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의 네번째 영화는 그 제목을 통해 최소한 세편의 영화(제목)를 상기시킨다. 먼저 한글제목 ‘복수는 나의 것’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1979년 작품 <복수는 나의 것>을, 영어제목 ‘Sympathy for Mr. Vengeance’는 장 뤽 고다르의 <사탄에 대한 동정>(Sympathy for the devil, 1968)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글제목과 영어제목이 함께 어울려 아벨 페라라의 <복수의 립스틱>(Ms. 45: Angel of Vengeance, 1980)을 끌어들이는 식이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 감독의 영화광적 기질을 문제삼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이 보여주는 형식적 특징들과 주제적 요소에 대한 암시를, 위와 같은 다분히 장난기 어린 영화제목으로부터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수는 나의 것>을 보면서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다른 이에게 복수하는가를 살펴보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럼 이 영화는 그저 ‘끔찍한’ 영화, 혹은 ‘충격적인’ 영화로만 남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 알레고리화된 ‘복수씨’(Mr. Vengeance)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가를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한다.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에서 복수의 윤리학 따위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복수의 역학(力學)으로 직접 나아간다. 만일 우리가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인물들을 지켜보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인물들을 괴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탈인격화된 복수의 존재를 생생히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박찬욱은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데올로기적인 위장을 걷어버리고 살풍경한 꼭두각시 놀음의 무대로 우리를 안내한다. 한마디로 <복수는 나의 것>은 결코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복수에 관한 이야기, 혹은 ‘마리오네트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과연 ‘복수씨’는 누구인가?
‘복수씨’는 누구인가? 송강호가 연기한 동진일까? 아니면 신하균이 연기한 류일까? 혹은 영미(배두나)의 유령처럼 나타난 이른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네 사내들? 아마 동진이 바로 ‘복수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가장 쉬울 것이다. 그럼 영화제목은 이 동진에 대한 동정 혹은 연민으로 읽힌다. 영화 속에 등장한 다른 누구의 이름을 동진의 자리에 대신 가져다두어도 상관없다. 그때 영화는 어쨌거나 ‘복수씨에 대한 동정’이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류가 일하는 공장에서는 끊임없이 시끄러운 기계소리가 울려 퍼진다. 오직 기계소리뿐이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벙어리 류뿐만이 아니라 공장 내부의 어떤 노동자도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그런데 류가 듣지 못하는 그 소리, 귀에 거슬리는 그 소리를 우리는 듣는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이 장면에서 박찬욱은 거의 관객에게 들을 것을 강요하듯 사운드를 증폭시킨다. 영화의 다른 장면들- 가령 류가 자기 누나의 담당의사와 만나는 장면, 류가 공장주로부터 퇴직 통보를 받는 장면- 에서 류의 시점 숏이 보여질 때 들려주던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따라서 류가 일하는 공장장면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비가시적인 것의 존재감을 증폭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공장내부의 모습이 부감으로 찍혀 보여질 때, 여기서의 카메라의 시선은 담담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먹이를 찾는 잔인한 복수의 시선에 다름 아니다. 일을 마치고 공장 밖으로 빠져나오는 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서서히, 마치 꿈처럼 류의 몸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제 육체를 얻은 복수는 자신이 입은 육체를 바꿔가며 행동을 개시한다. 그러기 위해 일단 하나의 사슬을 만들어야 한다. 이 사슬의 가운데에 놓인 고리는 무언가를 잃고 또 무언가를 남으로부터 빼앗은 인물이다. 즉 그 고리는 두개의 항들로 이루어져 있다. 류는 누나를 잃고 보배를 동진에게서 빼앗았다(류는 동진에게 보낸 협박편지에 보배를 자신이 ‘훔쳤다’고 쓴다. 이건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복수가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동진은 보배를 잃었고 영미를 죽였다. 사슬의 양끝에 놓인 고리는 두개의 항들 가운데 하나가 빠져 있다. 영미는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 장기밀매업자들은 류의 누나가 죽게 만들었다. 복수의 작동은 장기밀매업자들이라는 고리를 부수는 것으로 시작해서 류를 거쳐 그리고 동진으로 이어진다. 영미라고 하는 마지막 고리는 유령의 고리이다. 이미 육체를 잃은 그녀에게 복수가 깃들 수는 없다. 그래서 복수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의 네 사내의 몸에 깃든다. 우리는 분명히 영화 도중 한 형사의 입을 통해 이 동맹의 조직원은 오직 영미 한 사람뿐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따라서 영화 마지막에 나타난 이 네 사내들은 실상 동맹의 조직원이 아니라 복수가 자신이 만든 사슬을 완성하기 위해 불러들인 꼭두각시들이라고 보아야 옳다. 그들의 표정없는 얼굴에는 증오심 비슷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은 기계처럼, 좀비처럼 움직인다. 류나 동진의 그것과는 달리 복수심 없는 육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복수는 앞서 말한 탈인격화된 복수의 성격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 어어부프로젝트의 노래 ‘복수는 나의 것’이 들려온다. “너에겐 정말 미안한데∼ 복수는 나의 것∼” 그렇다. 복수는 복수의 것이다. 그는 어디선가 또 다른 육체를 찾을 것이다. 그는 텅 빈 인간들의 육체가 만들어내는 자리들 사이로 움직여다닌다. 때로 복수는 인물들보다 앞서서 움직인다. 가령 동진이 감전된 류를 방으로 끌고 들어와 잠시 그를 지켜보더니 별안간 달려들 때, 이때 벽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동진보다 빠르게 류의 몸으로 달려든다. 아니 그림자가 동진을 떠민다. 그런데 왜 이 이상한 유희를 지켜보며 감독은 ‘복수에 대한 동정’(Sympathy for Mr. Vengeance)을 읊조리는가? 혹시 그가 느꼈던 것은 ‘복수에 대한 공감’(Sympathy with Mr. Vengeance)은 아니었을까? 이쯤 되면 정말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틈’을 만드는 인간들
그렇다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인물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누나를 구하기 위한 신장을 얻으려다 악질 장기밀매단에 걸려든 류의 옆구리에 생긴 상처, 그리고 해고된 데 대한 앙심을 품고 시위를 벌이는 팽기사를 말리려던 동진이 팽기사의 칼에 의해 손바닥에 입은 상처가 바로 그러한 틈이다. 그리고 팽기사가 자신의 배에 낸 칼자국, 자살한 류 누나의 손목에 난 칼자국도 있다. 그리고 부검되는 시체의 가슴에 생긴 칼자국은 물론이고 죽은 보배의 커다랗게 열려진 눈과 죽은 영미의 눈 또한 틈이다. 이러한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복수는 나의 것>에서 박찬욱은 분명 끔찍하다 여길 만한 장면들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그는 사실 하드고어적인 묘사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단지 그러한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이 가혹한 꼭두각시극의 무대에서 오직 틈들만이 인간의 존재를 입증한다.
