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영과 김장겸은 물러나라! 2017년 9월 4일을 기점으로 양대 공영방송인 KBS와 MBC가 언론 적폐청산 총파업을 시작했다. 지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이후, 주연배우들의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으로 화제를 모은 최승호 감독의 <공범자들>이 관객수 20만명을 돌파한 3일 바로 다음날이었다. 지난 10년간 철저하게 망가진 공영방송의 내부에서 계속 싸워온 당사자들을 만나 영화에는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KBS에서는 오태훈 새 노조 부위원장(아나운서), 김현석 기자(2008년 KBS 기자협회장, 2012년 95일 파업 당시 새 노조 위원장), 양승동 PD(2008년 당시 KBS PD 협회장), 정연욱 기자(2016년 <기자협회보>에 게재한 기사 한편으로 제주도에 유배)를 만났다. 2008년 8월 8일 사태부터 가장 최근인 2016년, 총파업이 시작되기까
-KBS가 MBC보다 먼저 타깃이 된 이유는 뭘까.
=양승동_ 2007년 대선 당시 KBS 구노조 행보에 이미 낌새가 있었다. 당시 친한나라당 성향이 엿보이는 집행부에 대한 우려를 하고 있었다. 방송에 대한 독립성, 자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노조가 아니었는데, 정권차원의 연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언론노조에서도 KBS 지부를 제명하고 징계를 했을 정도로 움직임이 수상쩍었다. MB가 당선되고 취임하면서 내내 KBS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물밑에서 이뤄졌다. 계속 이사회 멤버가 바뀌었다.
=오태훈_ 확실한 증거가 있다. 강동순 녹취록이다. 2007년 4월에 이미 당시 강동순 방송위원과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 등에게서 KBS를 어떻게 해야 하나, 노조를 잡아야 하고 장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MB 내각의 검증도 우리가 가장 철저하게 했다.
-그렇다면 그런 정치적 세력과 결탁한 KBS 내부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인데.
=김현석_ 그게 일부가 아니라 주류다. 정권에 부역해서 잘해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당시 노조위원장(구 노조)이 고대영 KBS 사장의 호위무사 중 한 사람이다. 보도국 간부라는 사람들이 정권 교체기에 자신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색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 자체가 회사 문화로서 주류인데, 그게 KBS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싶다. 결국은 정권에 기대서, 줄을 잘 서서 더 잘돼야겠다는 욕망이 방송국 문화의 여러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으로 바뀐 뒤 사람들 머리 굴리는 거 보면 KBS, 아직 멀었다. 정권 바뀌면 바뀌는 대로 또 거기 줄 대서 잘해보려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그 공범자들은 내뱉는 언어만 다를 뿐 본질은 같은 거라, 특히 젊은 기자들은 경계심이 크다. 꺼삐딴 리처럼 어느 상황에서든 살아남는 사람들에 대해.
-시스템과 물량으로 승부하는 KBS가 어떻게 쉽게 망가질 수 있었나.
김현석_ 관료제적 모습이다, 직위를 보장받기 위해 눈치보고 여기저기 보험을 들어둔다.
=정연욱_ 이번 대선 끝나고 술자리에서, 우리 당당하게 죽자, 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기자가 무슨 사무라이인가? 기자의 본분을 다하면 되는데, 문재인 정권에서 구차하게 살지 말고 죽자, 라니 이건 거꾸로 자기고백에 가깝게 KBS 기자들이 그간 얼마나 정치적인 행보를 해왔는지를 증명하는 거다. 상식적으로 기자는 대통령이 누구든 간에 똑같이 공정한 비판의 기준을 가지고 취재를 해야 하는데, 대통령이 바뀐다고 왜 죽어야 하나.
오태훈_ 그나마 그건 낫다. 바뀌면 바뀌는 대로 갈아타는 경우도 많다.
김현석_ 오태훈 부위원장이나 우리 눈에는 KBS 문화에서 당당하게 죽자고 발언하는 게 당연한 거다. 그나마 갈아타는 것보다는 낫다. 최소한 일관성은 있는 거니까. 보도국에는 아직 그런 사람들 많다.
-MB 이전에 잘나가던 언론인들은 정권이 바뀌면서 어떻게 되었나.
