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황덕호 재즈평론가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뮤지션 월터 베커의 음악 세계를 이야기한다
2017-10-04
글 : 황덕호 (재즈 칼럼니스트)
밴드 스틸리 댄의 기타리스트였던 월터 베커와 그가 만들어낸 음악들, 그리고 영화가 사랑한 스틸리 댄의 음악에 대하여

매리는 고무 성기가 달린 가죽끈을 허리에 묶었다. 그러고는 그 성기를 주물럭거리면서 말했다. “요코하마에서 건너온 스틸리 댄 3호.” 그러더니 우유가 품어져 나와 방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윌리엄 S. 버로스의 <네이키드 런치> 중에서

스틸리 댄. 이 음란하며 고약하고 짓궂은 이름. 하지만 그 출처를 파헤치기 전에는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름. 동시에 그 이름처럼 모호하고 이상야릇하지만 빈틈없이 완벽한 음악을 지난 45년간 구사해온 록밴드 이름.

팬들은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지난 9월 3일 그룹 스틸리 댄의 ‘절반’이었던 기타리스트 겸 베이시스트 월터 베커가 하와이주 마우이에서 67살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밴드의 또 다른 반쪽이면서 보컬과 건반악기를 맡았던 도널드 페이건은 추도문에서 “스틸리 댄이란 이름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월터와 함께 만든 음악이 계속 나오길 원했다”고 심정을 밝혔다.

베커와 페이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없는 스틸리 댄이란 상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스틸리 댄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모든 곡은 베커-페이건의 공동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커의 죽음은 45년 된 독보적인 이 밴드의 일단락이자 대학 동창으로 만난 베커와 페이건 사이에 이어져온 50년 우정의 끝이었다. 사실 그 세월 속에서 스틸리 댄의 역사는 한번의 단절이 있었다. 당시에도 그들의 헤어짐은 월터 베커에 의해 촉발되었다. 훗날 페이건은 당시 베커와 이전처럼 자주 연락할 수 없었다고 밝혔는데 그것은 1970년대 말부터 베커가 복용하기 시작한 헤로인 때문이었다. 앨범 《Gaucho》가 발매될 무렵 베커의 여자친구가 베커의 아파트에서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세상을 떠나더니 일주일 뒤 베커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연속으로 발생했다(어떻게 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베커는 “자동차와 자신이 동시에 한 지점을 차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능청스레 대답했다). 베커는 헤로인을 끊기 위해 하와이에서 아보카도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1981년 스틸리 댄은 결국 해산을 결정했다. 당시 <롤링스톤>이 “1970년대의 완벽한 음악적 반영웅주의자들”이라고 평했던 이들은 12년 뒤인 1993년에 다시 뭉치게 된다.

베커와 페이건은 1967년 뉴욕주에 위치한 대학 바드칼리지에서 처음 만났다. 학교 근처에 자리한 한 카페에서 “마치 프로페셔널 흑인 연주자의 사운드” 같은 베커의 기타 연주를 들은 페이건은 곧장 “밴드를 찾고 있느냐?”고 베커에게 물었고 그들은 서로 음악 취향마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베이비붐세대 중 옛 재즈에 심취한 보기 드문 취향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재즈버그’들이 세상에 들고 나온 음악은 재즈가 아닌 록이었다. 훗날 재즈 피아니스트 마리언 맥파틀랜드는 이들에게 “왜 재즈 스탠더드 넘버를 연주하지 않고 새로운 곡을 쓰기 시작했나?”라고 물었는데 이때 페이건은 “우리는 재즈 말고도 비트 세대 소설들, 시카고 블루스, 록, R&B 등 많은 것들을 좋아했다. 그런 것들을 음악에 모두 담고 싶었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 대답은 거짓이라고 할 순 없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적 출발점의 모든 것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도널드 페이건 재즈 트리오’, ‘배드 록 그룹’, ‘레더 커너리’ 등 학창 시절 베커와 페이건이 만든 그룹들은 다양했고 그들은 그 속에서 온갖 종류의 음악을 시도했다. 하지만 음악적 욕심에 비해 그들의 연주 실력은 그닥 훌륭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페이건은 당시 자신들의 연주가 “프랭크 자파 곡을 연주하는 킹스맨” 같았다고 웃으며 말한 적이 있다. 젊은 시절에 아무리 연습해도 늘지 않는 연주 실력, 연주자로서 보이지 않는 암울한 전망은 당시 일년에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앨라배마주립대학 미식축구팀에 비유하며 만든 <Deacon Blues>(1977)에 잘 나타나 있다.

