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계획은 없다. 여름이면 어딜 다녀와야 한다는 강박이 싫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 되기도 싫다. 난 다르니까. 당신은 여행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그럼 나에게 다가오지 말 것. 언젠가 당신은 내 곁도 떠나버릴 테니까. 아무튼 어디론가 휴가를 떠나는 대신 내가 여름을 나는 법은 거실 소파에 누워 92인치 스크린으로 옛날 애니메이션을 잔뜩 보는 것이다. 물론 에어컨과 에어서큘레이터를 동시에 틀어놓는다.
최근 마크로스의 첫 극장판을 다시 봤다. 1984년에 나온 작품이니 나보다 약간 어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금 울었다. 우는 내 모습을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중계하려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를 멈춰 세웠다. 요즘은 남자가 울어도 괜찮아. 난 맨박스를 부순 남자지.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역시 마지막 장면이다. 일명 ‘민메이 어택’. 외계인과 우주 전쟁을 하는데 필살기가 ‘노래’라고…? 비트와 멜로디와 보컬의 힘으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찾는다고…? 만약 당신이 이 설정을 유치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나와 친구가 될 수 없다. 당신 얼굴 보기도 싫어. 페이스북 친구도 끊어버릴 거야. 하지만 당신이 이 설정으로부터 낭만을 느끼며 매혹된다면 난 조만간 당신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할 것이다.
일본의 수많은 명작 로봇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내가 특히 마크로스를 아끼는 이유는 이 작품이 세계관 속에 늘 음악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운드트랙의 좋고 나쁨과는 다른 이야기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빼도박도 못하게 어른(아저씨)이 돼버린 나에게 민메이는 다시 묻는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네. 물론이죠. 아주 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