김현석_ 재미난 분이 한분 계신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언론 민주화의 화신으로 활약하다가 MB 시절에는 국장이 되어 4대강 비판하는 플래카드 등을 손수 떼어내며 온몸으로 정권을 대변했다. 이후 본부장이 되었다가 지난 대선에서는 문재인 캠프를 기웃거리며 자신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이런 분들이 오태훈이 이야기하는 사람인 거고 흔히 처세에 능하고 줄을 잘 선다고 평가받는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게 아니라, 그게 현실인 거다. 누구도 그를 훌륭하다고 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사람이 득세하고 요직을 차지한다. 가치 판단으로 그렇게 사는 게 존경스럽고 그런 방식으로 살아야겠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지만, 정연욱 기자가 말한 “죽겠다”는 사람은 차라리 그나마 양심이 있는 거다. 옷 갈아입고 또 잘나가보려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싸움이 두렵지는 않았나.
김현석_ 노무현 정부, DJ 정부 10년을 겪으면서 언론의 자율성을 경험했다. 기자로서 자유로운 탐사보도를 통해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정치적 태도에 상관없이 그런 보도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에서 그걸 역행하는 게 힘들었다. 이전 정연주 KBS 사장의 상징성, 시사 프로그램에서 그간 조·중·동에 대해 비판한 것 등을 두고 원한도 크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싸우는 우리가 소수냐, 그건 아니다. 젊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런 정의로운 목소리가 주류다. 잘못된 선배들의 추태를 비판하는 올바른 기자들이 훨씬 더 많으니 우리가 외롭게 싸우는 게 아니다. 정연욱 기자도 제주도로 유배가고 그랬지만 서울에서 피케팅을 하는 등 모두 같이 싸워주었다. 직위를 차지한 사람이 주류인 것이지, 전체 KBS인들의 주류는 또 아니다. 두려운 마음이야 들었지만 결코 외롭지는 않았다. 우린 동료의식이 끈끈한 집단이다.
오태훈_ 그때의 두려움과 최근의 노조 활동을 하면서 겪은 것에는 좀 차이가 있다. 입사한 후에는 KBS는 우리의 조직이라는 주인의식이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와서 우리를 어떻게 해보려는 거, 2008년 8월 8일 전까지 그런 횡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갑자기 외부에서 경찰이 들어오고 사장이 바뀌고, 그런 걸 경험하면서 두려움이 늘었다. 2008년만 해도 우리가 다 막을 수 있다고, 어딜 감히 들어와? 하고 생각했는데, 그런 자신감이 점점 사라져갔다. 경찰들이 들어온다고 해서 일찍부터 우리도 움직이며 대응해보려고 노력했는데 그냥 무력하게 패배했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다. 그래서 새 노조를 만들고, 이렇게 싸우게 된 거다. 나는 아나운서다. 아나운서는 사실 세팅된 상태에서 가장 보호받는 존재인데, 이제 10년간 집회 사회 본 거 말고는 TV에 아나운서로 나가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양승동_ 입사하고 1989년 이후, 계속 언론 환경이 민주화되는 여정을 겪었고, 2007년까지는 계속 나아지는 걸 경험했다. 정연주 사장 시절 한창 프로그램을 할 때는, 우리가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제작 자율성을 보장받는다는 걸 느꼈다. 아이템을 기획해서 제출하면 진행에 제약이 없었고, 당시 자유무역협정(FTA)이나 이라크 파병 등에 대한 기획이나 장관 임명에도 인사 검증 보도를 마음 편히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역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0년간 절망했지만 언젠가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버린 점이 가장 아쉽다. 내가 나이가 가장 많으니 퇴사도 빠를 테고, 방송이 체력적으로 힘든 중노동인데, 프로그램을 못하고 허송세월을 하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
김현석_ <공범자들>은 액션과 블랙코미디, 휴먼드라마 등 장르가 혼합된 영화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액션 활극 담당이다. 어떻게 하면 국민들에게 근사하게 잘 보일까 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현실적으로 청원경찰을 뚫고 3층에 어떻게 올라가고 어떻게 하면 육탄전에서 승리할까 고민한다. 우리의 ‘싸우자’는 추상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 싸운다. 내가 2008년 8월8일에 갈비뼈가 부러졌는데, 그런데도 이사회 쫓아다니면서 석달 넘게 계속 싸웠다. 갈비뼈는 깁스도 못해 움직이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가 있었지만, 이사회가 열리는 장소가 강남에서 마포로 바뀔때마다 다 쫓아다녔다. 당시 길환영 사장 차에 올라타 대자로 눕고, 온몸으로 청원경찰과 대치하고, 출구 저지하고, 차 들어올 때 어떻게 막을지 늘 고민하고.
