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브이아이피> 박훈정 감독 - 벼랑 끝에 매달린 인물들의 차가운 누아르
2017-08-31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오계옥

“<신세계>(2012)를 기대하고 본다면 당황할 수도 있다.” <브이아이피>로 돌아온 박훈정 감독의 당부다. 누아르라는 같은 장르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박훈정 감독의 전작 <신세계>와 <브이아이피>는 전혀 다른 밀도와 정서를 가지고 있다. <신세계>가 등장인물들의 뜨거운 감정을 싣고 질주한다면, <브이아이피>는 차갑고 건조하게 상황을 응시한다. 북에서 온 귀빈이자 잔혹한 연쇄살인범 김광일(이종석). 그를 잡기 위해 각 조직의 부품처럼 기능하던 인간 군상들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서늘한 불협화음은 박훈정표 누아르 월드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 것이다. “전작을 통틀어 <브이아이피>가 가장 차갑고 서늘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하는 박훈정 감독에게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물었다. 그의 책상 서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메모로부터 <브이아이피>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신세계> 이전부터 구상했던 작품이라고. 지금에서야 영화로 만든 이유가 궁금하다.

=시작에는 메모가 있었다. 평소 생각나는 아이디어나 이야기를 메모해놓는 편이다. <대호>(2015)를 마치고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이야기나 하나 써야겠다 싶어서 예전에 썼던 메모들을 쭉 훑어보는데, ‘남북관계’, ‘국제정세’, ‘귀순’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더라. 처음에는 9개 챕터를 둔 책을 쓰려고 했다가 영화화 제안을 받고 시나리오 작업으로 바꿨다.

-덜어낸 챕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나.

=<브이아이피>의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각각의 인물을 소개하는 챕터를 뒀었는데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많이 덜어내고 사건에 관한 이야기만 남겼다.

-영화를 보니 이 작품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 난감하더라. 공무원이 등장하는 첩보영화? 오피스 누아르?

=(웃음) 무엇보다 차갑고 건조한 누아르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인물간의 사적인 교감이 없고 오로지 자신이 처한 상황과 목적에 충실한, 기계적이고 냉정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누아르영화. 처음 <브이아이피>를 준비하며 배우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영화를 보며 관객이 퍼석퍼석한 모래를 씹는 기분이었으면 좋겠다고.

-<신세계>와 정반대 느낌의 영화다.

=정반대지. 같은 누아르의 카테고리 안에 있지만 <신세계>가 뜨겁고 끈적끈적하고 인물간의 의리와 우정이 있는 브로맨스영화였다면 <브이아이피>는 차갑고 서늘하고 냉정하고 퍽퍽한 정서의 영화다. 더불어 <신세계>가 인물 중심의 누아르라면, <브이아이피>는 사건 중심의 누아르영화다. 그래서 <신세계>를 기대하고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좀 당황할 수도 있겠다.

-장동건 배우가 “덧셈보다는 뺄셈이 중요한 영화”라고 말했고, 다른 배우들의 코멘트를 들어봐도 현장에 서 배우들이 준비해온 것들을 많이 덜어내길 원했다고. 사건중심의 누아르이기 때문이었나.

=자신의 직업군에서 감정을 배제한 채 각자 해야 할 일을 기계적으로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다보니 캐릭터에 대한 설정이 많지 않길 바랐다. 그편이 이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국정원 직원 재혁(장동건)이 임무 수행을 위해 홍콩으로 떠나는 영화의 첫 장면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박훈정 감독이 드디어 홍콩에 갔구나. (웃음) 평소 홍콩영화의 엄청난 팬으로 알려져 있는데, 홍콩에서의 촬영은 처음이다.

