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유구한 갑질
2017-08-17
글 : 문강형준 (영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 정원교 (일러스트레이션)

‘별 네개’를 단 박찬주 육군 제2작전사령관의 소위 공관병 ‘갑질’ 뉴스로 시끄럽다. 여단장이나 사단장이 부대에 시찰 나온다는 소식에 갑작스레 모든 일정을 중지하고 미화공사에 동원되었던 경험이 없는 예비역이 있을까. 박찬주 대장의 ‘갑질’은 그저 군대 내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최근 몇년 사이에 떠오른 ‘갑질 논란’이 말해주듯, 한국에서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을에 대한 갑질이 자행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갑과 을의 관계가 언제나 변동 가능하다는 데 있는데, 여기서 서러웠던 을은 저기서는 갑이 되어 다른 을에게 갑질을 하기 일쑤다.

여간해서는 변치 않는 갑을 관계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기성세대와 청년세대의 관계다. 이 둘의 관계는 나이 차이라는 전통적인 조건에 더해 경제불황의 장기화라는 특정한 경제적 조건으로 인해 철저한 갑을 관계로 구성된다. 2015년 벌어졌다 최근에야 보도된, 전 러시아문화원장의 여대생 성추행 사건이 전형적이다. 50대 문화원장과 20대 여대생의 관계 속에서 임시채용된 여대생은 자신의 보스인 문화원장의 성적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성추행 피해와 임시직이라는 지위간의 관계는 우연이 아니며, 이 속에는 갑으로서의 기성세대 남자와 을로서의 청년세대 여자라는 또 다른 관계가 작동하고 있다.

여름을 맞아 재개봉한 드루 고다드 감독의 <캐빈 인 더 우즈>(2012)를 오랜만에 다시 보면서 나는 청년세대가 처한 ‘갑질’ 올가미를 떠올렸다. 시골 오두막으로 캠핑을 떠난 다섯명의 대학생들과 최첨단 통제실에 앉아 이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직원들의 대비는 이 영화의 핵심이다. 대학생들이 영문도 모른 채 자신들을 쫓아오는 좀비 가족 앞에서 생사를 걸고 싸울 때, 통제실 직원들은 이들의 선택을 걸고 내기를 하고 관음증적 시선으로 여대생의 몸을 감상하면서 이들의 죽음 앞에서 파티를 벌인다. 상반된 운명의 이 두 집단이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로 나타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에서 청년세대는 땅속의 대괴수를 위해 피를 바쳐야 하는 집단으로 상정되고, 통제실 직원들은 이들의 싸움과 죽음을 그저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과정으로 여기며 경시한다.

끝내 살아남아 통제실 지하까지 들어온 두 청년이 죽음의 이유를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이렇다. “젊으니까. 문화마다 다르고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만 언제나 젊음을 희생해야 했지.” 결국 이 두 청년은 젊음을 희생시킴으로써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인류를 파멸시키는 선택을 한다. “인류는 이제 다른 존재에게 기회를 줄 때가 됐어”라는 대사는 청년들의 선택이 근본적인 성찰에 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엔딩은 값싼 휴머니즘과 타협하지 않으며, 생존만이 최선이라는 냉소적 현실주의로도 기울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모두가 멸망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는 갑과 을로 나뉜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청년세대의 상황을 보여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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