양승동_ 처음엔 KBS 기자와 PD들이 피켓 들고 목소리만 내도 밖에서 알아주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더라. 몸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석_ 나 같은 약골은 도움이 안 되고, 성재호 노조위원장처럼 덩치도 좋고 힘센 사람이 앞장서줘야 한다. 그는 기도 세고, 안 지친다. 별명이 성 장군이다. 오태훈 부위원장님도 그렇고 우리는 체력적으로 좀 되는 분들 위주다.
양승동_ 부러지고 꺾이는 등 우리는 현장에서 물리적 액션이 많은데, MBC에 비해 해직자 수는 훨씬 적다. 김현석 기자와 성재호 위원장님이 파면, 해임당했는데 바로 기자협회, PD협회에서 제작 거부에 들어가며 대응을 해줘서 사쪽에서 바로 꼬리를 내려 복직이 되었고, 그 뒤로 해직자가 없다. MBC처럼 증거 불충분 해직 같은 드라마틱한 상황이 없다보니, 처절한 장면은 안 나온 것 같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굉장한 딜레마 상황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상징적인 해직은 없지만 그 못지않은 배제와 탄압이 있지 않나.
정연욱_ 동료들이 있어줘서, 제주에 있는 동안 감정적인 외로움 없이 계속 싸울 수 있었다. 힘들었던 지점은 소송을 통해 소장을 보면서 조직에 대한 환멸을 느낄 때였다. 8년차 젊은 기자이고, 조직에 대한 자부심, 신입사원 때처럼 맹목적인 애정도 남아 있는데, 회사가 사활을 걸고 나 하나를 공격했다. 노동위원회에서 사쪽 대표가 나에게는 제주도 근무환경이 더 좋다고 하더라. 서울과 수원의 경인센터를 오갈 때 70km보다 제주 사택에서 총국까지 1km밖에 안 되니 출퇴근 거리가 확 줄었고 더 나아진 거라고, 부당인사가 아니라고 했다. 2016년 3월에 인사가 나서 경인센터에 가 있었다. 겨우 넉달 만에 7월에 <기자협회보>에 기고한 글 때문에 기사 게재 3일 후 제주도로 보내졌다. 지역 근무는 이미 순천에서 한 상태였으므로 해당되지 않았다. 내가 속한 조직과 공영방송에 대한 믿음이 다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정치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구나 싶었다. 한나 아렌트의 글에서처럼 “판단력 없이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몰지각함”을 두눈으로 봤다. 한편의 블랙코미디인데, 그게 당사자가 되면 마냥 웃기지 않는다. 심지어 나는 노동위원회에서 졌고 법원에 가서야 겨우 승소해 경인센터로 복귀했다.
김현석_ 2009년 춘천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당사자가 되면 정말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한다. 일을 못하고, 근무 태도 안 좋고, 능력이 없고, 인사 고과가 최하라서 유배당한 것처럼,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포장된다. 나는 당시 기자협회 회장이자 <미디어 포커스> 앵커였다. 지방으로 보내지는 건 사실 가장 기본적인 자존감을 건드린다. 지방에서 홀로 ‘진짜 내가 훌륭한 기자인가?’라고 자문하면서 교묘하게 무력해진다. 회복도 힘들고, 많이 위축된다. 사소한 말이지만 반복되면 그게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거짓말이지만 그게 반복되면 그 말이 힘을 갖는다.
양승동_ 4∼5년 프로그램을 못하기 때문에 제작 PD의 황금기를 놓친다. 그 허탈감, 시간은 가는데 육체적 한계를 느낀다. 기자쪽을 보면 괜찮은 후배 기자들이 요직에는 못 가고 배제된다. 분노가 쌓일 수밖에 없다.