“ 난 색소폰 연주를 배울 거야 내 느낌을 연주할 거야 밤새 스카치위스키를 퍼마시다가 자동차 뒷좌석에서 죽을 거야 사람들은 세상의 승자가 된 뒤 이름을 얻지만 난 패자가 된 뒤 이름을 얻고 싶어 앨라배마 대학팀도 ‘크림슨 타이드’라고 불리잖아 그러니까 난 그냥 블루스의 집사라고 불러줘.”

하지만 자기 음악에 대한 이 자조적인 태도. 어쩌면 자기 객관화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판단은 스틸리 댄 음악의 결정적인 한수가 되었다. 만약 이들이 스트레이트 재즈를 연주했다면 이들은 기껏해야 아주 평범한 그래서 아무런 기억도 남기지 못한 밴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연주할 수 있는 곡을 만들고 그들보다 더 능숙한 연주자들을 밴드 멤버나 레코딩 세션맨으로 기용함으로써 그들이 원하는 음악을 구현했다. 뉴욕에서 LA로 건너간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 지역의 뛰어난 연주자들을 영입해 6인조 밴드를 결성하고 밴드 이름을 윌리엄 S. 버로스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공 성기에서 따왔다. ABC 레코드의 프로듀서 게리 캐츠는 스틸리 댄의 가능성을 감지하고 이들과 계약을 맺었는데 예상대로 이들이 처음 발표한 앨범 《Can’t Buy A Thrill》(1972)은 앨범 차트 17위에, 싱글로 발표된 <Do It Again>은 차트 6위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스틸리 댄 음악을 말해주는 중요한 내용은 그 이면에 있었다. 베커와 페이건은 음악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정규 밴드 멤버 외에도 스튜디오 세션맨을 적극 기용했다. 그들에게는 제프 백스터라는 매력적인 기타리스트가 있었음에도 곡에 따라서는 세션맨 엘리엇 랜돌에게 솔로를 맡겼고 심지어 1950년대 모던재즈 녹음에서 활약했던 색소포니스트 제롬 리처드슨을 초대해 <Dirty Work>에서 그의 색소폰 솔로를 삽입했다. 이 대목은 1970년대 록밴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스틸리 댄에 이 풍경은 그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초대한 재즈 연주자들 혹은 세션맨들의 명단은 해가 거듭될수록 계속 늘어갔으니까. 스누키 영, 척 핀들리, 랜디 브레커(이상 트럼펫), 어니 워츠, 빌 퍼킨스, 플래스 존슨, 필 우즈, 존 클레머, 톰 스콧, 웨인 쇼터, 데이비드 샌본, 마이클 브레커, 크리스 포터, 월트 와이스코프 (이상 색소폰), 조 샘플, 빌 샬랩(이상 피아노), 빅터 펠더먼(피아노, 비브라폰, 퍼커션), 래리 칼턴, 마크 노플러, 하이럼 불럭, 릭 데린저, 폴 잭슨 주니어(이상 기타), 조 샘플(건반), 레이 브라운, 척 레이니(이상 베이스), 제프 포카로, 버나드 퍼디, 스티브 개드(이상 드럼), 마이클 맥도널드(보컬) 등의 이름을 어느 한 록밴드의 음반에서 모두 만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스틸리 댄의 원년 멤버 중 베커와 페이건만 남고 모든 멤버가 떠난지 5년 뒤에 녹음된 앨범 《Gaucho》는 스튜디오 완벽주의의 전설로 남은 작품이다. 한 앨범에 무려 42명의 세션맨들이 초대되었고 녹음 기간만 무려 2년 이상 걸린 이 앨범은 이미 라이브 무대를 중단하고 스튜디오 녹음에만 몰입했던 이 밴드의 완벽에 대한 ‘거의 병적인’ 집착을 들려준다(물론 이 긴 제작기간은 월터 베커의 헤로인 복용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적 완벽주의와 스틸리 댄의 노래에서 풍기는 냉소적이며 자조적인 분위기는 묘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사실 이 점이 알 듯 모를 듯한 스틸리 댄만의 매력이다. 베커와 페이건이 그들의 학창 시절을 씁쓸하게 회고한 <My Old School>은 청춘에 대해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그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 그때는 여전히 9월이었지 지방 형무소에 너와 직업여성들이 함께 갇혀 있는 걸 보고 네 아버지가 뒤로 나자빠지신 게 그 사건의 전모를 들으며 나는 애들과 위층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 그러면서 말했지, 안 돼 윌리엄과 매리는 그렇지 않을 거야 난 여자 애들이 그렇게 잔혹한 줄 몰랐어 그래서 난 다신 학창 시절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오히려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청춘은 리비도와의 어두운 갈등이다. 1975년에 발표한 <Everyone’s Gone To The Movies>는 가족들이 모두 영화를 보러 떠난 뒤 집에 홀로 남은 소년이 포르노를 통해 느끼는 흥분을 은유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Cousin Dupree>는 이미 이들의 나이가 50대가 된 2000년에 발표한 곡임에도 불구하고 사촌에게 느끼는 성적 욕망을 은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페이건이 베커에 대해 회고했던 것처럼 그들은 “인간 본성에 대해 냉소적이었으며… 인간의 숨겨진 심리를 읽어내 신랄한 예술로 전환”시키는 데 탁월했다. 다시 말해 스틸리 댄한테는 낭만적인 사랑 노래가 단 한곡도 없다. 그것이 이들의 매력이다.

