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사랑>의 현택기는 일견 양익준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캐릭터다. 현택기는, 의사에 따르면 정자 수도 적고 그나마도 움직일 의지가 없는 정자감소증에다가 본업인 시를 쓸 때도 절실함 없이 너무 꽃노래만 부른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력하게 아기를 원하는 강순(전혜진)과 관계를 맺을 때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만큼 권태에 빠져 있다. 잔잔하던 택기의 인생에 파문이 이는 것은 도넛 가게에서 일하는 소년 세윤(정가람)을 알고부터다. 양익준은 <똥파리>(2008)를 찍고 개봉하는 과정에서 모든 에너지를 써버려 남은 게 없게 됐다고, 그래서 극중 택기처럼 성감이 없어졌다고 느낀 시절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니까 <시인의 사랑>은 <똥파리>에서 그가 보여준 강렬한 모습에 가려져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양익준의 얼굴이면서, 그가 예술가로서 가진 현재진행형의 고민이 겹쳐 보이는 작품이다.
-사실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살을 좀 찌우고 안경도 끼고 머리를 일부러 아주 평범하게 잘랐다. 중간에 머리 정리가 잘 안 됐는지 뒤로 갈수록 막말로 아주 개판이 됐고…. (웃음) 사실은 계획했던 것만큼 몸무게를 불리지 못했다. 원래 캐릭터가 ‘통통하다’도 아닌 ‘뚱뚱하다’에 가까웠거든. 그래서 15kg 정도 찌우겠다고 욕심을 부렸는데 직전에 일본에서 복싱영화 <황야>를 찍느라 계속 운동을 했더니 살이 잘 안 붙더라. 보름 동안 소화제 먹어가며 노력했는데도 결국 8kg밖에 못 찌웠다.
-기존의 거친 캐릭터를 기억하는 관객은 깜짝 놀라지 않을까. 택기는 소심하고 매우 섬세한 결을 가진, 지금까지 양익준이 보여준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예전 인터뷰를 보면 배우가 캐릭터에 억지로 맞추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던 터라 택기와 자신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는지 궁금해지더라.
=항상 <똥파리> 같은 캐릭터만 연기했던 건 아니다. <집 나온 남자들>(2010)에서는 그냥 나이 많은 동네 노총각 형을 연기했다. 배도 이만큼 나오고. 아무래도 <똥파리> 이미지가 세고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2014)나 <추리의 여왕>(2017)에서도 입 열면 쇳덩어리를 뱉을 것 같은 캐릭터였으니까 그렇게들 보는 것 같다. 사실 실제 모습은 그다지 세지 않다. 욕도 거의 안 한다고 보면 된다. (웃음) <똥파리>를 통해 삶의 어떤 관문을 지나갔고 지금은 그렇게 표현을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말 한마디 못한 채 진물이 흘러나올 때까지 견디는 타입이었다.
-세윤에게 가진 감정이 사랑인지 연민인지 실체가 모호하게 그려진다.
=어떤 분이 남긴 감상 중에 “시인이 소년을 사랑한 게 아니라 시인이 사랑하게 된 게 소년이다”라는 말이 인상적이더라. 가령 감독이 어떤 배우를 캐스팅할 때 단지 이 역할을 잘해내겠지 하는 기대만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 사람에 대한 호감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그렇게 캐스팅을 하고 함께 작품을 만들다보면 감정이 무르익는 부분도 있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자신이 갖고 있지 못했던 질감을 가진 대상을 만나 호기심이 생긴 거다. 내가 쓴 시는 “맴맴” 하고 우는데 얘는 “왜왜”라고 하는 느낌이랄까. 호기심은 원래 호기심만으로 끝나지 않지 않나. 그 안에 어떤 감정이 돌아가게 된다. 세윤의 집안 환경이나 주변 분위기 같은 것이 점차 눈에 들어왔겠지. 낮에 도넛 가게에서 일할 때는 아름답고 뽀얗고 키도 컸던 소년이 저녁이 되면 눅눅해지고 곰팡내 나고 거칠어지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아버지가 병상에 오래 누워계시다 돌아가신 점이나 편모로 자란 건 택기와 소년의 공통점이었다. 그래서 최초의 호기심이 복합적인 감정으로 진전되면서 소년을 바라보는 어떤 정서가 생긴 거다. 택기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니 스스로 느낀 감정에 대해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다만 비유를 하자면 하트의 빨강에 가까운 감정이었던 것 같다.
