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택 감독의 세계에서 어머니는 변방의 존재다. 이제껏 부자(父子) 관계(<똥개>(2003), <미운 오리 새끼>(2012))를 포함해 남성들의 연대와 균열을 주로 그려온 까닭에 어머니는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심지어 전작과 스타일이 여러모로 달랐던 최근작 <극비수사>(2015)조차도 두 남자(김윤석, 유해진)의 공조 수사를 그린 작품이었으니까). 곽경택 감독의 13번째 장편영화 <희생부활자>는 ‘희생부활자’(RV)라는 비현실적인 설정 때문에 관객과 머리싸움을 치열하게 벌이는 장르영화인 줄 알았는데, 진한 모성애를 담아낸 ‘곽경택판 <죄와 벌>’이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 때문에 죽임을 당했던 어머니 최명숙(김해숙)이 어느 날 갑자기 되살아나 집으로 돌아온 뒤, 아들 진홍(김래원)에게 칼을 들고 달려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론시사회가 끝나자마자 만난 곽경택 감독의 얼굴은 오랜 편집을 드디어 마무리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무척 홀가분해 보였다.
-촬영이 2015년에 끝났으니 개봉까지 약 2년이 걸린 셈이다.
=후반작업에서 손볼 게 많았다. 미스터리 스릴러가 다른 장르에 비해 후반작업이 오래 걸리는 장르이기도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개봉까지 오래 걸렸다. 이야기가 무거워 너무 우울하지 않게 끝맺기 위해 나름 희망의 메시지를 주려고 했지만 후반부의 정서는 결국 무겁고, 나 스스로 반성하게 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 잔상들이 있어 작업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던 것 같다.
-그만큼 후반작업에 공을 들였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이토록 에너지를 소진해 다시 채우기를 반복한 작업이 없었다. 어린 시절, 예방접종을 맞기로 했는데 보건소가 하루 늦게 온다고 했다가, 또 늦어져서 접종일이 그다음주로 미뤄지면 계속 위축되잖나. 그렇게 지내다가 영화를 공개하니 아주 홀가분하다.
-이 영화는 <극비수사> 촬영이 끝난 뒤 동생인 곽신애 바른손필름 대표로부터 원작 소설인 <종료되었습니다>를 건네받으면서 시작된 프로젝트다. 원작의 어떤 점에서 영화화 가능성을 보았나.
=소설의 초반 1/3 지점까지가 재미있고 새로웠다. 죽었다가 되살아온 사람들을 소재로 한 영화나 ‘미드’가 제법 많았는데도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한국적인 정서가 있었다. 그동안 취재하거나 주변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원작의 설정과 결합시켜보면 되겠다 싶었다. 그게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실제로 어떤 친구가 만취한 채 배추를 가득 실은 트럭을 몰고 집에 갔던 일화다. 또 하나는 구두닦이가 주경야독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너무 기쁜 나머지 만세를 부르며 차로에 뛰어나갔다가 차에 치여 즉사했다는 뉴스였다. 특히, 어린 시절 봤던 그 뉴스의 잔상이 너무 강하게 남아서 사람의 운명이 너무 가혹하다 싶었다.
-영화는 희생부활자라는 원작의 설정만 차용했을 뿐, 원작과 여러모로 다르더라.
=원작자께는 죄송하지만 각색하는 데 영향을 받을까봐 소설의 뒷부분 절반은 안 읽었다. 아직도 원작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되는지 모른다.
-억울하게 죽었다가 복수를 하기 위해 되살아나는 존재인 희생부활자라는 개념이 다소 생소한데.
=서양의 좀비와 동양의 귀신 사이에서 희생부활자가 어떤 모습으로 출현하는지,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지, RV와 관련된 규칙이 무엇인지 일일이 정의하는 게 어려웠다. 무엇보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고 그럴듯해 보여야 하는 게 중요했다.
-비현실적인 소재를 다루는 장르는 전작 <닥터K>(1998) 이후 오랜만이다.