월터 베커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도널드 페이건은 올해 투어를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페이건이 홀로 스틸리 댄의 이름으로 새로운 작품을 발표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단지 베커가 음악 활동을 멈췄던 기간에 페이건은 스틸리 댄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솔로 앨범을 발표해왔다는 점은 스틸리 댄의 해산을 조심스럽게 예상하게 만든다(현재도 그는 ‘도널드 페이건과 나이트 플라이어스’라는 자신의 별도 그룹을 이끌고 있다). 설사 스틸리 댄의 이름으로 새로운 작품이 나온다 하더라도, 또 페이건의 음악이 너무 훌륭하더라도, 이제 스틸리 댄은 베커의 타계로 그들 역사의 한 단락을 완전히 마무리한 것이다.

2008년 초였을 것이다. 나는 현재까지 스틸리 댄의 마지막 앨범으로 되어 있는 《Everything Must Go》(2003)를 들으며 종로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홀로 걷고 있었다. 가까스로 만들었던 이성의 시대가 저물고 기만과 탐욕의 시간이 시작되던 때였다. 스틸리 댄은 “나는 이제 이 야만의 시대에서 그냥 사라지련다”라고 노래했지만(이 앨범이 나온 당시 미국은 부시 시대였다), 나는 속으로 ‘이 시대도 언젠가는 다 지나가겠지’라며 스스로 위로하며 이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음악 말미에 월트 와이스코프의 색소폰이 애절하게 멀어지면서 음악은 끝이 났다.

그리고 정말, 9년의 세월이 어느덧 흐르고 또 새로운 시절이 기적처럼 시작됐다. 그런데 동시에 그 음악을 들려주던 스틸리 댄도 내 앞에서 함께 사라져버렸다. 센터 구멍도 제 위치에 뚫려 있지 않은 조악한 ‘백판’ LP로나마 ‘다시는 돌아가기 싫은’ 고등학생 시절의 암울함을 그나마 달래주었던 스틸리 댄이 이제 정말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앉기 시작해 35년간 버텨온 내 책상 의자가 녹이 슬어 이 원고를 쓰던 중 나사못을 뱉어내는 것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세월이 그렇게 흐른 것이다. 모든 것은 가버린다. 그나마 음악은 그 희열만을 남긴 채 말이다.

<에프엠>

영화 속 스틸리 댄의 음악들

스틸리 댄의 음악은 지금껏 50편 가까운 영화와 TV드라마에서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스틸리 댄이 영화를 위해 직접 만든 음악은 1978년 영화 <에프엠>(감독 존 앨런조)의 주제가다. LA에 있는 한 지역 FM 방송국에 자본이 몰려들면서 경영자들은 방송국을 상업화하려고 한다. 하지만 독립 방송국으로 좋은 음악만을 선사하려고 했던 DJ와 PD들은 경영진에 맞서 격렬하게 싸운다. 너무 낭만적이고 순진한 내용이지만 공영방송이 총파업을 하고 있는 지금 그래도 볼만한 영화다. 스틸리 댄의 주제곡은 영화가 시작되면서 전곡이 등장한다.

스틸리 댄이 잠정 해산했을 때 도널드 페이건은 애니메이션 <헤비메탈>(감독 제럴드 포터턴, 1981)을 위해 <True Companion>을 만들었다. 이 곡은 영화의 세 번째 에피소드인 <해리 캐년>에 삽입되었다. 아시겠지만, 미성년자들이 더 좋아하는 ‘모자란’ 어른들을 위한 성인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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