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영화 <부산행>(2016)이 일본에서 개봉해서 인기를 끄는 모양이다. 감독의 전작을 단편까지 모두 챙겨본 팬으로서 말하자면, <부산행>은 <서울역>(2016)하고 같이 봐야 하는 영화다. 감독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선악으로 나누지 않는다. 그가 그려내는 비극적 사건들은 사회구조에 따른 상황의 산물이지만 선을 넘어가는 순간에 생겨난 결정적인 파국은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다. 따라서 그의 영화에서는 아무도 쉽게 면죄부를 얻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선악을 분명히 나눈 <부산행>은 무척 의외였고, <서울역>을 보고 난 다음에는 이 사고실험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졌다.
주류질서에서 성공한 성년의 남자주인공과 비주류 하층계급 미성년 여자주인공에게 좀비 바이러스라는 동일한 사회적 조건이 실행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부산행>의 남주인공은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내달리는 냉혹한 펀드매니저지만 절체절명의 순간 다른 무엇보다도 딸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로 그려진다. 그는 공동체가 파괴되고 사회가 절망에 빠지자 아이를 지키고 임신부를 지키기 위한 숭고한 선택을 한다. 좀비영화의 장르적 규칙을 어겼다는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말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가족을 통한 구원 담론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모든 사회적 관계가 망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개별적인 삶도 의미를 찾기 어려우므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서울역>의 여주인공은 아무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가족과 업주로부터 도망쳐 나온 그녀 곁에 있는 건 PC방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자신에게 몸을 팔라고 하는 남자친구뿐이다. 먹이사슬의 마지막에서 늘 희생자가 되었던 미성년의 가출 소녀에게 인간은 좀비보다도 대안이 되지 않는다. 여주인공은 아무것도 지킬 게 없고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세계를 홀로 헤쳐나간다. <부산행>의 남자주인공이 좀비가 되는 걸 곧 인간성의 상실이라고 받아들인 것과는 선연하게 대비되게도 <서울역>에서 좀비가 되는 것과 인간이 되는 것은 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좀비가 되면 성별, 나이, 계급과 같은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폭력이 일거에 상쇄된다. 그녀가 구타, 강간, 살해당하지 않으면서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서울역>의 마지막 5분은 사회와 어떠한 연결도 찾지 못한 여주인공이 드디어 사회와 동일해지는 데 성공한 장면이기도 하다. 최근 미성년의 여성 가해자들이 사회적 관심과 걱정의 중심에 놓였다. 디스토피아란 피해자가 되는 것보다 가해자가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형사상의 법적 책임을 지는 연령을 하향시키거나, 미성년의 범죄자에게 사형선고를 내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