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 보여주는 디지털 이미지의 진화
2017-08-29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새로운 얼굴’과의 조우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하 <종의 전쟁>)의 시저(앤디 서키스, 웨타 디지털)는 생포한 인간 군인을 풀어주며 대령(우디 해럴슨)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인간 사회와 유인원이 공존할 수 있다는 메시지.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메시지는 인간 군인이 아니라 관객을 향해 기능한다. 시저의 메시지는 한밤중에 유인원을 공격해 시저 가족을 말살한 대령의 행동과 대비되고, 그럼으로써 시저가 대령에 비해 도덕적 우위에 설 수 있도록 한다. 비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의 사멸을 지켜봐야 하는 아이러니는 그렇게 완성된다. 인간이라는 종의 사멸을 막기 위해 극단적 선택을 했던 대령이 진정으로 걱정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 아니었을까? 인간이 언어와 지성을 상실한다는 설정은, 인간과 유인원간의 지배와 피지배, 우성과 열성의 자리가 뒤바뀌는 ‘상대적 퇴화’에 대한 알레고리이지 않았을까? 달리 말해 대령은 지구 최후의 종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은 것이다. 다소 비약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인간의 우위를 끝까지 고집하려는 대령의 태도가, 시저가 제기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미학(또는 모션 캡처로 완성된 캐릭터나 앞으로 도래할 AI 시대)에 대한 저항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그의 최후는 나에게 건네는 충고였는지도 모르겠다.

디지털 캐릭터의 존재론

많은 호사가들이 앤디 서키스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을 것인지 궁금해한다. 가십성 호기심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이 인간의 연기와 디지털 이미지가 공존하는 캐릭터의 존재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엔디 서키스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게 된다면 그 자리에 ‘웨타 디지털’이 함께 호명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이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이하 <진화의 시작>)에 대해 “‘원본 없는 인물’의 포토제니”라는 비평글을 썼고(<씨네21> 819호 전영객잔), 이 글에서 찍는 시대(필름)에서 그리는 시대(디지털)로 전환하며 발생하는 이미지의 위상 변화, 그리고 ‘클로즈업의 블록버스터’라 해도 좋을 얼굴의 표현 등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 기본적 입장에는 큰 변화가 없으니 굳이 동일한 내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앤디 서키스에 관한 평가다. 나는 “‘원본 없는 인물’의 포토제니”라는 글에서 앤디 서키스를 디지털 캐릭터를 창조하기 위한 모델 정도로 그 역할을 과소평가했던 듯하다. 지금의 나는 앤디 서키스 없는 시저는 불가능하다는 것, 달리 말해 다른 연기자가 모션 캡처를 담당했다면 시저가 주는 정서적 호소력은 전혀 다른 질감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저는 여전히 내게 ‘원본없는 인물(캐릭터)’이다. 내가 이 표현을 쓴 까닭은,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고수하고 싶은 까닭은 앤디 서키스가 시저의 원본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본이라는 단어가 지니는 수직적인 위계화의 위험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앤디 서키스를 시저의 원본이라고 규정한다면, 웨타 디지털은 부차적인 지위에 놓이고 말 위험 말이다. 과연 시저라는 캐릭터에서 앤디 서키스와 웨타 디지털의 역할을 분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둘의 역할을 수직적으로 위계화할 수 있을까?

내가 <진화의 시작>에서 앤디 서키스의 역할을 폄하했던 오류를 범한 이유는 아마도 배우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릴리안 기시의 눈빛과 오드리 헵번의 미소를 사랑한다. 그들은 변치 않을 나의 연정이고, 변치 않을 영화적 원본이다. 하지만 시저를 창조하는 작업 방식에 한정하자면 배우 중심의 원본 개념을 고수하는 것은 필름으로 ‘찍던’ 시대의 잔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모션 캡처 시대의 인물은 또 다른 방식의 존재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까? <종의 전쟁>의 모션캡처는 배우 역할의 축소가 아니라 캐릭터 표현 범위의 확대다. 이러한 영역 확장은 배우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상호의존성’의 결과다.

어트랙션은 여전히…

<종의 전쟁>을 보며 디지털 이미지는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지 궁금해졌다. 나는 <진화의 시작>을 두고,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지 않고, 스스로 그 흔적을 지워버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시대의 ‘새로운 얼굴’과 조우한다”라고 썼는데, 이 표현은 <진화의 시작>보다는 <종의 전쟁>에 더 어울린다는 점에서 너무 성급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흔적 지우기, 또는 한없이 투명해지기. 어쩌면 그것이 디지털 이미지의 진화 앞에 놓여 있는 종착지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 진화 방식은 영화 이미지의 발전사를 다시 반복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에 참고할 만한 사례는 초기 영화를 연구했던 톰 거닝의 어트랙션(attraction)에 관한 논의다. 톰 거닝에게 어트랙션 영화란 ‘무언가를 보여주는 능력’을 기본으로 하는 영화 또는 ‘이미지를 보이도록 하는’ 영화의 고유한 힘에 충실한 영화를 가리키는데, 영화가 이러한 가시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시기는 1906년 이전의 초기영화였다. 그런데 영화의 이미지가 서사와 결합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어트랙션은 극적 표현의 일부가 되어 인물의 심리와 허구의 세계 속으로 흡수된다. 순수하게 보는 쾌감이 내러티브에 종속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초기영화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영화는 이러한 발전 과정 속에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자신의 일부로 흡수해왔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보는 즐거움’ 그 자체를 우리에게 건네며 시작되지만, 그것의 실질적 성공과 보편화는 서사(또는 캐릭터의 심리 표현의 장치)로 안착될 때 이루어지곤 한다. 톰 거닝은 특수효과를 두고 “길들여진 어트랙션”이라고 말했지만, 과연 영화의 역사에서 길들여지지 않고 살아남은 테크놀로지-어트랙션이 있을까? 그러한 면에서 <종의 전쟁>은 길들여진 어트랙션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유인원의 이미지는 결코 전시적으로 과시되지 않는다. 그것은 철저하게 서사적으로 동기화된 이미지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할리우드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길들이려 할 때마다 고전적인 것을 곧잘 끌어들이곤 한다. 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종의 전쟁>에서 웨스턴과 무성영화 등의 고전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와 가장 유사한 사례가 <아바타>(2009)다. 그 이전의 3D영화가 관객의 바로 눈앞에서 어트랙션을 펼치려 했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수정주의 웨스턴의 서사에 ‘깊이’를 만드는 연출을 통해 가장 고전적인 문법의 영화로 3D영화를 완성했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어트랙션이 길들여진다는 것이, 그것이 영화에서 사라졌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종의 전쟁>은 그것이 서사에 종속되었다 하더라도, 디지털 이미지가 어트랙션이 가지는 원초적 힘을 어떻게 되살리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금까지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액션의 쾌감에 치중하며 (그것이 길들여진 것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어트랙션의 매력을 되살리려 했다면 <종의 전쟁>은 무성영화적인 어트랙션을 되살려낸다. 시저와 유인원의 얼굴은 디지털 테크놀로지-어트랙션이 가시적 영역을 한뼘쯤은 넓혀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관객의 체험을 비가시적 영역(가령 인물의 영혼이나 정신)으로까지 도약시키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증명한다. 만약 브레히트라면 이러한 현상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고기를 낡은 포크로 먹는다’고 아쉬워할 수는 있겠다. 물론 새로운 포크를 사용하면 얼마간은 새로운 분위기를 낼 수도 있겠지만, 낡은 포크든 새로운 포크든 고기의 맛과 영양에는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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