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조지 A. 로메로 <시체들의 새벽>과 톰 새비니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리메이크
2017-08-03
글 : 박수민 (영화감독)
밤과 새벽 사이
<시체들의 새벽>

‘옛날 어린이들에게는 호환, 마마, 전쟁 등이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될’거라던 경고를 철저히 무시한 지금 20세기 말의 옛날 어린이로서, 이 예언은 거의 적중해 지금의 나 자신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다. 비행 청소년이 되는 건 어떻게 넘겼는데, 결과적으로 비틀린 성인이 되었다. 영상매체와 영화 예술과 온갖 장르 문화에 매혹당한 나머지 애호가로 만족하지 못하고 무려 작가가 되겠다는 참으로 그릇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 탓에 매일 낮밤을 책상 앞에서 진도가 지독하게 안 나가는 글쓰기의 어려움과 고통에 비명을 지르다 데드라인 직전에야 뜬금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내 삶의 이 모든 총체적 재앙은 어디서 비롯되었나? 근원지가 어디인가? 미래의 나를 날마다 죽이게 될 그날의 계획은 언제 추진되었나?

중학생 때부터 금요일만 되면 하굣길에 비디오 가게에 들르는 것이 정해진 일과였다. 고등학교에 올라가 수험생이 된 뒤에도 똑같았다. 누가 뭐라건 주말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 영화만 봤다. 내게 평일이란 주말에 비디오를 몰아보기 위해 별수 없이 버티는 나날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꽂힌 장르는 당연히 ‘호러’였다. 비디오 가게의 공포물 코너 앞에서 몇 시간씩 머물렀다. 오랜 시간 탐색과 검토를 마친 끝에 비디오를 여러 편 대여해 책가방에 넣고 또 다른 비디오 가게로 갔다. 가게마다 보유한 라이브러리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이상할 정도로 비디오 케이스 커버 디자인에 탐구심이 강했다. 껍데기의 그림과 문구가 영화 본편과 다른 차원으로 무시무시한 경우가 많았다. 영화보다 더 무서웠다.

이미 PC통신으로 진정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밀거래하고 있었지만, 국내 출시가 불분명한 고전 희귀 작품을 비디오 가게에서 찾는 일이 당시 내 인생 최대의 즐거움이자 혼자만의 보물찾기였다. 어느 날 새로 뚫은 가게에서 ‘이블 헌터’라는 제목의 비디오를 발견했다. <이블 데드2>(1987)의 해골에 눈을 합성한 포스터가 커버였다. 해골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안녕하시었어요?” 이 커버를 디자인한 분의 영혼과 삶의 궤적이 나는 여태 궁금하다. 1990년대 초에 영흥미디어에서 일했을 그는 결코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이미지에 갖다 붙일 문구를 지어냈을 것이다. 한글 제목 아래에 적힌 영어 제목은 ‘Dawn into Fear’. 내가 알기로 <이블 데드2>의 부제는 ‘Dead by Dawn’이다. 그건 다른 회사에서 나온 걸로 진작 보았으니 감독이 조지 A. 로메로일 리 만무했다. 나는 검토에 들어갔다. 틀림없어.

내가 옳았다. ‘이블 헌터’는 바로 <시체들의 새벽>(1978)이었다. 기대해 마지않았던 영화가 드디어 재생되고, 한밤중 나의 뇌리에 번개가 번쩍(!)했다. 내 삶이 알 수 없는 세계를 향해 제멋대로 굴러가기 시작한, 그 모든 일이 시작된 밤. 그리고 또 밤들. 집에는 삼촌이 두고 간 Goldstar GS-V11 VHS 캠코더가 마치 누가 일부러 계획한 덫인 양 놓여 있었고, 샘 레이미와 <이블 데드>의 성공담에 경도된 나는 얼굴에 케첩을 바르고 친구들과 공포영화를 만들며 놀았다. 그러나 ‘이블 헌터’를 보기 전까지는 그건 어쨌거나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시체들의 새벽>을 본 새벽에 나는 이전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을 했다. 그때 나는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 가장 만화를 잘 그리는 중학생이었고, 장차 만화가가 되는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뒤 반드시 영화감독이 되어 이 영화를 한국에서 리메이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리지널이 아니라 리메이크의 욕망이 한 소년의 장래 진로를 뒤틀었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조지 A. 로메로의 ‘Dead’ 시리즈는 본편의 끝없는 진화만큼 리메이크도 활발히 이어졌다. 잭 스나이더의 리메이크작 <새벽의 저주>(2004)가 개봉했을 때 육군보병학교를 다니던 나는 주말 외출을 나와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끝내줬고, 크게 질투심을 느끼진 않았다. 내가 할 리메이크는 배경이 이곳 한국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가 있을 터였다. 다만 미친 듯 뛰어다니는 좀비들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 그 자극적인 재미가 마음에 걸렸다. 대니 보일의 <28일후…>(2002) 이후로 달리는 좀비들이 대세가 되었다. 내 생각에 로메로의 원작이 가진 고유한 가치는 좀비에게 물려 똑같이 좀비가 되느냐 마느냐가 공포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영화에서 진짜 공포는 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좀비의 존재가 압도적이어선 안 되었다. <시체들의 새벽>에서 특수분장을 맡았던 톰 새비니가 1968년 원작을 컬러로 다시 만든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90)을 아직까지는 가장 훌륭한 리메이크작이라고 보는 이유다.