그런데 류와 동진의 육체에는 각각 또 하나의 틈이 만들어진다. 동진은 류를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간 뒤 류의 발목을 칼로 깊게 그어버린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개천을 붉게 물들인다. 얼마 뒤 동맹 조직원들의 칼에 의해 동진은 또 한번 손바닥에 상처를 입는다. 그렇다면 앞서 이들의 몸에 생긴 틈이 복수가 깃들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의 틈은 복수가 빠져나가기 위한 것인가? 어쩌면. 그러나 차라리 여기 희한한 제의(祭儀)가 있다고 보는 편이 더 흥미롭다. 류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동진의 딸 보배가 죽은 그 자리를 붉게 물들인다. 잔혹한 위령제이다. 동진이 피우던 담배를 물위에 던지는 행위는 일종의 분향의 의식이다(비록 어이없을 만큼 ‘폼 잡힌’ 숏이라 거의 우스꽝스럽게 보일 지경이지만. 그러나 이처럼 괴이한 숏들과 편집이 <복수는 나의 것>이 지닌 매력의 주된 원천이 됨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동진은 류에게 말한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그러니까’라니? 이때 동진에게 중요한 것은 류가 죽는 것이 아니라 바로 틈에서 흘러나온 피로 보배가 죽은 자리가 덮이는 것이다. 마치 류에게 중요한 것이 장기밀매업자들의 죽음이 아니라 그들의 몸에 틈을 내어 신장을 꺼내어 먹는 것이었던 것처럼. 복수에 사로잡힌 자들은 자꾸 제의에 이끌린다. 그리고 틈을 통해 제의의 제물이 나온다. 이러한 제의의 순간을 보여줄 때만큼 박찬욱이 숙연해지는 순간은 없다. 왜냐하면 그건 괴물들이 여전히 자신이 인간임을 입증하기 위해 벌이는 숭고한 제의이기 때문이다. 반면 복수가 벌이는 제의는 우스꽝스럽다. 죽어가는 동진의 가슴에 붙여진 제문(祭文)처럼. 그의 피는 오직 그 자신만을 적실 뿐이다.
올해 꼭 봐야 할 걸작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을 복수의 시선으로 바라본 꼭두각시극처럼 만들었다. 복수는 이 비극을 유희하듯 즐긴다. 그러한 유희는 때로 우리에게 모순적인 것으로 비친다. <사탄에 대한 동정>에서 롤링스톤스가 스튜디오에서 연주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큐(처럼 보이는) 장면 사이에 불쑥 끼여들곤 하던 정치적 선언들과 인터뷰들만큼이나 <복수는 나의 것>의 몇몇 ‘정치적’ 장면은 낯설고 기이하다. 거리에서 (심지어 장기밀매업자들 앞에서) ‘미군철수’, ‘재벌타파’ 등을 외치며 전단을 나누어주는 영미, 자신을 해고한 사장 앞에서 자해극을 펼치는 팽기사의 행위 등이 특히 그렇다. 어쩌면 동진의 죽음을 바라던 유령은 영미뿐만이 아니라 일가족과 함께 자살한 팽기사, 동진에게 이유없이 죽임을 당한 중국집 배달원 그들 모두가 아니었을까? (자본가를 향한) ‘복수에 대한 공감?’ 그럼 이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기이한 웃음이 납득할 만한 것이 될까? 영화 속의 한 장면에선 동일한 소리가 어떤 이들에게는 성적 자극을 주는 것이며, 다른 이에게는 그 자신 고통의 호소가 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복수는 나의 것>은 공감되거나 오해되거나 무시될 가능성을 모두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아예 그것에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여주는 영화다. 아벨 페라라의 복수의 윤리학을 고다르의 유물론적 태도로 해체한다, 고 말하면 아마 감독은 웃을 것이다. 그럼 딱 한마디만 하면 된다. 이건 정말이지 올해 여러분이 꼭 봐야 할 걸작 가운데 하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