=이런 이야기는 상상을 베이스로 한 비현실적인 소재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보다가 “에이” 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이라도 꺾이면 그걸로 와르르 무너지는 장르니까. 어떻게 하면 관객의 호기심을 끝까지 붙잡고 갈 수 있는가가 관건이었다. 그러려면 이미지가 힘이 있어야 하고, 설정은 황당해도 톤은 진지해야 한다. <닥터K>가 흥행이 워낙 잘돼서(웃음) 또 이런 장르에 도전해가지고, 스스로를 고민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다니 미친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주인공 진홍의 직업이 원작의 사업가에서 검사로 바뀐 이유가 뭔가. 검사는 구형하는 사람인데 되살아난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심판 대상자로 지목당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더라.
=검사가 벌을 주는 사람이니까. 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어렵지만, 나중에 진홍은 스스로에게 벌을 내려야 하잖아. 무슨 이유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사람이니 다른 직업보다 벌을 직접 다루는 사람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래원과의 작업은 이번이 처음인데.
=진홍은 남자배우들이 그렇게 탐을 낼 역할이 아니다. 사건이 진행되면서 큰 변화 없이 놀라고, 당황스러워 하고, 긴장하기만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래원이가 “하겠다”고 연락이 왔을 때도 ‘(작품을) 잘 모르겠는데 할게요, 감독님이니까 하는 거예요’ 이런 느낌을 받았다. 함께해줘서 되게 고마웠다.
-김해숙씨가 연기한 최명숙은 어마어마한 모성애를 보여주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제작자로서 <우리 형>(감독 안권태, 2004) 때 인연을 맺은 적 있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2007) 때도 후반부 한컷을 함께 작업했던 적 있다. 엄마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거든. 이걸 어설픈 사람이 했다가는 모성애가 잘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영화에서 최명숙의 모성애는 다양한 얼굴로 나타난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진홍을 안아줄 때는 진짜 따뜻한 모습이고, 죽었다가 되살아난 뒤 칼을 들고 진홍에게 달려들 때는 무시무시한 심판자의 모습이며, 경찰에게 사정할 때는 법이든 윤리든 모두 포기할 수 있는 뻔뻔한 모습이다. 이 모든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는 배우가 김해숙이라고 생각했다.
-부자 관계를 그린 적은 있어도 모자 관계를 제대로 다룬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
=동물이든 사람이든 엄마라는 존재는 절대 희생과 절대 사랑을 상징하지 않나. 모성이라는 보호막이 없으면 세상은 무너진다. 남자들의 관계를 주로 그려오다가 이 작품을 준비하며 원작 소설의 정서와 영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대입시킨 사람이 우리 어머니다. 어머니께서 보여주신 절대적인 희생과 사랑은 다른 모든 어머니에게도 똑같이 존재하는 거니까.
-어머니를 떠올리면 어떤 생각이 드나.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면 무조건 미안하지. “(엄마가)귀찮았어요”라는 김래원의 대사가 뜬금없으니 빼자는 의견도 많았는데, 우리 어머니를 생각해보니 여러 핑계 때문에 어머니와 가까이 보낸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내가 애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던 게 결국은 귀찮아서 그랬던 것 같다. 그걸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고, 어머니를 얘기하다보니 감정이 원초적으로 변하는 바람에 컨트롤하느라 아주 애를 먹었다. 누구나 어린 시절 엄마한테 못된 질문을 많이 하잖아. 괜히 뭐 사달라고 하기 전에 “엄마, 내 죽으면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물어보면 우리 엄마는 “그럼 나도 따라 죽지”라고 간단하게 대답하곤 하셨다….
-실내 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야외 신에서 비가 내린다. 이토록 비가 많이 내린 한국영화가 있었나 싶다.
=희생부활자가 비와 함께 등장한다고 설정한 까닭에 비가 계속 내려야 했다. 물이 없으면 생명이 존재할 수 없잖아. 인간 같은 존재(희생부활자)가 또 있다면 그건 물의 존재와도 연결된다고 설정해, 비를 희생부활자가 등장할 때 중요한 매개체로 활용하고 싶었다.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질감을 화면에 담아내기 위해 흐린 날에 맞춰 에너지를 세배쯤 더 쓸 각오를 하고 찍어야 했다. 하늘에 볕이 쨍한데 비가 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촬영 내내 밀어붙였고, 제작부와 배우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촬영 한번 하고 나면 확 지치니까. 총 62회차를 세달 안되는 기간 동안 찍었는데 두달째쯤 몸이 이미 걸레가 되었다.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서사가 곁눈질 하나 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는 덕분에 지루할 새가 없다.
