인물을 어떻게 다룰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인셉션>과 <인터스텔라>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듯 놀란이 시간을 재편하기 위해 도입한 트릭과 메커니즘, 과학 이론을 구구절절 해설하는 사용설명서 같은 대사를 수반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생 조너선 놀란, 작가 데이비드 고이어가 손을 떼고 참전자 증언을 토대로 놀란이 시나리오를 쓴 <덩케르크>는 모든 불만을 동시에 해결한다.
어떻게? 첫째, <덩케르크>는 캐릭터와 감정을 다루지 않는다. 병사 개인을 부각하지 않은 채 전쟁을 재현하는 이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사연이 드러나긴커녕 이름도 제대로 불리지 않는다. 가장 많은 스크린타임을 차지하는 병사(핀 화이트헤드)의 이름이 토미라는 사실도 엔딩크레딧을 읽어야 알 수 있다. 베트남전이건 제1차 세계대전이건 무릇 전쟁영화에는 참호나 모닥불을 둘러싸고 고향에 두고 온 애인에 관한 대화가 오가고 지갑 속 사진을 보여준 다음, 엄마를 그리워하던 어린 병사의 산화가 이어지는 식의 시퀀스가 있기 마련인데 <덩케르크>는 예외다. 심지어 독일군의 얼굴이 한번도 드러나지 않기에 안티테제로서 인물의 속성을 가정하는 길도 막혀 있다. 놀란은 캐릭터의 배경이나 퍼스낼리티가 아니라 오직 영화가 그려내는 인물이 처한 물리적 상황으로부터 관객이 동일시의 근거를 찾도록 했다. 악인을 보는 관객이 일시적으로 그가 발각되지 않기를 바라도록 숏을 축조해나간 히치콕이 놀란의 전범이다(<덩케르크>의 잔교 몹 신에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도 있다). 물론 관객은 영국군 시점 영화 속 영국군을 자동적으로 편들게 되지만 영화는 그것 외의 명분이나 고귀함을 에필로그에 가까운 결말 전에는 말하지 않는다. 병사들은 아파서 울고 엄마를 찾고 자신만은 집에 가야 한다고 허우적거린다. 공군기 파일럿도 작전에 필요한 말 이외의 비장한 멘트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덩케르크 정신’을 대사로 표현하는 인물은 개인 소유 요트로 구조에 자원한 도슨(마크 라일런스)인데 그는 전쟁 후방에 속하는 사람이다. 둘째, <덩케르크>의 풍경에는 여성이 없다시피하다. 간호 장교와 구조선을 몰고 온 민간인 여성 한명 정도가 전부다. 벡델테스트에 응시도 못할 수준이지만, 이는 실제 1941년 5월 24일부터 열흘간 덩케르크에 여성이 드물었기 때문이라는 정당화가 가능하다. 셋째(이것이 영화적 아름다움과 가장 깊이 관련돼 있는데), <덩케르크>에는 주석이 없다. 놀란 특유의 시간 재편 방정식에 관한 각주가 없고 그냥 영화를 체험하면 된다. 다시 말해 <메멘토>의 단기기억상실증, <인셉션>의 꿈의 중층 속으로 침투하는 기술, <인터스텔라>의 5차원과 우주의 시차가 영화 안에 도입된 메커니즘이라면 <덩케르크>에서는 ‘잔교-1주일’, ‘바다-1일’, ‘하늘-1시간’의 세 시점을 엮어놓은 영화의 구성 자체가 시간의 상대성을 입증한다. 영화 몸통이 곧 상대적 시간 체험을 가능케 하는 투명한 기계인 셈이다. 따로 진행되던 시간 차원과 인물들이 클라이맥스에서 한데 모여 매듭지어지는 양상을 보였던 전작과 달리 <덩케르크>의 육해공 레벨은 잠깐 한점으로 수렴했다가 다시 각각의 궤도로 발산한다. 다만 그들이 재현하는 리얼리티는 하나다. <라쇼몽>과 같은 증인에 따라 다른 진실은 없다. 요컨대 <덩케르크>의 인물은 질보다 양이 중요하고, 시간의 중층 구조도 그것이 끝내 드러내는 어떤 비밀이 아니라 병치 자체가 주제다. 탈출하는 육군의 덩케르크, 자발적으로 병사들을 구하러 온 시민의 덩케르크, 치하받지 못하고 의무를 다한 공군의 덩케르크가 영화에서 동등하다. 실제 역사를 재현한 <덩케르크>의 시간 실험은, 지금까지 놀란 영화를 지칭해온 퍼즐, 게임, 클리닉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 일단 세 시간대의 교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해도 영화의 전체 상황을 따라갈 수 있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 동안 ‘계산’을 해야 했던 부담이 사라졌다. 한편 시간대의 재현을 예민하게 따라가는 관객에게 <덩케르크>는, 시네마는 궁극의 타임머신이고 인간이 체험하는 시간의 양질을 ‘조작’할 수 있는 예술임을 입증하는 역사상 가장 값비싼 실험이다. 동시에 제일 순수한 형태로 증류된 놀란 영화일 것이다.