-세윤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할 때 그 감정을 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 쪽으로 연기했더라.
=좋아하는 대상이 생겼을 때 대부분 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차피 영화는 스토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감정을 너무 보여주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컷과 컷이 정서를 만들어준다. 가령 빈 수영장에서 세윤이 자조적으로 말을 하자 택기가 위로하느라 허벅지에 손을 얹는 장면이 있는데, 원래는 그다음에 허벅지를 꽉 움켜쥔다. 완성본에서는 빠졌다. 사실 하는 입장에서도 자연스럽지가 않았고. 원래 감정의 아슬아슬한 점이 사랑스러운 거 아닌가. 살랑살랑 깃털 같은 느낌을 줘야지 감정 표현을 너무 직접적으로 해버리면 관객에게 답을 줘버리는 셈이니 재미가 없어진다. 세윤에게 돈을 주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장면도 그런 맥락이다. 실체를 알 수 없는 감정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담겨 있다. 얘한테 뭘 해주고는 싶은데 난 여자가 좋은데 왜 자꾸 얘가 마음에 들어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얘가 화를 내니까 우선 지갑에 있는 돈을 준다. 이런거지. (웃음)
-돈도 못 버는 남편을 아껴주는 강순을 두고 어떻게 딴 사람에게 마음을 품느냐며 분노하는 관객도 있던데.
=사실 택기는 무조건 귀여워야 한다고 감독님하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귀여워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그냥 미움받는 캐릭터가 됐더라. (웃음) 7~8년 전에 사랑에 대해 혼자 개념 정리를 한 게 있다. 마치 시계의 시침, 분침 같다고. 원래 이 사람을 향하고 있던 감정이 넘어가버리면 돌릴 수가 없다고. 마음이 변하면 찾아가서 무릎 꿇고 사정을 해봐도 안 된다. 다만 택기의 감정은 강순과의 삶에 조금은 머물고 있는 상태에서 소년에게 향한 것 같다.
-후반부에 택기가 내린 선택을 어떻게 봤나.
=횡단보도에서 신호등 불이 바뀌기 전에 건너가도 사고가 나지 않는다며 도로로 뛰어드는 시절도 있다. 하지만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어른이 되는 과정인 것 같다. 예전의 택기는 파란불이 되기 전 노란불일 때 횡단보도를 건너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위험한 상황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좋은 말로 예지능력이 생긴 거다. (웃음) 어른의 책임감이라는 게 그만큼 어마무지하게 무섭다.
-일종의 성장통 같은 건가.
=사람이 살아가면서 총 4번 정도 성장통을 겪지 않을까 싶은데, 택기한테는 세윤과 있었던 일이 그중 하나였을 거다. 남들은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갈 즈음 겪는 일인데 정작 그 당시에는 택기가 그냥 흘려보내고 도망을 간 거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성장을 한다는 건 어떻게 다른가.
=남들보다 10년쯤 늦은, 40대를 눈앞에 두고 독특한 상황에서 성장통을 겪었다. 성장의 스위치가 좀더 빨리 움직인 거고,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간 거다. 개인적으로 좀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남들은 10대 때 첫 연애를 하는데 난 29살 때 했다. 처음에는 18살에 처음 애인을 사귀는 것과 비슷비슷하게 어리숙하다. 그런데 2∼3번만 연애 경험이 쌓여도 남들이 7~8번한 이후의 속도가 나더라. 왜냐하면 살아오면서 연애만 안 했을 뿐이지 여러 사람을 만나며 배려에 대해 배우고 훈련이 됐거든. 그래서 상대적으로 탄력이 빨리 붙는다. 택기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쌓여온 삶의 여러 가지 소스들이 결정적인 순간 빨리 성장하게끔 도와준다.
-다른 부분에서는 나름의 성장을 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그러지 못한 거였네.
=성장은 삶의 여러 가지 요소가 모여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금 사회에서는 어딘가에 편중된 측면이 있다. 어떤 방향으로는 성숙해지지 못했다. 뉴스에서 불균형적인 경제 성장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요즘 사회가 특히 그렇다고 보나.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지금 한국도 굉장히 과도기다. 가령 페미니즘도 그렇다. 여성들의 권리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았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된 상태로 돌리려는 건데, 이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나같은 사람은 문과 문 사이에 껴 있는 것 같다. 나는…. 기본적으로 여자 편이다. (웃음)
-세윤을 만나기 전 택기는 너무 평탄하게 삶이 흘러가서 좋은 글을 쓰지 못하는 예술가였다. 같은 아티스트로서 동질감이 느껴진 부분이 있었나.