=신이 늘어져서 입맛을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이해가 안 되는 순간 ‘어떻게 된 거야?’ 하고 지겨워지는 거다. 편집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고민을 많이 했고, 시나리오 버전(18고) 못지않게 여러 번 매만진 것도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후시녹음(ADR)을 수차례 하다보니 나중에는 배우들에게 미안해서 또 와달라고 못하겠더라. 희생부활자라는 소재를 가지고 판타지에서 시작해 판타지로 끝나는 이야기는 내 취향도 아니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정말 맞는 선택을 한 건가, 남들이 동의해줄까 하는 질문이 아직도 남아 있다.
-죄와 용서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곽경택 감독의 <죄와 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전작을 통틀어 자기 고백이 가장 강하게 묻어난 느낌도 강했다.
=여태껏 좋아하는 이야기를 영화로 찍으면서 살아왔지, 법이니 죄니 벌이니 용서니 이런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은 못한 채 지내온 게 사실이다. 오로지 내 몸 단속하는 데나 신경써왔으니까. 그런데 이런 주제의 이야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내 가치관과 생각이 당연히 들어가 있어야 하잖나. 지금까지 고민하지 않던 주제를 다루려니까 머리가 아주 아프더라. (웃음)
-살면서 저지른 크고 작은 죄들도 생각났나
=맨 정신에 고의적으로 누군가를 괴롭히겠다고 생각하면 그건 정말 무서운 사람이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취중에 실수를 많이 해. 이게 더 무서운 게 내 본성을 통제하는 뚜껑이 열렸다는 거거든. 인간으로서 지저분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통제가 안 된다는 점에서 섬뜩섬뜩한 순간들이 많다. 나도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시는 스타일이 아닌데도 마시다보면 ‘여기서 왜 자고 있지’ 그런 공포스런 순간들을 경험한 적 있으니까. 그것이 주인공 진홍에게 가장 행복한 날 벌어지면 얼마나 아이러니할까라고 생각했다. 용서, 죄, 벌, 법 등의 단어들을 떠올리면서 내 속을 마주해야 하는 불편함도 물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했던 행동 중에서 용서받고 싶은 행동이 있나.
=감독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족, 아내, 동료들에게 못되게 굴었던 게 미안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되게 쪽팔리고, 뭐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번은 아버지께서 이러시더라. “야, 네가 독립운동을 한다면 이해해주겠다.” (일동 폭소) 기껏해야 영화 만들면서 뭘 그렇게 했는지….
-차기작은 무엇인가.
=<사주>(가제)는 보류한 상태다. 그사이에 막내 동생(곽규택 변호사)이 검사 시절 지휘했던 ‘BBK 김경준 송환작전’을 진행하다가 잠깐 멈췄고, 최근에 (정)우성이와 첫 사극 <마왕>에 도전해보려다가 여러 이유때문에 못하게 돼 지금은 다른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또, 후배 김태균 감독의 <암수살인>(출연 김윤석, 주지훈)에 제작 총지휘로 참여해 촬영현장에서 주로 지내고 있다.
-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의 포스트시즌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게 됐는데. (웃음)
=자이언츠의 열렬한 팬으로서 가을까지 이렇게 즐기게 해줘서 선수들에게 감사하다. (‘시합을 보다가 선수들 욕은 안 하나’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래서 아내가 ‘그렇게 욕할 거면 뭐하러 보노?’라고 하더라. (웃음)암튼 상업영화감독으로서 영화를 믿고 투자해준 투자사에 손해를 안 끼쳤으면 좋겠고, 단 1%라도 칭찬을 더 들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다음 영화를 진행하는데 힘이 빠질 만큼만 아니면 행복할 것 같다.