김현석_ 교묘한 게 아니고 노골적인 배제인데, 나는 마치 노조 세력의 수괴처럼 다뤄졌다. <9시 뉴스>에 10년 동안 한번도 못 나왔다. 뉴스의 인터뷰이로만 나왔고, 리포터는 한번도 한 적이 없다. 제작 프로그램도 못하고, 20년차면 데스크급인데 사인권을 안 준다. “널 못 믿겠어.” 이러면서 어떤 유의 기사를 낼지 모르겠고 혹시 정권에 비판적인 걸 내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분류되었다. 10년간 못 나오다가 제작 거부 들어가기 직전 딱 2주 나오니까, 5분 리포트를 보더니 우리 아들들이 ‘아빠 방송기자 맞네? 멋지네’ 하더라. 영화 내용은 MBC 위주이지만 우리 KBS는 육체적인 싸움을 같이 한 사이라 전우애가 있다. 누가 해직당하는 걸 보면 반발이 훨씬 크다. 그 분노가 장난이 아니고, 김인규도 맨날 “나는 해직은 안 시켰잖아” 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녔다. 우리가 덜 치열하거나 덜 싸운 게 아니라 잘 싸운 거라고 본다. 나와 양 PD님이 파면, 성재호 노조위원장이 해임당하자 바로 다들 제작 거부에 들어가서 사쪽에서 오히려 겁먹고 재심을 하겠다고 했다. 방송을 보면 똑같이 망가졌지만, MBC에 비해서 구성원들이 좀더 보호가 되었달까. MBC에는 스타가 많고 우린 없다. 이상호, 최승호 모두 존재감 강한 스타 PD 출신이고, 해직되고 나서도 자신의 매체를 만들고 영화도 만드는 등 나가서도 잘하고 있지만, 나같은 사람은 KBS가 아니라면 뭘 할 수 있겠나.
-방송법 개정이 필요한 구조적인 문제일까? 법개정 이전에 고대영 사장이 퇴진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면.
김현석_ 구 노조는 그냥 싸우기 싫은 거다. KBS가 망가져 있거나 말거나, 언론으로서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으니까 우선 법 개정을 말한다. 배우 최민식이 <넘버.3>(1997)에서 “그 새끼가 나쁜 사람이지. 죄가 무슨 죄냐”고 하지 않나. 방송법이 무슨 죄냐. 같은 법이었는데 정연주 사장 때에는 문제없었다. 고대영이 정권에 빌붙어 삼수 끝에 사장을 하고, 방송을 망가뜨리면서 정치 세력에 빌붙는 게 나쁜 거고 그것에 분노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뭔 잘못이야, 법을 바꾸자?” 이건 아니다. 과오에 대한 분노가 있어야 하고 반성을 해야 하고, 청산해야 한다. 나중에 법을 바꾸더라도 문제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게 순서다. 법이 바뀔 때까지 그냥 방치하자는 건가? 제왕적 대통령제도가 문제인가? 박근혜가 문제였는데, 헌법을 뜯어고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지 않나.
양승동_ 방송법을 통해 사장을 바꾸는 게 얼핏 더 합리적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내부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동료 기자들과 PD들이 배제당하면서, 방송이 망가지는 걸 보면서 느낀 절망감은 정말 컸다. 거기에 다수가 동의하면서 제작 거부와 파업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파업 대오를 약화시키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물타기다.
오태훈_ 촛불시위 때 자유한국당에서 헌법 개정하자고 한 것과 같은 거다. 시민들은 대통령의 잘못을 이야기하며 분노하는데, 헌법 바꾸고 내각제로 개헌하자고 한 것과 같다. KBS랑 MBC가 다른 게 KBS는 국정감사를 받고, 국회 승인을 받아 예산을 받는다. KBS 사장은 그냥 이사회만 장악한다고 다가 아니라 국회에서 답을 해야 하는 책무가 있는 자리다. 고대영은 거기서 “대답하지 마!”를 했던 거다. 새 노조에만 안 들면 불이익이 없었던 터라 블랙리스트가 따로 없었다. 나는 9년간 아나운서로 활동했는데 방송을 한번도 못했고, 집회 사회만 봤다. 그건 괜찮다. 2012년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다시 5년을 보내야 한다는 절망감에 간부들을 찾아갔다. 내 위 기수는 몰라도 우리 아래 기수 후배들은 방송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일종의 타협을 했다. 길게 싸워야 하는데, 방송에 못 나오면서 갖게 되는 절망감을 후배들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야 괜찮지만, 신입 아나운서가 5년간 방송에서 배제되면 그건 커리어가 끝나는 거나 다름없다. 세팅된 환경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만 시청자를 만나는 위치에 있는 존재가 아나운서 아닌가. 노조 부위원장인 내가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이 괜찮다고 말해주면 동료들과 후배들이 덜 흔들리고 그나마 안심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2008년 8월 8일의 그 무력감 때문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외부에서 불어닥친 폭력적인 외압으로 모든 게 다 무너지는 걸 두눈으로 보았다. 그냥 좌시할 수는 없었다.