=<똥파리>를 끝낸 후 가족과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러다보니 관계가 좋아지더라. 오랫동안 갖고 있던 분노 같은 것이 옅어지니까 난 이젠 뭘 갖고 영화를 찍고 연기를 해야 하나 불안해졌다. 연기의 기본 주춧돌처럼 생각했던 분노가 사그라지니 마치 작가한테 펜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아티스트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번민 중 하나가 아닐까. 곧 출연하는 방송 때문에 찍어야 하는 단편영화가 있는데 힘들어 죽겠다. (웃음) 택기와 같은 상태다. 어디서 영감을 얻어야 하지? 사실 택기에게는 영감이 없던 게 아니지 않나. 도처에 영감이 널려 있는데 본인에게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니까 도넛 가게에 가도 소년을 안 보고 밖의 할아버지나 보고 있고. (웃음)
-<똥파리> 이후 연출과 연기 모두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시기가 있었다고.
=밥도 허기질 때 먹어야 맛이 있다. 택기는 안정된 상태에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먹고살 수 있으니까 나한테 아이디어가 오지 않는 것만 같다. 여유롭지 않을 땐 모든 게 영감이었는데 말이다. 어느 쓰레기통에 먹을 만한 음식이 있나 열심히 찾게 되고. (웃음) <똥파리>를 만들면서 월급 주고 정산 처리까지 모든 일을 혼자 했다. 그러다보니 나 자신이 갈려 없어져 번아웃된 것 같았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감흥이 사라진 거다. 사실 연기하는 재미를 다시 느끼기 시작한 건 지난해 <춘몽>(2016)을 촬영하면서부터다.
-어떤 면이 다시 에너지를 준 것 같나.
=워낙 장률 감독님 현장이 친구들과 함께 작업하는 듯 편안한 느낌이고, 감독님과 (한)예리씨 모두 좋았다. 고슴도치처럼 각을 세우지 않아도 되니 현장에 대한 즐거움이 다시 생기더라. 그리고 <시인의 사랑> 시나리오를 봤는데 글이 너무 좋아서 바로 하겠다고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시나리오가 하는 이야기가 굉장히 합당하게 다가오더라. 하나의 생물체 같은 느낌이었다.
-<춘몽>에서 연기하는 재미를 다시 깨달은 이후 요즘 연기의 원천은 무엇인가.
=원천이라기보다는, 요즘은 직업인으로서 연기를 하고 있다. (웃음) 예전에는 연기가 절실함이었다. 내가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연기로 해소하고 싶었고, 그래서 감정 표현에 목이 말랐는데 그게 안 되니 연출로 넘어가게 된 거다. 이제 연기는 내가 크게 텀을 두지 않고 꾸준히 해나갈 일이 됐다. 반면 연출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그것을 담는 그릇이다. 비유하자면, 연기는 늘 하는 뜨개질이나 늘 먹는 끼니 같은 것이고, 연출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갑자기 불쑥 떠나는, 조금은 불안정한 여행 같은 것이다.
-단편 <시바타와 나가오>(2012) 이후 연출작이 안 나오는 이유도 그것인가.
=그럭저럭 삼시세끼 먹여살리는 연기쪽이 여유롭다보니까 굳이 발동을 안 하게 되는 걸까. 사실은 딜레마가 있다. 연출을 하기 위해서는 연기를 잠시 그만둬야 한다. 영화를 준비하고 기획하고 직접 만드는 데 2~3년은 걸리니까, 그 정도 시간을 기꺼이 소비할 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 43살인데 진짜 잘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웃음) <똥파리>는 세윤 같은 처지에서 만들었는데, 지금의 난 택기 같은 상황인 것 같다. 택기 같은 양익준에게는 세윤이 같은 놈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발동이 된다.
-남은 2017년 계획은.
=10월에는 <황야> 전편이 개봉하고 11월에는 JTBC 예능 프로그램 <전체 관람가>에서 다른 영화감독들과 각자의 단편영화를 연출한다. 12월에는 드라마 <나쁜 녀석들2>가 방영된다. 작품이 공개되면 시청자들이 충격받을 수도 있다. “헉,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현실비판이 담겨 있다.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전편인 <나쁜 녀석들>의 마동석씨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화자처럼 극을 이끄는 김무열, 박중훈, 주진모, 지수, 박수영, 그리고 나까지 6명이 함께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