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세 감독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이원세 감독 마스터클래스’가 오는 9월15일(금)부터 22일(금)까지 상암동 시네마테크 KOFA에서 열린다. <잃어버린 계절>(1971)로 데뷔한 이원세 감독은 무분별한 산업화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그려낸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허황된 아메리칸드림에 경종을 울리는 <여왕벌>(1985) 등을 통해 특유의 사회비판적 시선을 보여줬다. 하지만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1974), <엄마 없는 하늘 아래>(1977) 같은 장르영화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1975년에는 김호선·이장호·하길종·홍파 감독 등과 함께 ‘영상시대’를 결성하며 청년영화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마련한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여왕벌> 등 그의 대표작 12편을 상영한다.
1980년대 초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을 통해 대표적인 사회파 드라마 감독으로 자리잡은 이원세. 그는 <여왕벌> 개봉을 앞둔 1985년 홀연히 사라졌다 2016년 자신의 부고 기사를 정정하며 다시 나타났다. 이원세 감독은 사회적 주제를 다룬 드라마인 <난쏘공>과 <여왕벌>로 알려졌지만 멜로, 액션, 전쟁, 반공영화는 물론 특수촬영이 필요한 괴수물까지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다룰 수 있는 감독이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1973)과 <엄마 없는 하늘 아래>로 상복 많은 감독이자 흥행 감독의 면모를 보여줘 영화사 한진흥업이 무척 아끼는 감독이었다. 사실 데뷔하기 전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 생활을 10년이나 했고 심지어 그 시절 3편의 작품 현장을 동시에 진행할 만큼 구력이 쌓이다 보니 영화사에서 기획한 영화를 목적에 맞게 연출하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 큰 어려움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만 ‘이 영화를 내가 진정 연출하고 싶은가?’라는 내적 갈등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마음의 고향 군자염전, 그리고 10년의 조감독 생활
1940년생인 이원세 감독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해방 후 기독교 집안인 가족을 따라 월남하여 경기도 시흥의 군자염전마을에 정착한다. 그리고 그곳의 풍경과 그가 목격한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그의 의식 깊숙이 각인된다. 반짝이는 소금밭과 수로에 핀 빨간 꽃, 마을을 달리던 수인선 협궤열차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 그 풍경 속에 놓인 사람들의 고된 노동과 가난이 바로 그것이다. 소금이 값비싼 전매품이던 시절 그는 염전마을 노동자들이 자신이 지은 소금을 몰래 훔쳐 협궤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나가 판 뒤 쌀과 생필품을 구해오던 모습을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그가 집필한 <수전지대>(감독 김수용, 1968)는 19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입선작으로 당선된다. 염전마을의 풍경은 그의 영화 속에 가난을 재현하는 데 주요하게 등장한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의 무능한 아버지는 염전 노동자였고, <난쏘공>의 무대 또한 몰락한 염전마을이다. 그는 데뷔 후 가난한 사람들의 고된 일상을 바라보던 시선을 영화 속에 옮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빵간에 산다>(1974), <인간단지>(1975)처럼 소외된 인물을 다룬 영화들이 그런 시도였지만 관객의 반응은 냉랭했다.
학창 시절부터 유럽영화와 고전 할리우드영화를 보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운 그는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그리고 재학 중에 선배인 장석준 촬영감독의 부름을 받고 충무로 현장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1961년부터 김수용 감독의 문하로 들어가 1971년 데뷔할 때까지 오랜 기간을 조감독으로 일한다. 대표적인 다작 감독이자 문예영화로 이름을 떨친 김수용 감독, 그의 문하에서 연출 수업을 받는다는 이점도 있었지만 작품마다 어음이 아닌 현금으로 보수를 챙겨준 김수용 감독의 대우 덕에 그는 오랜 조감독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김수용 감독의 작품 수가 워낙 많다보니 1968년에는 <맨발의 영광> <피해자> <춘향>, 이렇게 3편을 동시에 연출해야 하기도 했다. 후시녹음 시대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의 연출팀이 사극을 포함한 세편의 작품을 동시에 준비했다는 것은 이를 진두지휘한 조감독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방증이다. 물론 한번에 3편의 작품비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는 조감독으로 있으며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와 국학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수전지대>로 등단하는 등 착실하게 감독 준비를 하며 한국영화의 황금기인 60년대를 보낸다.