리메이크작에서 ‘벤’은 68년 원작을 찍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가장 연기를 잘하는 배우 토니 토드가 맡았다. 나는 늘 영화 속 그에게서 ‘엉클 톰’의 한이 서린 듯한 존재감을 느낀다. 영화 내내 그는 눈물과 땀을 같이 흘린다. 벤은 이 지경이 된 세상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슬퍼한다. 좀비의 머리에 용감히 쇠 지렛대를 박으면서도 하늘을 향해 “God damn you!”라고 외친 다음, 다시 땅을 향해 “God damn all of you!”라고 구슬프게 외친다. 스턴트 배우 퍼트리샤 톨먼이 연기한 ‘바버라’는 공황에 빠져 웃는 듯 기이하게 운다. 그러나 그녀는 이 리메이크작에서 원작보다 한 단계 더 진보한 캐릭터다. 나는 1990년작의 바버라가 거추장스러운 치마 대신 바지를 입고 장총을 집어 드는 장면을 사랑한다. 그녀는 좀비와 맞서 싸워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걸 가장 먼저 깨닫는 사람이다. 리메이크작 역시 지하실에 계속 숨어 있길 원하는, 눈앞의 상황을 보고도 믿지 않는 꼰대 이기주의자 때문에 파국을 맞이한다. 마지막에 결국 누가 살아남느냐는 문제에서, 이 영화는 원작의 냉소와 허무를 존중하면서도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결말을 만든다. 타협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리메이크작의 결말을 좋아한다.

톰 새비니는 원작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가능한 한 최고의 특수분장과 연출을 선보였다. 리메이크작의 연기 조정도 무척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로메로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영웅은 없고 다만 상황을 타개하려는 의지만이 절박하다. 그런데 중심에는 이 의지를 잠식하는 절망이 있다. <시체들의 새벽>에서 내가 주목한 것도 대재앙을 맞이한 사람들의 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대부분 얼이 빠져 있다. 살육의 현장에서 넋을 잃지 않으려고, 광기의 한복판에서 이성의 끈이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도시에서 헬기로 도망치기 직전 지상의 남자가 “담배 있어요?” 하고 묻자,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던 주인공 4인조가 이륙하자마자 너도나도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장면은 피식 웃음이 나오는 진실의 순간이다. 세상이 이렇게 된 와중에 남은 인간들은 오히려 축제를 맞는다. 총을 들고 우르르 바깥으로 나온 그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좀비들을 신나게 쏴 죽이고 매달고 불태운다. 사육제 장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 헬기는 어느 쇼핑몰 옥상에 착륙한다. 자본주의 천국에 아지트를 만들고 온갖 것이 다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생활을 누리며, 그들은 깊은 공허를 느낀다. 이 영화의 공포는 표피적이지 않다. 말초신경이 아니라 내장을 파먹듯 내면의 감정을 노린다. 2004년 나온 격렬한 리메이크작과 달리 원작은 터무니없이 잔인하면서도 줄곧 우습고 가끔 신나는데 미칠 듯 절망적인 기이한 영화다. 나는 이런 영화도 가능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B급 싸구려가 아니라 미래의 영화였다.

비디오 시절의 경고대로, “한편의 비디오는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놓을 수도 있다”는 건 사실이다. 무려 20여년이 지나버렸지만 리메이크에 대한 내 개인적 욕망과 공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다만 조지 A. 로메로 감독을 만나고 그에게 공식적으로 허락과 인증을 받는 일이 영영 요원해져 슬프다. 내가 너무 부족하고 게을렀다. 부고를 듣고 그의 영화를 다시 보면서 비디오로 지새우던 과거의 밤들을 다시 떠올린다. 그 수많은 밤과 새벽 사이에 본 영화들이 내 유일한 영화적 밑천이며 골수고 뼈대다. “지옥이 꽉 차는 날, 시체들은 땅 위를 걷게 될 것”이라고 그는 예언했지만, 다행히 천국의 방은 넉넉한 것 같다.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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