정연욱_ 입사하자마자 용산참사를 경험했고, 노무현 대통령 대한문 분향소에서 취재 중에 KBS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시민에게 뺨도 맞았다. 내 말과 글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서 언론인의 꿈을 갖고 방송기자가 되었는데, 입사한 이후 마주한 현실은 꿈과 거리가 너무 멀었다. KBS의 호시절을 경험해본 적이 전혀 없는 젊은 기자들일수록 파업을 통해 방송 공정성을 회복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본다.
김현석_ <공범자들>이 3부로 나뉜 구성인데, 후속편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KBS를 소재로 한다면 액션영화가 될 것 같은데. (웃음) 영화로 만들려면 현실에서 엔딩이 어떻게 되는지가 중요할 것 같다. 새 노조 조합원이 2천명을 돌파했다. 모두 함께 최선을 다해 파업을 이어가 꼭 승리하고 싶다.
MBC에서는 <공범자들>에 출연해 “김장겸은 물러나라!”라는 외침을 페이스북 라이브로 공유한 김민식 PD와 2008년 12월에 입사해 2012년 170일 파업에 참여한 이후 다시 기자라는 본령으로 돌아가지 못한 김민욱 기자를 만났다.
-<공범자들> 마지막 장면에서 검찰에 출두하는 5년 전으로 돌아갈 때, 정말 많이 울었다. 다른 매체에서도 이용마 기자를 이야기하면서 유난히 눈물을 많이 흘리더라.
=김민식_ 용마가 선구자 같은 지사형 인간이다. 보도국 기자,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대학원까지 했다. 나는 87학번인데도, 데모도 안 했고 대학교 4학년 때 B급 영화사 프로듀서 모집 광고를 보고 진지하게 해볼까 생각했을 만큼 딴따라였다. 오랫동안 영화감독이 꿈이었다. 2012년 당시 조합 집행부로서 파업에 임하는 입장이 용마와 내가 달랐던 이유는 당시 예능과 드라마는 뉴스와 시사·교양에 비해 아직 괜찮았기 때문이다. 파업을 접을 때도 용마는 더이상 싸울 수 없으니까 접은 것이고, 나는 돌아가 예능과 드라마를 경쟁력 있게 해보자는 입장이었다. 끝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임한 파업에서 즐겁고 재미나게 싸웠다. 170일이나, 가족이 다 있는 40, 50대 가장들이 그렇게 싸웠는데, 무려 6개월을 싸우고도 졌다. 웃는 얼굴로 찍자고 독려하면서 만든 <MBC 프리덤>이 결국 채증 자료가 되어 조합원들을 색출하는 데 쓰였다. 그때 내 심정은 처참하다는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해직자들도 그대로 남았다. 투병 중인 용마에게도, 우리 조합원 모두에게도 나는 여전히 미안하다. 지난 파업의 아쉬운 부분만 계속 떠오른다. 부채감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잔인한 일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났다.
-페이스북 라이브 장면이 정말 인상깊었다.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이 스마트폰에 기반한 뉴미디어라는 무기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김민식_ 지난 5년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자 계속 싸워왔다. 우리가 정권이 바뀌고 나니 나선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나름대로 투쟁을 계속했다. 임명현 기자는 <잉여와 도구>라는 책을 냈고, 김수진 앵커는 아침뉴스 하다가 드라마국에 와서 홍보를 맡으며 방송을 못하는 와중에 마라톤에 도전했다. 나는 파업이 끝나고 2013년 1월부터 PD연합회에 칼럼을 쓰고 블로그를 했고, 영어책을 썼다. 해직당한 박성제 기자는 스피커를 만들었다. 최승호 선배는 ‘뉴스타파’에 이어 <공범자들>을 만들었다. 다들 뭐라도 하는 거다. 지난 5년간 목도한 걸, 그 내부에서 본 걸 아무도 모를 거다.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감정이 치밀어오른다. 잘릴 각오로, “김장겸은 물러나라!”를 외쳤다. 이미 진 상대와 한번 더 싸움에 나서는데 왜 두렵지 않겠나. 두려워도 그냥 계속하는 거다. 안 그러면 내면에 계속 균열이 가고 내가 부서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싸워야지 그냥 내 발로 걸어나가면 이 빚을 어떻게 다 갚을까 싶다. <공범자들> 홍보에 최선을 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간 우리가 싸움을 안 했던 게 아닌데, 1시간40분 동안 그간의 이야기를 쭉 보여줄 수 있는 영화란 매체의 특성 덕분에, <공범자들> 덕에 지난 10년간의 우리의 싸움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영화의 위력을 요즘 다시 느낀다. SNS와 유튜브 영상이 우리 편인 사람들에게만 공유되는 것이었다면, 영화는 좀더 폭넓게 다가서는 힘을 가졌다.