07/24
<덩케르크> 언론 시사는 대형 IMAX 레이저 상영관에서 열렸다. 돌아오는 길에 결심한 대로- 안 했대도 매진이라 별수 없었지만- 평범한 상영관에서 2차 관람을 했다. 주요 목적은 세 타임라인을 놀란이 어떻게 땋았는지 좀더 파악하는 것이었다. 영화를 시작하는 7분가량의 ‘잔교-1주일’ 단락에서 <덩케르크>는 전황을 설명하는 텍스트를 도입부에 넣는데 그 방식이 특이하다. 이 설명은 이상하게도 읽기 힘들 만큼 빠르게 깜박이며 한줄씩 늘어난다. “적군은 영국, 프랑스군을 밀어냈다”, “적군은 영국, 프랑스군을 해변으로 밀어냈다. 영국군은 해변에 갇혔다”, “적군은 영국, 프랑스군을 해변으로 밀어냈다. 영국군은 해변에 갇혀 구출을 기다린다” 이런 식이다. 다시 보니, 덩케르크를 탈출하는 병사들이 보내는 1주일, 그중 영국 민간 선박들이 구조에 나서는 하루, 그 하루 가운데 공군 삼각편대가 엄호하는 1시간이 중첩될 영화의 구성을 예고하는 막대그래프 같다.
놀란 감독이 지상군의 시간으로 설정한 1주일은 5월 29일부터 처칠이 성명을 발표한 6월 4일까지로 추정된다. 이중 두 번째 시간대인 도슨의 문스톤호가 출항했다 돌아오기까지 하루는 엿새째인 6월 3일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파리어(톰 하디)와 콜린스(잭 로던)가 스피트파이어기를 타고 삼각편대로 출격해 불시착하는 한 시간은 6월 3일 오후 3시부터로 추정된다. 최초로 세 시간대가 소개되는 길이도 차이가 난다. 덩케르크의 지상 상황이 약 7분, 도셋에서 도슨이 출항하는 장면이 1분 남짓, 스피트파이어 편대의 소개가 20여초다. 세 갈래의 시간은 영화 내내 교직되는데, 소제목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육해공 상황이 동시진행 중인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다 날씨가 너무 변덕스럽다고 느끼게 되고 마침내 45분 무렵 킬리언 머피가 연기하는 U보트에 격침된 생존자가 연이은 장면에서 현재-과거가 뒤바뀌어 등장할 때에야 우리는 편집의 규칙을 감지한다. 관객이 뒤늦게야 깨닫는 까닭이 몇 가지 있다. 168:24:1의 길이를 가진 세 시간대를 106분 러닝타임 안에 왈츠를 추듯 오가며 재현하려면 필연적으로 차등화된 시간 생략이 필요하다. 즉 육상 파트에서 시간의 점프가 가장 큰 반면 공중 파트는 실시간에 가깝게 그려진다. 그런데 <덩케르크>의 편집은 비약을 교묘하게 가린다. ‘날짜변경선’은 은폐돼 있고, 다른 날, 다른 시각에 세곳에서 일어난 비슷한 사고가 매치컷된다. 이를테면 토미와 전우들이 탈출을 위해 탄 어선에 물이 새어들어올 때 추락한 스피트파이어 전투기의 조종실도 침수되고, 영국 민간배가 덩케르크 해안에 접근하는 가운데 먼바다에 있는 도슨이 키를 잡고 있는 모습이 끼어든다. 물론 음악도 이음매를 덮는 데 한몫한다. 결국 편집된 하나의 시퀀스 단위에서는 시간이 단속 없이 흐른다는 착시가 가능해진다. 이는 어쩌면 영화의 주제에 봉사한다. 덩케르크 해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다른 순간에 같은 체험을 했다. 전쟁의 달력은 어제와 그제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내일과 모레는 비슷하게 아득할 것이다. 만약 <덩케르크>가 같은 이야기를 단일한 타임라인으로 그리며 중반 이후 민간 선박을 등장시키고 클라이맥스에 접근해서야 공중전을 넣었다면, 인물들의 체험은 지금처럼 동등한 무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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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의 달인
1980년 서울의 개인 택시기사 만섭(송강호)은 차선 바꾸고 샛길 찾는 데에 능하고 무엇보다 후진 솜씨가 뛰어나다. <택시운전사>는 운전 습성을 통해 초반부터 만섭이 누가 앞을 막으면 두말없이 돌아가는 데 익숙한 사람임을 그린다. 장애물을 정면돌파하는 일은 소시민 만섭에게 가망도 없을뿐더러 유일한 밥줄인 자동차만 상하는 길이다. “사람이 참을 줄도 알아야지 살다보면 억울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딸을 타이르는 만섭의 말은 곧 이 남자의 신조다. 그런데 일당 10만원에 혹해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치만)를 태우고 광주로 향한 만섭은 듬성듬성 놓인 바리케이드와 맞닥뜨리는 순간 당황한다. “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전진을 택한 그는 광주에서의 하루를 겪은 뒤 도망치듯 서울로 ‘후진’한다. 그러나 순천에 이르러 견디지 못하고 핸들을 꺾어 유턴한다. 그의 인생도 백팔십도 돌아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