=사실 홍콩에서 2회차밖에 못 찍었다. 한국에서 10회차를 찍을 제작비를 홍콩에서는 1, 2회차 만에 다 쓰게 되니 부담이 되더라. 홍콩 소호의 언덕배기에 위치한 아파트가 누아르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던데, 거기에서 영화를 못 찍은 건 정말 아쉽다. 홍콩을 로케이션 장소로 선택한 건 지금의 홍콩이 처한 상황이 매우 흥미롭기 때문이다. 편집된 폴(CIA 요원)의 대사 중에 “아무래도 이제 여기(홍콩)도 중국이라 우리가 움직이는 게 조금 부담스럽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중국이면서 중국이 아닌 공간이라는 점이 재미있었다. 한국이 전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라면 홍콩은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일국 양체제’가 존재하는 나라라는 점에서 선택했다.

-<브이아이피>의 네 등장인물은 모두 자신의 조직에서 수세에 몰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에서 내쳐지는 것이다.

=예전에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하며 본 책에서 한 할리우드 작가가 그런 말을 하더라. 자기는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고. <브이아이피>의 인물들에 딱 맞아떨어지는 말인 것 같다. 이들은 절박하기에 서로를 이해할 여유가 없고 무조건 목적한 바를 이뤄야 한다. 이들이 처한 상황을 극으로 몰수록 등장인물간의 충돌에도 각이 서고 이야기가 힘을 받는다고 봤다. 특히 이 영화처럼 등장인물의 전사가 전혀 없는 상황 속에서 캐릭터들이 강하게 부딪히려면 설정을 내몰아야 했다.

-국정원과 경찰 조직을 다루면서도 액션에 방점을 찍기보다 그들의 일상적인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데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이를테면 경찰이 CCTV로 차량을 수배하고, 국정원이 몰래카메라로 경찰을 감시하는 장면처럼.

=애초부터 액션영화로 기획한 작품은 아니었으니까. 다분히 현실적이고 실제에 가까운, 조직의 일부로서의 경찰과 국정원 요원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영화에는 위계질서를 암시하는 상황과 대사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이도(김명민)의 후배는 이도에게 무안을 당한 뒤 이도 앞에서 자신의 후배에게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면박을 준다.

=군대에 5년이나 있었다. 일반 사병으로 갔다가 상병 때 말뚝을 박아서 중사로 제대를 했거든. 이도와 경찰 조직의 에피소드는 군대에 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군대 문화와 닮아 있는 에피소드다. 국정원과 경찰처럼 남자들이 많이 모여 있는 조직에는 군대 문화가 분명히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위계질서를 암시하는 대사들이 나올거라고 생각했다.

-배우 장동건의 전작을 돌아보니 <브이아이피>에서처럼 조직 안에 속해 있는 회사원 느낌의 인물을 연기한 경우가 드물더라.

=맞다. 이번에는 체제에 지극히 순응적인, 전형적인 공무원을 함께 만들어보자고 배우에게 말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런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문제는 (장)동건씨가 너무 눈에 띈다는 점이었다. 정보기관 직원의 가장 큰 전제조건은 얼굴이 평범해서 기억에 잘 남지 않아야 한다는 건데, 동건씨는…. (웃음) 외모에 대한 부분은 차치하고라도 국정원 직원인 재혁의 표정과 행동만큼은 엘리트적인 회사원의 느낌이 나길 바랐다.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굉장히 못마땅해서 짜증나고 피곤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이었다면 좋겠다고 배우에게 말했다.

-언제 어디에서나 담배를 물고 있는, 불같은 성격의 형사 이도는 어떻게 구상한 건가.

=영화 속을 헤집고 다닐 수 있는 캐릭터가 필요했다. 재혁이 자신의 조직에 순응하는 인물이라면 이도는 조직에 반하는 인물이다. 자존심이 세고 실력은 좋은데 곧이곧대로 하지 않기에 윗사람들이 부리기에는 불편한 사람이다. 이도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는데,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장면도 그런 이도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었다. 여러모로 재혁과 많이 대비되는 캐릭터이길 원했다.

-<브이아이피>의 ‘브이아이피’이자 연쇄살인범 광일과 이도는 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 같은 습관이 있다.