-젊은 기자로서 보도국 사회부에 있다가 170파업(2012년 170일 파업) 참여 이후 다시 복귀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김민욱_ 2008년 12월에 입사했는데, 이제 기자가 아닌 상태로 지낸 시간이 더 길다. 그간 MBC 뉴스를 보면서 화도 났지만 진짜 하루에도 몇번씩, 이제 기자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너져내린다. 상암 새 사옥에 공간이 많이 남는데도, 굳이 따로 팀을 만들어 파업에 참여했던 몇몇을 소규모로 쪼개 구로(뉴미디어 포맷개발센터)에 보냈다. 처음에는 이렇게 길게 이어질지 몰랐다. 다들 취재를 못 나가고 업무에서 배제돼 할 일이 없으니까, 뭔가 다른 걸 한다. 대학원에 가서 가방끈을 길게 하거나 외국어를 배우기도 한다. 나는동영상 편집을 배워서 <마봉춘 세탁소>를 편집하고 있다. 미래방송포럼이라고 한달에 한번씩 열리는, 미디어 업계의 현실을 외부인사들과 함께 모색해본다는 행사를 맡기도 했다. 군대에서 행정병 보직을 했던 나날들과 겹치는 게 많았다. 무념무상으로 그 잡무를 다 맡아 했다. 해외에서 진행되는 행사 도중 나를 발령낸 본부장과 우연히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내가 누군지를 묻는 사람에게 그가 “김민욱씨 기자 맞아요”라고 들으란 듯 답하기도 하더라. 그 사람은 본부장을 거쳐 지역 MBC 사장이 되며 승승장구했다. 계속 취재를 못하면서 뉴스를 멀리서 바라보니 이전 내 취재들을 복기하게 되고 부족했던 부분들이 떠오른다. 돌아가면 이제 정말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글솜씨가 뛰어나거나 대단히 촉망받는 기자라기보다는 흔히 말하는 ‘몸빵’을 많이 했다. 어렵고 힘든 현장에 더 자주 갔다. 물에도 많이 들어갔다. 추울 때 추운 곳에서, 더울 때 더운 곳에서 온몸으로 부딪히며 일했다. 그때는 힘들었는데 지금은 절실하게, 정신없이 바쁜 현장에 가고 싶다. 봉하마을에 노트북과 옷 한벌 들고 갔을 때처럼 가서 눈코 뜰새 없이 기사를 쓰고 싶다. 다시, 기자이고 싶다.
9월 15일 집회가 예고되었던 KBS 본관 앞과 민주광장이 청원경찰들에게 봉쇄당했던 날, KBS홀 앞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공개방송을 보러온 팬클럽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신관 로비와 카페에는 평온한 일상적 풍경이 놓여 있었다. 바로 벽 하나 건너에서, 옷과 머리가 흐트러질 만큼 험악한 분위기로 KBS 노조 조합원들이 청원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끝내 민주광장에는 들어가볼 수가 없었다. 다른 차원인 것만 같던, TV 속에 등장하던 사람들이 거리로, 현실로 나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공영방송 적폐청산, 언론독립 쟁취, 방송법 개정이라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10년간 꾸준히 싸웠고 패배했으나 각자의 방식으로 싸움을 이어온 그들이 다시 한번 현실로 나왔다. <공범자들>에 다 담기지 못한 목소리가 이토록 절실하니, 거기에 귀기울여볼 만한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