흥행영화와 새로운 영화 사이에서, 1970년대 감독의 갈등
1970년대, 새로운 세대의 시대가 열렸다. 태창영화사 제작부장 최재호와 김수용 감독의 조감독인 이원세가 의기투합해 데뷔작을 내놓는다. 이원세 감독이 직접 준비한 이 작품의 원제는 다소 선정적인 <꿀맛>으로, 검열에 의해 <잃어버린 계절>(1971)로 개작된다. 남편을 잃은 고독한 여자(문희)가 어느 날 나타난 벌을 치는 남자(신성일)와 사랑에 빠지며 갈등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현기증 나는 멜로드라마다. 이어서 마치 르네 클레망의 <태양은 가득히>를 연상시키듯 장난 같은 거짓말로 신분이 바뀌고 정체성을 잃어가는 인물을 다룬 <나와 나>(1972)로 주목을 받는다. 그리하여 중견 영화사인 한진흥업이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는데, 한진은 당시 동아방송의 인기 라디오 드라마 시리즈인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을 시작으로 그에게 연이어 작품을 맡겼고 이원세 감독은 <특별수사본부 배태옥 사건>과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아빠하고 나하고>(1974)를 문화공보부 선정 우수영화로 만들어 3개의 외화수입쿼터를 제작사에 안겨주었다. 외화의 수입 편수가 정부에 통제되던 당시 외국에서 흥행이 검증된 외화를 수입하면 돈방석에 앉는 것은 공식이었다. 정부는 포상처럼 수여하는 외화수입쿼터를 통해 정권이 권장하는 메시지를 영화에 기입하려 했다. 그래서 반공 액션 드라마인 ‘특별수사본부’ 시리즈와 실화로 화제가 되었던, 어린 아들의 죽음을 불사한 효심을 다룬 영화가 우수영화로 선정된 것은 적절했다. 외화수입쿼터로 수입한 외화들이 흥행하자 한진흥업은 충무로 작은 사무실에서 필동 사옥으로 회사를 옮겼고 이원세 감독은 영화사로부터 특급대우를 받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의 내적 갈등은 심화되었다. 청년문화가 대두되던 1970년대 새로운 영화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젊은 감독이었던 이원세는 영화사의 기획과 목적에 맞춘 영화 연출에 회의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1975년 하명중, 이장호 등 뜻을 같이하는 6명의 젊은 동료 감독들과 함께 영화운동단체 ‘영상시대’를 만든다.기존 한국영화의 정형화된 스타일을 거부하고 서구의 뉴시네마운동처럼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영화를 지향했으나 영화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 시기 연출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한센병 환자들의 자립의지를 다룬 <인간단지>는 사실적인 연출을 위해 모든 배우들이 눈썹을 밀고 소록도에 들어가 환자들과 동거동락하며 촬영했음에도 불구하고 901명이라는 개봉관 최저관객 동원의 오명을 남겼다. 처용 설화를 모티브로 한 신라시대와 현대를 오가는 미스터리 추리물 <꽃과 뱀>(1975) 또한 실험적인 시도 때문인지 배우 박근형의 돋보이는 꽃미모에도 불구하고 개봉관 흥행은 1만명에 머물렀다. 당시 청춘들의 우울과 방황을 다룬 <광화문통 아이>(1976)나 <목마와 숙녀>(1976)도 흥행은 신통치 않았다. 평단의 반응 또한 냉담해 결국 그는 다시 한진흥업의 최루성 가족 멜로영화인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시리즈를 연출해 개봉관 관객수 10만명을 넘기며 흥행 감독으로 다시 자리매김한다. 영상시대는 동시대 관객과의 교감에 성공하지 못한 채 시도에 의의를 두고 끝맺게 된다.
드디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이원세 감독은 1970년대 후반 내내 성실하게 영화사가 의뢰한 작품을 연출한다. 타이와의 합작 작품으로 3개국 인력이 모여 푸껫에서 로케이션한 괴수물 <악어의 공포>(1977), 전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특수효과용 TNT를 2배나 더 들이고 일등 사격수를 차출해 실탄을 쏘며 촬영한 전쟁영화 <전우가 남긴 한마디>(1979, 사실 90년대까지 충무로에서는 총을 쏘면 총구에서 하얀 연기가 나는 효과를 사용했다. 심지어 <투캅스>(1993)의 후반부 총격 장면은 연기가 심해 배우의 표정이 잘 안 보일 정도였다. 이원세 감독은 가짜 같은 연기가 싫어 이 영화에서 실탄을 고집했다), 의정부 기지촌에서 로케이션한 반공영화 <철새들의 축제>(1978) 등이 그가 한진흥업에서 연출한 작품이다.