=광일은 일상을 따분하고 무료하게 느끼는 인물이다. 그래서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다. 그가 듣는 음악에 귀기울여보면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를 듣고 있는데, 광일은 <제인 에어>나 <폭풍의 언덕>을 읽고 클래식을 듣는, 서정적인 살인마였으면 했다. 이어폰은 그런 광일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소품이었고, 이도의 경우 음악을 들으려고 이어폰을 끼고 있는 건 아니다. 그는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주변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이어폰을 낀다는 설정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굳이 이어폰이 없어도 이도 같은 인물에게 사람들이 함부로 말을 걸지 않을 것 같고, 전화를 받을 때마다 이어폰을 빼야 한다는 설정도 다소 번잡스러울 것 같아 영화의 후반부에는 끼고 나오지 않는 걸로 수정했다.

-박희순이 연기하는 북한 보안성 출신의 리대범은 시나리오보다 훨씬 날렵한 느낌이다.

=시나리오의 대범이 좀더 단단한 느낌이 있었지. 그래서 처음에는 박희순 배우에게 ‘덩치를 좀 키워볼까’하는 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의상을 피팅하는 날 보니 날카로우면서도 묵직한 느낌이 나쁘지 않더라. 박희순 배우가 눈이 참 슬프다. 사슴눈이거든. 영화를 본 분들이 대부분 ‘대범 역할이 너무 짠내난다’고 하던데 나는 박희순 배우의 사슴눈이 거기에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CIA 요원 폴을 연기한 피터 스토메어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피터 스토메어는 김지운 감독님의 <라스트 스탠드>(2013)에 출연했는데, 내가 각본을 쓴 <악마를 보았다>와 연출작 <신세계>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혹시나 해서 시나리오를 보내봤는데 선뜻 출연하겠다고 해 기뻤다. 본인의 역할에 대한 준비를 굉장히 많이 해왔더라. 광일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대한 폴의 호기심이 사적인 욕심에서 나온 건지, 직업적인 집요함인지를 물었다. ‘우리 영화에 사적인 욕심을 가진 인물은 없다’라고 답하니 그럼 출연하겠다고 하더라.

-<브이아이피>는 당신의 제작사 ‘영화사 금월’의 창립작이다. 제작과 연출을 처음 겸해본 소감이 어떤가.

=연출을 하면서 제작을 병행하는 게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이번에 뼈저리게 깨달았다. 연출만 해도 고민해야 할 게 굉장히 많은데 작품 외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도 신경 써야 하니 굉장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힘들었다. 다음부터는 영화를 연출할 때 무조건 다른 제작자와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피해자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가해자의 시선으로 응시하는 장면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관객도 있을 법하다.

=소녀가 겪게 될 지옥 같은 고통이 그 장면을 통해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소녀와 대비되는 광일의 악마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이 이 영화를 통틀어 그 장면 하나였기 때문에, 그 장면마저 없으면 광일이라는 캐릭터가 철부지 살인마처럼 보일 것 같았고 약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편집 과정에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 어느 정도 충격이 있겠지만 그걸 감수하고라도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 여성 관객이 보기에는 이 장면의 강도가 셌던 것 같다. 내가 보통의 다른 남자들보다 젠더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모자란 정도가 아니라 너무 무지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영화를 하면서 이런 부분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좀더 깊은 고민을 해야할 것 같다.

-마침 다음 작품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마녀>는 어떤 작품인가.

=한마디로 키워드를 정리하면 ‘전복’이다. 기존의 여성 캐릭터를 생각했을 때 연상할 수 있는 것들을 뒤집어 엎는 느낌의 인물을 구상했다. 여고생과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여고생을 노리는 특수조직에 대한 이야기다. 평화로웠던 소녀의 일상이 조직에 의해 위협받고, 소녀가 그들에 맞선다는 내용이다. 전반부는 SF영화에 가깝다고 보면 될 것 같다. 9월 중순부터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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