그리고 그는 의욕적으로 <난쏘공>을 연출하겠다며 한진흥업의 한갑진 사장을 설득했다. 검열 때문에 배경을 원작과 달리 염전마을로 변경했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그가 <난쏘공>을 연출하고자 했을 때 이미 이 작품의 배경은 염전마을로 그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원작자인 조세희 작가에게 각본을 맡기려 했지만 의견이 달라 동료인 홍파 감독에게 각본을 맡겼다. 사실 시나리오가 탈고되기도 전에 촬영을 시작할 정도로 그는 이 작품에 관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의 시나리오 사전검열이 있던 시절이었다. 공윤의 검열 대본을 받은 영화사가 다급하게 촬영현장을 찾아 그에게 빨간 줄이 그어진 대본을 건넨 것이 8번이었다. 현장에서 8번의 대본 수정을 거쳐 각본이 통과되었지만 감독은 위축되고 난쟁이는 점점 더 작아졌다. 개봉 전 실사 검열에서는 한두 군데가 잘려나갔는데 재촬영으로 덧붙일 여력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잘린 채 개봉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서정적인 화면에 담긴 인물들은 환멸과 울분이 내화된 듯 시종 담담한 표정과 무력한 행동을 보여주는데, 마치 검열로 위축된 감독의 처지와 겹치는 듯하다. 그래도 철거용역이 마지막 식사를 하는 가족을 위해 망치질을 잠시 멈추고 또 가족은 그 용역들에게고기 한점을 건네는 인정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군자염전과 갯벌은 매립되어 시화산업단지가 되고 그 주변에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으며 수인선 협궤열차는 복선전철로 변했다. 부동산 개발 광풍에 휩싸였던 <난쏘공> 속 철거민들, 그들 중 난쟁이 가족은 막내딸 영희(금보라)의 활약(?)으로 아파트를 얻었으나, 마을 공터에서 분양권 딱지를 팔던 주민들은 계속해서 변두리로 밀려났을 것이다. 가난하지만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집만 있으면 행복하다던 어머니(전양자)는 결국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 가난한 행복마저 잃게 된다.
여왕벌로 사라지다
<난쏘공> 이후 그가 다시 한번 사회적 주제를 다루고자 의욕적으로 연출한 작품이 <여왕벌>이다. 르포작가 유재순이 당시 이태원 성풍속도에 관해 쓴 동명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 작품인데, 서구의 저질문화와 순수한 민족문화라는 대립 속에서 서구문화에 젖은 여성들이 이태원에서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내용을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70~80년대 대부분의 한국영화가 그러하듯 여성인물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성적 착취는 그의 영화에도 고스란히 존재한다. 어쨌든 <여왕벌>은 서양남자로 대변되는 서양문화의 위선적인 모습과 위험성을 고발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국가기관 모처에서는 엉뚱하게 반미정서로 해석했다. 이태원의 외국인 전용 나이트클럽에 한복을 입은 학생들이 운구를 들고 들어가 춤으로 한바탕 난장을 치는 장면을 보고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민중예술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국가기관의 망상일 것이다. 오해로 인한 해프닝으로 보기에는 당시 이원세 감독을 감시하기 위해 미행이 붙는 식으로 그 정도가 심각했던 것 같다. 결국 권력의 망상을 피해 이원세 감독은 영화계를 잠시 떠나기로 결심하고 가족과 함께 <여왕벌>이 개봉하기 전 미국으로 이주한다. 이후 미국과 중국에서 사업을 했고, 2011년 귀국해 조용히 지내다 최근 원로, 중견 영화인들과 교류하며 과거를 되새기고 있다.
1970년대 활동한 감독으로 과거의 의식과 스타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화를 추구하려 했지만 사양길에 접어든 영화산업의 자장 안에서 여전히 유지되던 검열의 압박하에서 그러한 실험은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황금기를 지나온 다음 세대가 갖는 불안과 방황의 심리가 꾸준히 재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